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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1월 12일 05시 59분 KST | 업데이트됨 2018년 01월 13일 14시 12분 KST

블랙리스트와 민주주의의 적들

Gettyimage/이매진스

권력 핵심에 있었던 이의 말이란다.

"블랙리스트의 취지를 설명하면서 정부 비판적인 문화·예술인들을 '빨갱이'라 지칭하고 지원금을 끊는 작업을 '말살정책'이라고 불렀다는 관련자 진술을 확보했다고 전해졌다. 정부 비판적인 영화가 상영되는 것에 대해 "국민이 반정부적인 정서에 감염될 수 있으니 자금줄을 끊어 말려 죽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특검 관계자는 "고위 공무원들의 리스트 작성 행위가 국민의 사상 및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훼손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중앙, 동아 등 기사)

   

"빨갱이." "말살정책." 많이 듣던 소리다. 해방 이후 1948년 제주 4.3항쟁을 다룬, 하지만 단지 그 사건에 한정되지 않는 호소력과 설득력을 지닌 김석범 대하소설 〈화산도〉에는 '서북청년단'의 횡포가 아래와 같이 그려진다.

"이렇게 해서 희생자가 나와도 '빨갱이'의 죽음은 인간의 죽음이 아니었다. 이러한 사태에 대히여 이성(理性)은 어떻게 대처하면 좋단 말인가."

권력에게 이성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온갖 수단을 동원해 권력을 지키는 것만이 중요할 뿐. '광장 이후의 시민사회와 문학'이라는 주제의 글과 관련해 주문해 놓은 김덕영 교수의 〈국가이성 비판〉을 읽으며 생각해보고 싶은 문제다.

 

분단과 남북 대치가 가져온 비극 중 하나. 사람들의 내면에 '이념의 감옥'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 결과 세월호 참사도, 국정농단도, 헌정훼손도, 사태의 본질에 대한 이성적 논증과는 거리가 먼 '종북'이니 '빨갱이'니 하는 이념적 프레임의 전쟁터로 만들려는 시도가 계속 발생한다.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거기서 시민적 양식과 "이성"은 설 자리가 없다. 그래서 아이를 잃고 단식 농성 중인 부모들 앞에서 '폭식투쟁'을 하는 짓이 벌어진다. 나라를 팔아먹는다고 해도 특정인과 세력을 맹목적으로 '묻지마 지지'하는 일이 벌어진다.

 

'묻지마 지지'와 '묻지마 비판'은 민주주의의 덕목과는 거리가 멀다. 매사에 '너는 누구의 편인가'를 따지고, 그를 통해 이념공세를 펼치고 자기편을 규합하려는, 자기편이 아니라면 '밥줄'도 끊어야 한다는 식의 "빨갱이" 사냥이 벌어진다. 〈화산도〉의 내용이 지닌 현재성이다. 주인공 이방근이 지닌 매력이다.(이 소설에 대한 본격평은 따로 글로 정리해볼 계획이다)

 

스탈린주의 등의 좌익 파시즘이든, 나치즘 같은 우익 파시즘이든 이들이 민주주의의 적인 이유가 여럿 있지만, 핵심 공통점 하나. 이성에 근거한 토론과 공론의 장(the public sphere)을 억압하고, 권력이 허용하는 단 하나의 목소리와 주장만을 '국론'의 이름으로 강요했다는 것. 그리고 그런 국론은 항상 권력과 폭력을 동반한다. 예컨대 민주주의 국가와 '국정'교과서가 양립할 수 없는 이유다. 국정교과서의 문제는 그것이 편향된 해석을 담고 있어서만이 아니다. 그것이 국가가 정한 특정한 견해만을 '진실'이라고 내세우며, 다른 견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누구든 진리를 독점하려들 때 민주주의의 적이 된다.

 

이성적 논거, 합리적 논리와 설득의 과정 없이, 힘으로, 권력으로, 폭력으로 특정한 주장만을 강요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적, '열린 사회의 적'이다. 21세기 한국 시민사회는 새로운 민주주의 가능성을 광장에서 시험하고 있다. 그런데 국가권력의 핵심세력들은 온갖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자신들의 마음에 안드는 문화인들을 "말살"하려 든다. 엄청난 부조화이고 인식의 괴리다. 문제는 이념의 프레임으로만 무장한, 혹은 이념의 감옥에 갇힌 저들에게 이성적, 논리적 설득은 먹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괴리를 메울 뾰족한 방도가 없다는 것이다. 저들은 "빨갱이 말살정책"이 이성적 판단에 부합하기에 그런 짓을 하는 게 아니다. 혹은 그들이 생각하는 이성은 시민적 이성과는 매우 다른 종류의 것이거나.

