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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6월 26일 13시 41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06월 26일 14시 12분 KST

[인터뷰] 은밀하고 황홀하게 빛을 다루는 사진 심리학자, 신수진을 만나다

"이규경이 행한 카메라 옵스큐라에 대한 실험 기록이 바로 다산 정약용 선생의 책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 나와요. '...참으로 황홀하더라....' 그 자체를 황홀경이라고 했어요. 움막 밖으로 나가면 날씨 좋은 날 풍경을 맘껏 즐길 수 있는데도 빛이 투영된 이미지, 그 일루전을 보며 황홀하게 느꼈다는 거죠. 이를 위해서는 어두운 곳에 혼자 들어가 있는 게 필수예요. 그래서 카메라 옵스큐라는 은밀하고 황홀한 경험인 거고요."

일제 강점기 때 만들어져 수십 년간 '서울에서'의 시작점이자 '서울로'의 종착점으로 기능했던 옛 서울역 건물은 5년 전부터 새로운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아직 낯설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보석처럼 아끼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복합문화공간, '문화역서울284'로 말이다. 얼마 전 이 문화공간의 새로운 예술감독으로 사뭇 의외의 인물이 선정됐다. 사진과 심리학을 전공하고 두 분야를 넘나들며 '사진 심리학자'라는 독특한 타이틀로 활발히 활동하던 신수진이 그 주인공이다. 예술감독으로 처음으로 기획한 전시의 이름은 [은밀하게 황홀하게: 빛에 대한 31가지 체험]. 역사성과 장소성의 가치가 반짝이는 문화역서울284와 한 사진 심리학자의 만남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장태원, 스테이드 그라운드 (2013)

- 사진 심리학자로 활발히 활동하다 문화역서울284 예술 감독으로 변신한 계기가 궁금합니다.

"제 주요 관심사는 '예술이 사람에게 어떤 경험을 주느냐'입니다. 그래서 작업의 초점도 예술가가 아니라 예술 작품을 만나는 관객에게 맞추곤 하죠. 예술에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사람들의 예술적 경험을 확장하는 것이 제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장소와 장르를 바꾸는 데 별 거리낌이 없어요. 이번에도 역사성, 장소성 이 두 가지가 만나는 지점을 통해 사람들에게 새로운 문화, 예술적 경험을 줄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문화역서울284는 옛 서울역 건물로 백 년 가까운 역사성을 안고 있어요. 하지만 지금은 복합문화공간이란 새로운 장소성을 부여받았죠. 이곳은 존재 자체로 문화재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보존에만 집중하면 '박제화된 과거'가 될 뿐이에요. 결국, 새로운 장소적 의미가 필요합니다. 이곳은 무척 위치가 좋아요. 서울 시내 한복판이니깐요. 하지만 '위치'와 '장소'는 달라요. 지난 4년 동안 탈바꿈을 위한 여러 시도가 있었다면 이제는 분명한 방향을 가지고 '의미 있는 장소'로서의 정체성을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에브리웨어, Soak (2011)

- 말씀하신 '의미 있는 장소'가 되려면 어떤 게 필요할까요?

"초창기부터 문화역서울284의 목표는 '열린 복합문화공간'이었습니다. 즉 '열린'과 '복합'이란 키워드가 핵심이죠. 예술이 열리려면 대중적 요소가 필요한데, 친절하고 쉬운 말로 풀어서 메시지를 전달하는 접근이 필요합니다. 무대에 아이돌을 세워야만 대중성이 확보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중요한 이야기는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예술적 가치를 쉽게 풀어 전달하는 게 이 공간을 열리게 하는 방법이 아닐까 해요. 또한, 전달하려는 이야기가 분명하다면 방문객이 메시지를 접할 수 있는 선택지를 최대한 다양하고 복합적으로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람마다 익숙한 방법은 각자 다르므로 한 가지 방식만 고집하면 전달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어요. 이번 전시에서 시각 예술뿐 아니라 공연 예술을 비중 있게 다룬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상진, 라이팅 토크 (2015)

- [은밀하게 황홀하게: 빛에 대한 31가지 체험] 전은 예술 감독으로서 처음 기획하신 전시인데요. 제목이 인상적입니다.

