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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2월 07일 04시 59분 KST | 업데이트됨 2015년 02월 06일 14시 12분 KST

1700개의 섬

어느 아파트의 경비원이 자기 몸에 불을 지르고 끝내 숨진 참사는 우리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울분을 참지 못한 동료들이 고인의 시신 앞에 망연히 서 있는 모습이 몇 차례 TV 뉴스에 떴지만 용역업체를 바꾸기로 결정한 이 아파트가 경비원들이나 환경미화원들의 고용을 승계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따지는 것으로 이 비극이 마무리되어 버릴 것 같다. 사과나 위로금 따위가 어찌 됐는지는 모르지만 인간의 마음이 바뀌지 않는 한 그 또한 무슨 소용이겠는가. 우리는 모진 사람들이 되었고 한편으로는 피곤한 사람들이 되었다. 그래서 제 사는 자리를 더욱더 섬으로 만들려 하고 거기에 철벽을 치려 한다.

한겨레

"일천칠백도 남쪽 바다 달무리만 고요한데"라는 말로 시작하는 노래가 있다. 초등학교를 들어갈 무렵 옆집 누나의 노래를 들으며 따라 불렀다. "일천칠백도"가 무슨 뜻인지는 물론 몰랐다. 나이가 들고 한자와 한자어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나는 그것이 '일엽편주의'가 와전된 말일 것이라고 지레짐작했다. 그것이 실은 '1700개의 섬'이란 뜻이며 그 노래가 진방남이 부른 '명사백리'라는 것을 알려준 것은 문화평론가 이영미씨이다.

노래로 불러야 할 서정과는 아무 관계가 없을 것 같은 숫자도 그것이 섬의 수와 연결될 때는 시적 환기력을 지닌다. 캐나다와 미국 사이 세인트로렌스 강과 온타리오 호수가 만나는 지역의 1860여개 섬을 가리키는 '사우전드 아일랜드'는 샐러드드레싱의 이름으로도 사용된다. 사람들은 세상살이의 번뇌와 오욕으로부터 보호된 세계가 바다로 격리된 섬에는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섬에서 자란 나는 그런 생각이 어처구니없지만 한편으로는 흐뭇하기도 하다. 섬은 적어도 순결하고 평화로운 해방구에 대한 영상 하나를 만들어 주었다. 1700개의 섬에는 그만한 수의 행복이 있다.

정현종 시인의 짧은 시 '섬'은 "그 섬에 가고 싶다"로 끝난다. 조선시대의 소설 <홍길동전>도 사실상 '그 섬에 가기'로 끝난다. 폐결핵에 시달리며 암담한 삶을 눈앞에 두고 있던 시인 이상이 여기저기 찻집을 꾸릴 때도 마음속으로는 어떤 외딴섬을 꿈꾸고 있었을지 모른다. 우리 시대에 삶의 공간이나 문화적 환경의 기획에도 그런 섬의 영상이 자주 개입한다. 시미즈 레이나의 책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에서 "서점이 가진 가장 중요한 역할은 무슨 책이든 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보다는 책과 조우하거나 혹은 자기 세계관에 접근할 수 있는 공간 기능을 조성하는 데 있다"는 건축가 후지모토 소우의 말을 읽으면서도 나는 그가 어떤 아늑한 섬을 그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한국에서 1960년대 초에 시민들의 주거공간으로 아파트를 시험 삼아 짓기 시작할 때 자유직업에 종사하는 독신자들이거나 신혼부부였던 아파트의 첫 입주자들도 사생활이 보호되고 개인의 취향이 차별되는 공간을 거기서 발견했을지 모른다. 이제 아파트는 대다수 시민들의 집이 되었다. 구획된 공간 안에 생활의 편의를 위한 시설과 도구들이 정연하게 배열되어 있다. 아파트는 처음에 생활의 더께가 눌어붙은 왁자지껄한 골목과 차별되었지만, 이제 그 격리된 섬으로서의 가치는 줄어든 듯하다.

그러나 순결하고 평화로운 공간을 찾지 못한 사람들은 제 공간에 순결과 평화를 강제함으로써 어떤 차별된 가치를 누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제는 아파트가 아파트를 차별한다. 아파트의 담장 쌓기나 시설물의 차별적 사용은 벌써 사람들의 관심도 끌지 못할 이야기가 되었다. 어디서 건너들은 이야기지만 어느 학부모는 자기 집 애의 학급에서 가난한 아파트의 아이가 반장이 된 사실을 못마땅하게 여겨 담임교사를 찾아갔다. 그래도 가난한 아파트 운운할 수는 없어서 맞벌이 가정의 아이가 반장이 되면 누가 학급 일을 돌보느냐고 에둘러 말했다는 것이다. 지난날에는 부잣집 아이가 가난한 집에도 놀러가고 가난한 집 아이가 부잣집에도 놀러갔지만 이제 그런 일은 중대한 사고로까지 여겨진다. 섬은 성벽을 치고 전쟁하는 섬이 되었다.

어느 아파트의 경비원이 자기 몸에 불을 지르고 끝내 숨진 참사는 우리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울분을 참지 못한 동료들이 고인의 시신 앞에 망연히 서 있는 모습이 몇 차례 TV 뉴스에 떴지만 용역업체를 바꾸기로 결정한 이 아파트가 경비원들이나 환경미화원들의 고용을 승계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따지는 것으로 이 비극이 마무리되어 버릴 것 같다. 사과나 위로금 따위가 어찌 됐는지는 모르지만 인간의 마음이 바뀌지 않는 한 그 또한 무슨 소용이겠는가. 우리는 모진 사람들이 되었고 한편으로는 피곤한 사람들이 되었다. 그래서 제 사는 자리를 더욱더 섬으로 만들려 하고 거기에 철벽을 치려 한다.

그러나 철벽의 보호를 받는다고 해서 피곤한 마음이 거기서 편안할 수는 없다. 차라리 피곤함은 그 철벽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청량한 섬의 영상으로 깨끗하고 아늑한 삶을 기획할 때는 그 삶이 비록 독립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그 순결과 평화를 거기 가둬두기 위함이 아니라 그것을 온 세상의 것으로 펼치기 위함이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끌어안아야 할 모든 것을 몰아내고 제 번뇌와 오욕만을 가두어 둔 1700개의 섬은 그 수의 지옥이다.

* 이 글은 경향신문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