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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30일 06시 12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11월 30일 14시 12분 KST

죽어야 사는 나라

gettyimagesbank

얼마 전 한 일러스트레이터의 부고를 듣게 됐다.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일간지 기사를 통해 그의 삶을 간접적으로 접했을 뿐이었다. 침착하게 자살을 준비하며 자신이 가진 것을 하나둘 남에게 나눠 주고 삶을 정리한 그는 마지막 순간에도 담백했다. 카드빚을 가족에게 부탁한다고 했다. 눈물이 났다. 창작자는 대체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절망스러운 한탄이 온몸을 헤집어놨다.

불교에서는 전생에 지은 업보가 현생에 나타난다고 한다. 예를 들어 사이가 매우 좋지 않던 원수가 부모와 자식으로 태어나 평생 함께한다는 것이다. 그럼 창작자는 대체 무슨 극악무도한 죄를 지었기에 이번 생에서 이렇게 고통을 참으며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나갈 수밖에 없는가.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하며 글을 쓰는 사람들은 회사에서 맹렬히 일하는 샐러리맨과는 다른 방식으로 각자 그들의 삶을 치열히 살아간다. 베짱베짱 거리며 개미에게 붙어먹는 존재가 아니란 말이다.

그러나 사회는 이들을 잉여로운 존재인 양 취급하며 최소한의 안전망조차 아깝다고 느끼면서 단지 그럴듯한 정책이나 선거용 구호에 적절한 단어인 '창조 산업'이란 미명 아래서야 잠시 현실로 소환한다. 피고름이 만든 창작물과 바꾼 푼돈으로 그저 고름을 닦아내는 데 급급한, 언젠가 그 욕창이 터져 다리와 팔이 잘리고 사회의 안전망 밖으로 튕기는 사람들은 이런 찰나의 기회조차 소중하다며 하루하루 근근이 희망을 품고 살아간다. 창작자는 어쩌면 상상 속에서야 마음껏 뛰어볼 수 있는 식물인간인지도 모른다.

몇 년 전 남은 밥과 김치를 옆집에 조심스레 물어보던 시나리오 작가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이름을 딴 법안이 통과되며 어떤 변화가 시작되는가 생각한 적이 있다. 지금 보니 그것은 잠시 숨을 고르게 하는 착각이었을 뿐이었다. 이제 듬성듬성 낡은 철골 격자에 위태롭게 선 상태로 비상하기 위해 날갯짓을 수없이 연습해도 이미 천장은 잿빛 먼지로 가득 찬 유리로 가로막힌 지 오래다. 희망의 증발. 업계에서 인정받던 일러스트레이터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이유이기도 하다.

창작자에게 지금의 대한민국은 '죽어야 사는 나라'다. 한두 명씩 고꾸라지며 잠깐의 위로와 걱정과 관심이 쏟아질 때야 천장이 빼꼼 열린다. 운구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방에서 탈출한 시신은 그제야 잠시 제 존재를 드러내며 명멸하다 바스러진다. 질식하든, 자해하든, 죽어야 삶의 세계로 이관돼 기록으로 살아나는 시스템에서 창작자는 어디까지 버틸 수 있나 실험당하고 있다.

짧은 부음으로 채우는 사자(死者)의 책이 늘어나고 또 늘어나 천장이 붕괴할 때까지 가만히 기다릴 순 없다. 막힌 천장을 안에서 깨뜨리는 게 나을까, 밖에서 어떤 초인이 부수는 게 좋을까 갑론을박하기보다 일단 어떻게든 부숴버리겠다는 행동이 절실하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 먼저 살고 봐야 하지 않겠나. '죽어야 사는 나라'에서 '부숴야 사는 나라'로 이행하는 게 큰 욕심이라면, 하늘이시여! 후생에 그 업보를 짊어질지언정 오늘도 배가 터질 때까지 욕망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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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은 CA Korea 2015년 12월호 'INSIGHT'에 기고한 원고를 수정, 보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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