"사실 저는 기획자가 선생님처럼 관객을 대하는 게 싫어서 교과서처럼 읽힐 만한 글은 도록 서문에서도 다 뺐는데요. (웃음) 약간 설명해 드리자면, 실학자 이규경이라는 인물이 있어요. 중국에 카메라 옵스큐라의 원리를 다룬 '원경설'이란 책이 있었는데 이규경 선생이 그걸 읽고 카메라 옵스큐라를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테스트하며 책까지 썼어요. 자, 상상해보세요. 경치 좋은 산언저리에 화려하지 않고 조촐한 움막집이 있습니다. 밖의 경치는 쨍쨍하고 맑은데 빛이 만들어내는 그림을 경험하기 위해 옛날 조선 시대 사람들이 움막집에 모인 거에요. 아마 움막집 문은 종이를 발라 만들었을 건데 그 문에 작은 구멍을 뚫고 이 안으로 빛이 들어옵니다. 이제 안쪽 벽에는 밖의 풍경이 거꾸로 매달리는 거죠. 이규경이 행한 카메라 옵스큐라에 대한 실험 기록이 바로 다산 정약용 선생의 책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 나와요. '...참으로 황홀하더라....' 그 자체를 황홀경이라고 했어요. 움막 밖으로 나가면 날씨 좋은 날 풍경을 맘껏 즐길 수 있는데도 빛이 투영된 이미지, 그 일루전을 보며 황홀하게 느꼈다는 거죠. 이를 위해서는 어두운 곳에 혼자 들어가 있는 게 필수예요. 그래서 카메라 옵스큐라는 은밀하고 황홀한 경험인 거고요. 인류는 오랜 역사를 두고 이런 경이의 체험을 수없이 체득해왔어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역사 시대 이전부터 우연찮게 접했을 거예요. 어두운 곳에 있던 사람이 밖으로부터 안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을 보며 바깥세상이 거꾸로 박히는 모습에 마음을 홀려서 집중하는 것...과연 그들은 이걸 얼마나 좋아했을까 생각해보면 전 너무나 즐거워요. '빛의 예술'은 은밀하고 황홀한 경험에서 태동했다고 믿어요."

조덕현, 모성 (2012)

- 전시회의 중요 모티브가 빛인데요. 빛을 보고 느끼는 투어의 성격이 강조된 것 같아요.

"20세기 초 예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빛이라고 생각해요. 19세기 사진술이 등장하면서 카메라가 눈을 대신하게 되고 빛이 단순히 세상을 보는 매개가 아니라 본격적으로 예술의 도구가 되기 시작하잖아요. 그렇게 태동한 빛의 예술과 '문화역서울284'란 공간이 가진 시간을 중첩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잘 아시겠지만, 이곳은 전시를 위한 공간으로 출발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평면의 갤러리가 아니라 공간으로 봐야 해요. 공간에 스며들 수 있는 빛을 모티프로 선택한 또 다른 이유입니다. 어두운 곳에서 빛을 찾아가면서 빛을 만나고, 빛을 다루기 시작하고, 어둠과 밝음의 경계를 탐색하고, 스스로 빛의 기억을 되살리면서, 결국엔 빛이 스스로 발한다는 7가지 소주제로 전시의 이야기를 만들었어요. 20세기 아방가르드부터 지금의 미디어 아트까지 미술사적 관점으로 전달하지 않고 스토리 텔링으로 풀어낸 거죠. 문화역서울284는 무척 넓고 방도 많고 각각의 층높이와 벽면도 제각각이에요. 그냥 돌아다니면 금세 지치게 되지만, 스토리를 따라가면 디테일을 더 잘 볼 수 있습니다. 맥락성을 갖추면 많은 정보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어요."

베른트 할프헤르,CAU Anseong (2012)

- 전시를 기획하면서 특히 염두에 두신 점은 무엇인가요?

"관람객에게 전시에 관한 정보를 강요하지 않고 필요한 곳에 적절하고 친절하게 제공하려고 노력했어요. 그리고 작품 외적인 요소에 신경을 많이 썼죠. 예술적 경험은 누군가가 강요한다고 이루어지는 성격의 일이 아닙니다. 관객 스스로 자기 시간을 써야만 가능해요. 즉 투자가 필요한데요. 이때 관객을 원활히 도와주는 게 기획자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전시장을 찾아온 분들이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 머물 수 있게 만드는 디테일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번 전시에는 작품에 적합한 공간 연출을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했어요. 빛이 공간을 장악하지 않고 스며들 수 있도록요. 이런 디테일을 알아봐 주시면 무척 감사할 것 같아요. 또한, 작품과 공간이 경쟁하기보다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노력했어요. 여러 사람의 추억이 담긴 옛 기차역 건물을 억지로 갤러리처럼 다루는 건 적합하지 않을뿐더러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최대한 작품과 공간이 상호 작용할 수 있도록 안배했어요."

