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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04월 22일 05시 49분 KST | 업데이트됨 2017년 04월 23일 14시 12분 KST

나도 모르게 죄짓지 않는 법

장면 1.

지인들과 차로 이동하고 있었다. 이동 중에 운전대를 잡은 분께서 말씀하셨다. 그저께 가벼운 접촉 사고를 겪었다고. 상대 차 운전자는 대리운전 기사님이었다며, '웃긴 게 뭔 줄 아냐'고 물으셨다. 정적이 흐르자 이내 스스로 답하셨다. '접촉 사고가 났는데도 조수석에 타고 있던 차 주인이 술에 취해 깨지를 않았다'고. 곧이어 '더 웃긴 게 뭔 줄 아냐'며 역시 스스로 답할 게 분명한 질문을 던지셨다. 정답은 금방 공개되었다. "조수석에 있던 차 주인이 여자였어." 순간 냉랭한 공기가 차 안을 맴돌았다.


장면 2.

애인의 자전거가 말썽을 일으켰다. 동네 자전거 수리점으로 향했다. 인자한 얼굴의 사장님은, 자전거를 끌고 오는 우리를 보시고 문을 열어 맞아주셨다. 수리하는 동안 어디가 어떻게 문제인지 다정하게 설명하셨고, '장인 정신'을 발휘해 꼼꼼히 손봐주셨다. 부담스럽지 않을 수준에서 친절을 베푸시며 자전거 전반을 정성스레 고쳐주신 사장님 덕분에, 애인도 나도 흐뭇했다. 수리가 끝나 비용을 계산하고 나가려는 찰나에 내가 통화하느라 잠깐 밖에 나가 있었다. 깜빡하고 지갑을 못 챙긴 애인이 나를 찾자, 사장님이 애인을 연기하듯 말씀하셨다. "오빠, 이거 계산해야지."


둘 다 명백하게 문제적인 상황이다. 그런데 위 일화에 등장하는 두 분을 포함해 여기서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 같다. 이해한다. 사람은 혼자 크지 않으며, 사회의 산물에 가까우니까. 위 두 상황의 문제점을 모른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에 차별과 혐오가 공기 속 산소처럼 녹아 있다는 얘기다. 이런 사회에서 살고 있다면 누구든 잘 몰라서, 무심결에, 누군가를 향해 차별하고 혐오하는 발언과 행동을 할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마냥 면죄부를 받을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알고 저지른 죄를 나쁘다고 여기지만 불교에서는 모르고 저지른 죄를 더 나쁘다고 본다지 않나.

모르고 죄 지을 확률은 남성, 성인, 이성애자, 비장애인, 중산층 이상과 같이 사회 주류에 가까울수록 높아진다. 한 사회의 주류로 산다는 것은 무신경하다는 것과 같은 말이니까. 소외되고 배제당할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운 이들에게 세상은 살 만한 곳이기 마련. 자신보다 불리한 처지에 놓인 다른 사람들의 입장을 잘 헤아리지 못한다. 그렇게 타인의 입장을 고려하지 못하면 종종 본의 아니게 일상에서 말과 행위로 누군가를 할퀴게 된다. 그 경우에서 누구도 예외가 아니다. 사실상 절대적인 사회적 약자나 강자는 없기에. 우리 모두는 계급, 성별, 나이, 학벌, 지역 등 적어도 어느 한 부분에서는 갑이고, 또 을이다. 서로 쉽게 상처 주고받지 않으려면 타인의 입장을 '공부'하기라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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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방법으로 가장 만만한 것은 아무래도 좋은 책을 읽는 게 아닐까. 개인적으로 정희진의 《페미니즘의 도전》을 비롯해, 여성을 중심으로 성소수자, 미성년자, 비정규직 노동자 등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의 시선과 감수성으로 한국 사회를 보게 하는 그런 좋은 책들이 죄짓는 빈도를 줄이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가장 최근에는 이라영의 《환대받을 권리, 환대할 용기》가 그 좋은 책 가운데 하나였고. 좋은 책을 읽는다고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될 수 있는 단초는 얻을 수 있었다. 저자의 탁월한 필력 덕에 이미 알고 있는 것들조차 새롭다고 느꼈고, 읽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던 점은 덤이었다 말해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