블로그
2015년 10월 27일 10시 20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10월 27일 14시 12분 KST

'창비스러움에 대하여'에 대한 반박

연합뉴스

* 2015년 10월 26일 허핑턴포스트코리아 블로그를 통해 게재된 김진석 교수의 글 <창비스러움에 대하여 | 신경숙 표절은 어떻게 창비 권력의 문제가 되었는가>와 관련, 정홍수 문학평론가가 아래와 같은 반박, 항의문을 보내와 전문을 그대로 게재합니다.



<허핑턴포스트 코리아> 편집자께.

저는 문학평론을 하는 정홍수라고 합니다. 2015년 10월 26일 귀지에 김진석 인하대 철학과 교수의 「창비스러움에 대하여 | 신경숙 표절은 어떻게 창비 권력의 문제가 되었는가」란 글이 실렸습니다. 그 글의 내용 중 저와 관련된 부분이 사실과 다르게 자의적이고 악의적으로 인용되어 논지의 근거로 쓰이고 있는 걸 발견했습니다. 저는 김진석 교수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인용된 부분이 사실과 다르다는 점을 설명하고, 저와 관련된 내용을 삭제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김진석 교수는 '제가 전하는 사실'과 별도로 '객관적인 제3자의 해석'의 차원이 존재한다는 점을 들어 제 요청을 거부했습니다. 다만 김진석 교수는 저와의 통화 후, 발표된 글 말미에 다음과 같은 부분을 덧붙였습니다.

본문 일곱 번째 단락 <10월 초 창비 부설 세교연구소 임원급의 문학비평가와 며칠 여행을 같이 하게 됐던 한 친구의 말에 따르면, 당시 창비 핵심으로부터 그 비평가에게 창비와 백낙청을 옹호하라는 '오더'가 수차례 떨어졌다고 한다.>와 관련, 해당 문학비평가는 '오더'가 아닌 '청탁'이라고 알려왔습니다.

그런데 이 덧붙임 또한 잘못된 사실의 정정과는 거리가 멀고, 다시 한번 사실을 왜곡하고 있습니다.

<허핑턴포스트 코리아>의 편집 원칙이 구체적으로 어떠한지는 알지 못하나, 언론매체로서 사실이 아닌 것, 왜곡된 사실을 논지의 근거로 사용하는 어떤 글도 게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필자인 김진석 교수와는 별도로 귀지에 항의 메일을 보내는 이유입니다.

먼저, 김진석 교수의 글 가운데 저와 관련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런데 10월 초 편집위원들이 나섰다. 이전보다는 훨씬 조직과 진영 논리가 두드러졌지만 그래도 조직적인 진영논리가 작동하는 것일까, 라는 물음에 대답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며칠 전 이 물음에 대답해줄 수 있는 상당한 증거를 간접적으로나마 접하게 됐다. 10월 초 창비 부설 세교연구소 임원급의 문학비평가와 며칠 여행을 같이 했던 한 친구의 말에 따르면, 당시 창비 핵심으로부터 그 비평가에게 창비와 백낙청을 옹호하라는 '오더'가 수차례 떨어졌다고 한다. 놀랄 일 아닌가? 아마도 그에게만 그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창비 편집위원들과 세교연구소 다른 멤버들에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으리라고 정당하게 추측할 수 있다.

