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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5월 01일 08시 07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05월 01일 14시 12분 KST

노동자라 쓰고 '사실상 노예'라 읽는다

근대화 이후 머슴도, 주종관계도 없어졌지만, 노동력 착취나 임금체불은 여전하다. 최근에는 노동부 근로감독관이 '근로자는 사실상 노예'라는 요지의 발언을 해 국민적 공분을 샀다. 최장시간 노동에도 불구하고 생계비조차 벌지 못하고, 그마저도 떼이기 일쑤. 권익을 보호해줄 결사체도 없고, 정부의 관리 감독 역시 제대로 작동하기 어려운 현실. 이것이 2015년 노동절에 돌아본 한국 노동의 현 주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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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목포 '갓바위'에는 슬픈 전설이 깃들어 있다. 병든 아버지의 치료비를 벌기 위해 머슴살이도 마다 않은 효자 이야기다. 갖은 고생에도 불구하고 품삯도 받지 못한 아들이 한 달 만에 집에 와보니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신 후였다. 임금체불을 당한 것도 서러운데 부친마저 잃은 안타까운 사연이다.

김유정의 단편소설 '봄봄'의 주인공은 머슴과 다름없는 데릴사위다. 3년여 동안 품삯 한 푼 안 받고 죽어라 일했지만, 장인어른은 딸 점순이의 키가 덜 자랐다며 혼례를 차일피일 미룬다. 주인공은 장인어른에 맞서 한 판 실랑이를 벌이지만, 협박과 감언이설에 속아 또 다시 일터로 향한다. 지금으로 치면 혼인 빙자 노동력 착취 사기극의 피해자인 셈이다.

근대화 이후 머슴도, 주종관계도 없어졌지만, 노동력 착취나 임금체불은 여전하다. 최근에는 노동부 근로감독관이 '근로자는 사실상 노예'라는 요지의 발언을 해 국민적 공분을 샀다. 실제 한국의 노동 현실을 들여다보면 누군가는 분명 노동자를 노예로 생각하는 것이 틀림없다는 확신이 든다.

'저녁이 있는 삶'이 뭐예요?

한국은 OECD 회원국 중 멕시코에 이어 두 번째 장시간 노동 국가다. 2000년부터 8년간 부동의 1위였다가 2008년 이후 멕시코에 1위 자리를 내줬다. 한국인은 연간 2천163시간을 일한다. OECD 국가 평균의 1.3배, 노동 시간이 가장 적은 네덜란드의 1.6배 수준이다.

사실상 참석이 의무인 한국의 회식 문화를 감안하면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릴 수 있는 노동자는 많지 않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장시간 일하지만, 가족과 함께 할 시간이 없는 '노동시간의 패러독스'다. 그러나 정부는 최근 노동시장 구조개혁 논의 과정에서 오히려 근로기준법 개정을 통해 노동시간 연장을 추진하고 있다.

"5,580원. 이런 시급!"

올해 최저임금은 5,580원으로, 하루 8시간 주5일 근무할 경우 받을 수 있는 월급이 110만 원 조금 넘는다. 4인 가족 생활비는커녕 최저임금위원회가 최저임금 결정기준으로 분석한 미혼 단신 근로자의 한 달 생계비 150만6천 원에도 못 미치는 금액이다.

더 문제는 노동자 8명 중 1명이 최저임금조차 받지 못하는 현실이다. 최저임금 미달 노동자는 200만 명이 넘는다. 이들은 대부분 비정규직, 여성들이다. 최저임금 기준액이 계속 높아지고는 있지만, 법의 사각지대 또한 광범위해서 제도의 실효성이 떨어진다. 전문가들 사이에서 행정제재와 형사처벌 수위를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떼인 돈 받으려다 10원짜리 폭탄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2014년 한 해 임금체불 피해 노동자 수가 29만3천 명을 넘었다고 한다. 피해 금액은 1인당 451만 원, 총 1조3천억 원에 달했다.

최근에는 식당 주인이 체불임금 18만원을 10원짜리 동전으로 지급한 사건이 보도됐다. 종업원이 급여를 덜 받았다며 노동청에 진정을 내자, 사업주가 보복성으로 이 같은 일을 벌인 것이다. 임금도 떼이고, 떼인 돈 받으려다 봉변까지 당하는, 그야말로 노동자의 수난시대다.

피해자 아들이 SNS에 올린 10원짜리 동전과 돈자루 (출처: 온라인캡쳐)

노조는 없다

사업장 내에서 노동 권익을 보호해주는 1차 안전장치는 노동조합이다. 그러나 한국의 노조가입률은 2013년 기준으로 11%, OECD 회원국 중 최저 수준에 머물고 있다.

사업장 규모나 고용 형태별 양극화도 심하다. 3백 명 이상 사업장은 노조가입률이 32%인데 반해, 5명 미만 사업장은 겨우 1%다. 비정규직의 노조가입률은 1.4%로, 정규직(13.9%)의 10분의1 수준에 불과하다. 소규모 영세 사업장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일수록 노동 권익 보호를 위한 결사마저 쉽지 않은 것이다.

노동자를 '노예'로 아는 근로감독관

정부는 노동 관련 법 규정이 현장에서 제대로 집행되는지를 관리 감독하는 공무원을 두고 있는데, 이들이 바로 '근로감독관'이다. 노동시간이나 임금, 근로환경, 노사교섭 등 폭넓은 분야에 대한 감독 지도는 물론, 근로기준법과 노동관계법령을 위반한 사건이 접수되면 수사와 구속영장 신청까지 할 수 있는 특별사법경찰관이다.

하지만 그 숫자가 적어 사실상 제대로 된 업무수행이 어렵다. 근로감독관 한 명이 담당하는 사업장은 1,536개, 근로자는 13,415명에 달한다. 수치상으로만 보면, 1년 365일 쉬지 않고 꼬박 일해도 하루 네 곳 이상을 방문해야만 관할 사업장을 한 번씩 다 둘러볼 수 있는 셈이다.

그마저도 "노동자는 사실상 노예"라는 인식 수준으로 근로감독행정을 하는 사람이 있으니, 노동자는 누굴 믿어야 할까.

최장시간 노동에도 불구하고 생계비조차 벌지 못하고, 그마저도 떼이기 일쑤. 권익을 보호해줄 결사체도 없고, 정부의 관리 감독 역시 제대로 작동하기 어려운 현실. 이것이 2015년 노동절에 돌아본 한국 노동의 현 주소다.

논란 끝에 노사정 대타협이 결렬됐다. '노동시장 구조개혁'의 방향 수정이 불가피하다.

그렇다면 이제 새 좌표는 노동시장 유연화가 아니라 '사실상의 노예 해방'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 이 글은 더좋은민주주의연구소에도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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