조동옌, Between being asleep and awake - a Long Flow (2015)

- 기획전을 준비하면서 만족스러운 부분과 아쉬운 부분을 꼽아보신다면?

"작가들이 한 주제에 집중해 전시뿐 아니라 공연에까지 적극적으로 참여한 게 무척 만족스러워요. 전시장 중에서는 2층 그릴을 꼽고 싶네요. 은밀하고 황홀한 빛의 그림이 시작되던 카메라 옵스큐라의 원리를 활용한 젊은 프랑스 작가의 작업이 천장을 비추고 그 밑에서는 우리가 거장이라 부르는 아방가르드 작가들의 작품을 산책하듯이 볼 수 있어요. 아쉬운 부분은 글쎄요...프로그램이 잘 진행되길 바랄 뿐인데... 아! 메르스가 있네요. 메르스, 굉장히 아쉽습니다 정말." 

하지훈, 자리(2012)

- 향후 문화역서울284를 어떻게 끌어갈 생각이신가요?

"먼저 해외 기관이나 예술가와의 교류를 늘려서 인지도 제고에 신경을 쓸 예정입니다. 지금보다 훨씬 많은 국제 협력 프로그램이 생기면 좋겠어요. 그리고 전체 공간을 기간별로 잘라 운영하는 걸 지양하고 싶어요. 1,500평이나 되는 저희 공간을 동시다발적이고 입체적으로 활용해야 장소의 색깔을 더 빨리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덧붙이자면 서울역 광장의 활용법을 고민 중이에요. 문화역서울284 건물에 접근하려면 서울역 광장을 지나야만 하는데 그곳의 고정된 기능이 너무 강해요. 건물의 앞마당은 정원, 공원, 놀이터, 상점, 갤러리 등등 다양하게 변신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기에 더 강력한 콘텐츠를 만들어 문화역서울284의 장소성을 강화하고 싶어요. 여러 사람을 설득하고 정부의 지원 또한 필요하지만 도전해 볼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PROFILE

연세대학교 인지과학연구소에 재직 중인 사진 심리학자. 시각 심리학과 사진이론을 접목해 과학과 예술을 융합하는 독특한 영역을 개척했다. 현재 한국사진학회 부회장, 한진그룹 일우재단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국방부 정책자문위원 등을 맡고 있으며 얼마 전 옛 서울역 건물을 문화공간으로 바꾼 '문화역서울284'의 새로운 예술 감독이 되었다. 저서로는 [마음으로 사진읽기(2013)], [사진, 빛의 세기를 열다(2009)], [사진, 읽기 혹은 보기(2006)] 등이 있다. 국내외에서 60 여 차례 전시를 기획했고 예술을 통한 창의적 소통과 행복에 관한 강연 활동을 하며 예술적 가치를 공유하는 일을 지속 중이다.

[은밀하게 황홀하게: 빛에 대한 31가지 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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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세계적인 거장들의 클래식 작품부터 새로운 형식을 보여주는 동시대의 빛 예술까지, 스토리가 있는 전시와 공연으로 구성된 융복합 문화 예술 행사 [은밀하게 황홀하게: 빛에 대한 31가지 체험]은 한국, 프랑스, 독일, 미국, 이탈리아, 대만, 벨기에, 헝가리 등 총 8개국에서 초청한 작가 31개 팀이 회화, 사진, 설치, 영상, 인터랙티브 미디어아트, 혼합매체, 가구 등 143점의 작품을 선보입니다. 또한, 빛을 주제로 한 6개의 공연,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도 마련되어 시각예술의 근원적 모티브인 빛을 바라보는 방식에 대해 새로운 감각으로 느낄 수 있도록 기획했습니다. 전시장이 아닌 공간에서의 전시, 공연장이 아닌 공간에서의 공연에서 펼쳐지는 31가지 빛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당연했던 빛의 세상을 낯설고 새롭게 바라보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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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은 CA Korea 2015년 07월호 'Culture'에 기고한 원고를 수정, 보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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