 

그래서 다시 묻게 된다.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문화계의 "빨갱이 말살"을 주장하는 자들에게 "이성(理性)은 어떻게 대처하면 좋단 말인가." (국가)권력은 어디까지 이성적이 될 수 있는가.

 

 

"그런데 재미있는 일은 마완도가 혼자서 찾아왔을 때, 이방근이 묻지도 않았는데, 자신은 해방 전에 북한의 함흥경찰서에서 고등계 형사였다고 말한 점이었다. 그것은 지금 '반공·멸공'의 애국운동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모른다고 태연하게 이야기했었다. '일제'의 앞잡이였다는 사실에 대한 부끄러움의 느낌은 전혀 없었다. 거기에는 해방전과 해방 후의 단절이 '공산주의에 대한 증오'에 의해 교묘하게 묻혀 있었다. 게다가 일부러 아름답지도 않은 자신의 과거를 밝힌 것은 듣는 사람에게 어떤 위협을 가하려는 속셈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고등경찰------, 이 말은 선악의 가치판단을 넘어 공포심을 일으킨다. '반공·멸공'이라는정의의 실현을 위해서는모든 것이 일본제국주의의 망령과 한 몸이 되는 것도 선이고, 그중에서도 귀중한 '특고(特高)'의 체험은 애국을 위해 살려야 한다는 취지였다. 강몽구의 말대로 폭력은 물론, 빨갱이라는 구실로 부녀자를 강간하거나 살인을 해도 결국은 불문에 붙여지는 '서북'의 횡포를 감안하면, 이번에 보인 그들의 태도는 상상 외로 부드러웠다고 새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화산도〉 3권, 300면)

 

"그들은 이방근이 '서북' 사무실에 찾아온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것을 알 수 있었다. 한 덩어리가 된 그들의 시선은 맹금의 눈처럼 번뜩였다. 사냥감을 노리듯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커다란 벽 , 아니 크레바스 같은 틈새 , 같은 민족이면서 북에서 온 그들과 남쪽 끝인 이 섬에 사는 사람들은 이민족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것은 남북의 지역적인 차이나 섬에 대한 본토 사람의 지방적 경멸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빨갱이 소굴'이라는, 제주도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그들의 증오심에서 생겨난 어쩔 수 없는 인식의 차이였다. 북에 대한그들의 철저한 증오심과 복수심을 만족시킬 수 있는 '대체'로서의 제주도가 있었다. 그것은 '서북'에 있어서 '제2의 모스크바 ·제주도에 진격해 온 멸공대'로서의 '사명감'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게다가 섬 전체에 8백여 명이 배치되어 있다는, 사나운 흉한이라고 불러야 할 그들 대부분이 일부 간부를 제외하고는 문맹이었다. 취조할 때에도, 사람의 성 인 김 (金)이 나 이 (李), 박(朴) 이라는 문자도 쓰지 못했다. 겨우 l, 2. 3, 4 ...... 라는 숫자를 대용한다. '이 (李) ' 대신 '이 (二)', '오(吳)' 대신 '오(五)' , 그리고 '공(孔)'이라면 '공(0)'이라고 쓰는 식이다. 이러한 그들이 멸공애국을 외치며 경찰과 함께 반공전선의 최전방에 선다. 따라서 어떻게든 트집을 잡아 보통의 읍내나 마을의 무고한 사람을 연행하는 일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그리고는, 너 빨갱이 편이지, 알고 있는 비밀을 자백해, 남로당 조직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걸 몽땅 자백해, 모르는 일이라도 어쨌든 자백하라는 식으로 추궁한다. 만약 자백하지 않으면, 스스로가 '빨갱이라고 할 때까지 때린다. 만약 이미 '빨갱이'라면 더 이상 '빨갱이'가 아닐 때까지 때린다. 뭔가 말장난을 하는 것 같지만, 이것은 꾸며낸 우스갯소리가 아니다. 이렇게 해서 희생자가 나와도 '빨갱이'의 죽음은 인간의 죽음이 아니었다. 이러한 사태에 대하여 이성(理性)은 어떻게 대처하면 좋단 말인가." (4권, 16-17면)

* 이 글은 필자의 페이스북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