그러니까 위 인용에서 거론된 '창비 부설 세교연구소 임원급의 문학비평가'가 저입니다. 저는 세교연구소 회원이고, 지금은 2년째 세교연구소 이사를 맡고 있으며, 문학비평을 하고 있으니 저를 형용하고 있는 사실들은 틀린 게 없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대목은 전혀 사실과 다릅니다. 세교연구소는 창비에서 만든 연구소이긴 하지만, 그 회원 구성은 다양합니다. 창비 편집위원들처럼 창비 내부 분들도 있지만, 창비와는 특별한 인연이 없었던 외부 학자나 연구자, 평론가도 많습니다. 세교연구소 월례 포럼에서 발표자나 토론자로 초청받은 것을 계기로 회원인 된 분도 여럿입니다. 굳이 분류하자면 저는 그런 외부에서 세교연구소 회원으로 참여하게 된 경우입니다. 저는 계간지 <창비>에 글을 쓰기도 하지만, 외부 필자로서 청탁에 응해 그렇게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더 구구한 설명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그저 저는 한 사람의 문학평론가입니다. 청탁을 받아 글을 쓸지언정, '오더'를 받아 글을 쓰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저 자신의 '인격'으로, '자존심'으로 지켜지고 보호받아야 할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두번째, '상당한 증거를 간접적으로나마 접하게 됐다'는 대목에서 김진석 교수에게 이야기를 전한 것으로 되어 있는 저의 여행 동행자는 술자리에서 일어난 "미스커뮤니케이션의 결과"라고 제게 문자를 보냈고, 문제의 글을 접한 뒤 필자인 김진석 교수와의 통화에서 사실의 잘못을 지적하고, 글을 내릴 것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창비 핵심으로부터 창비와 백낙청을 옹호하라는 '오더'가 수차례 떨어졌다"는 이야기는 전혀 사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가 받은 것은 <창비주간논평> 편집자의 청탁 메일이었습니다. 저는 1년 이상 <창비주간논평>의 '문화' 부문 글을 써오고 있는 소위 '고정필자'입니다. 매달 한 편씩 글을 쓰는데, 저의 사정이나 <창비주간논평> 지면의 사정에 따라 게재 주일은 다소 유동적이고, 대개 게재 일주일이나 이주일 전쯤 통보를 받아 써오고 있습니다. 같은 주에 실리는 <주간논평> 다른 부문 글과의 중복을 피하기 위해 초기에는 간혹 테마를 서로 상의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거의 전적으로 제 임의대로 글을 써서 게재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번에는 <창비주간논평> 편집자로부터 '선생님이 신경숙 문학의 깊은 이해자인 만큼 신경숙 씨 문제'에 대해 써주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저 자신 '신경숙 문학의 깊은 이해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신경숙 문학에 대해 몇 차례 글을 쓰기도 했고, 또 나름대로 애정과 신뢰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최근의 문제에 대해서라면 저 자신 신경숙 문학에 가해지는 단죄와 매도, 마녀사냥식 논의에 분노하고 있었고, 기회가 되면 글을 써볼 생각이었던 터라 흔쾌히 동의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소위 '문학권력 프레임'이 사실에도 어긋나며 과장되고 기만적인 논의라는 생각을 평소에 해오고 있었습니다. 다만 여행 일정이 잡혀 있어서 당장은 어렵겠다는 의견을 전했습니다. 여행 중이던 10월 13일, 다시 <주간논평> 편집자로부터 정중한 메일이 와서 '다음주', 그러니까 10월 21일 게재가 가능한지 물어왔고, 저는 그렇게 하겠다고 답했습니다. 여기에 편집자와 필자 사이의 글 게재를 둘러싼 청탁이 있었을 뿐 어디에 '핵심'이 있고 '오더'가 있습니까. 제가 아무리 허접한 평론가라 하더라도 저 자신의 글쓰기를 남의 '오더'(이 말에는 '명령' '지령'과 같은 악의적인 뉘앙스가 풍깁니다)를 받아서 쓰는 것으로 비하하겠습니까. '오더'라는 말은 제가 평소에 전혀 쓰지 않는 말이기도 합니다. 물론 김진석 교수는 이 말이 자신의 '해석'이라고 주장했지만 말입니다.

다만 친한 사람들과의 여행이라 저녁 술자리에서 <주간논평> 청탁 이야기를 하면서, 반농담으로 뭐 여행중인데 메일까지 보내나 하는 투정을 한 건 사실입니다. 청탁을 받아들이는 것과는 별개로 어떤 글이든 글 숙제의 무게는 버겁기 마련이잖습니까. 이게 일어난 일의 다입니다. 그리고 저는 여행에서 돌아온 뒤, <쇠스랑으로 다시 발을 찍는 시간--신경숙 씨를 생각하며>라는 글을 써서 <주간논평> 편집자에게 보냈고, 이 글은 10월 21일 인터넷 창비 홈페이지 주간논평 지면(http://weekly.changbi.com/?p=6557&cat=3)에 실렸습니다.

저는 최근 사안에 대해 김진석 교수의 생각과 논지에 동의하지 않지만, 김진석 교수가 어떤 글을 쓰고 주장을 펼치든 그건 그분의 자유라고 믿습니다. 다만 김진석 교수가 자신의 논지를 주장하고 전개하는 데 있어서 명백한 사실을 자의적이고 악의적으로 왜곡하여 인용한다면 그것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김진석 교수의 이번 글에서 저와 관련된 부분은 그 자신이 주장하는 논지의 꽤 중요한 논거로 인용되고 있기도 합니다. "상당한 증거를 간접적으로나마 접하게 됐다"며. 그렇다면 그렇게 중요한 증거를 왜 당사자에게, 그리고 그 전언자에게 다시 한번 확인하는 당연한 절차조차 거치지 않았나요. 타인의 글쓰기를 '핵심' '오더'와 같은 있지도 않은 표현으로 오도하고 모욕할 권리가 누구에게 있습니까. 이것이야말로 '문학권력 비판론자'들이 스스로 갇혀 있는 환상과 기만의 프레임을 증명하는 것 아닌가요.

저는 이 글이 <허핑턴포스트 코리아>에 실리기를 바랍니다.

2016년 10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