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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2월 11일 12시 01분 KST | 업데이트됨 2015년 02월 10일 14시 12분 KST

지혜와 용기를 겸비한 참 지식인, 故 김기원 교수를 기리며

내가 50대에 다시 만난 그는 조심스럽고 진지한 연구자가 아니라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용기와 감각을 갖춘 '성역 파괴자'였다. 재벌, 노조, 여성계, 세계적인 경제학자, 야당의 유명 정치인 등 대상을 가리지 않았다. 그들이 민주주의와 경제정의와 평화를 저해하고 사실을 왜곡할 때, 진보를 표방하면서도 실상은 개혁을 방해하는 수구적 경향을 보일 때, 그는 가차 없이 채찍을 가했다. 그가 그렇게 애정을 품었던 노무현 대통령의 추종 세력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그에게 쏟아진 비난, 그것도 같은 편인 '진보' 세력으로부터 쏟아진 비난은 혹독했다. 그래도 그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고 김기원 교수, 그가 조교로 근무하던 시절 나는 학부와 대학원에서 공부했다. 그는 늘 소박한 차림에 진지한 모습이었다. 후배들은 한 번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마르크스의 『자본』을 그는 벌써 여러 번 독파했다는 이야기가 대학원생들 사이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당시 우리 대학원에서 '공부'하면, 그였다.

그가 한국방송통신대 경제학과에 전임교수로 부임하던 해에 나는 그 학과에 조교로 채용되었다. 2년 반을 거기서 근무하며 그의 젊은 시절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친 형님과 같은 존재였으나 그의 내면에 용암과도 같은 뜨거운 열정이 숨어 있다는 것은 미처 간파하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대구 쪽에 직장을 잡아서 서울을 떠났다. 그 후에 그를 사적으로 만날 기회는 거의 없었다. 그가 재벌개혁 운동에 중추적 역할을 한다는 소식은 종종 들었다. 아마 그도 내가 토지정의 운동에 발을 걸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리라.

내 나이 50대 들어서 그를 다시 만났다. 그는 이미 50대 후반 나이였다. 노무현 대통령 사거(死去) 이후 만난 자리에서 나는 그에게 애통한 마음을 나누었다. 그런데 그의 애통함은 나보다 더 절절하지 않은가. 노 대통령 장례식장에 참여해서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는 그의 고백에 나는 큰 위로를 받았다. 그 때 그의 고백을 듣지 않았다면 나는 한참 더 슬픔에 빠져 헤맸을지도 모른다.

내가 50대에 다시 만난 그는 조심스럽고 진지한 연구자가 아니라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용기와 감각을 갖춘 '성역 파괴자'였다. 재벌, 노조, 여성계, 세계적인 경제학자, 야당의 유명 정치인 등 대상을 가리지 않았다. 그들이 민주주의와 경제정의와 평화를 저해하고 사실을 왜곡할 때, 진보를 표방하면서도 실상은 개혁을 방해하는 수구적 경향을 보일 때, 그는 가차 없이 채찍을 가했다. 그가 그렇게 애정을 품었던 노무현 대통령의 추종 세력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그에게 쏟아진 비난, 그것도 같은 편인 '진보' 세력으로부터 쏟아진 비난은 혹독했다. 그래도 그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보통 성역 파괴자들은 비판에 능할 뿐 대안 제시에는 약한 경향이 있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중요한 때마다 국면을 타개할 수 있는 뛰어난 대안을 찾아냈다. 그리고 그 대안을 관련 정치인들에게 적극적으로 알리고 활용할 것을 권했다. 파격적인 내용들이 들어 있어서 정치인들이 꺼려하기도 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 측이 그가 제안한 대안을 적극 수용했다면 선거 결과가 달라졌을 수도 있다.

그는 피상적인 생각으로 발언하거나 대안을 제시하는 법이 없었다. 중요한 발언 한 번 하기 위해 그가 섭렵한 자료들은 보통 사람들의 상상을 넘어선다. 그가 여러 곳에서 쏟아지는 공격과 비난에도 불구하고 흔들림이 없었던 것은 사전에 그렇게 철저하게 준비했기 때문이 아닐까?

사회운동을 통해 실천에 나서는 지식인들에게 가장 큰 함정은 권력에 함몰되는 것이다. 평소에 뛰어난 활동으로 사회개혁을 선도하다가도 한 자리 맡고 나면, 아니 맡을 가능성이 생기면 소신과 태도가 크게 바뀌는 것이다. 김기원 교수는 이 함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정권에 참여하는 일은 없다"고 항상 공언하고 다닌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그의 용기와 균형 감각은 철저한 자기 관리에서 나온 것임에 틀림없다.

지난 대선 때 나는 안철수 후보 측과 문재인 후보 측으로부터 동시에 캠프에 참여해 달라는 제안을 받고 고민하다가 그에게 조언을 구했다. 그랬더니 그가 재미있는 제안을 하는 것 아닌가. "양쪽 다 참여하세요." 현실성이 떨어진다 싶어서 웃어 넘겼지만, 그가 왜 그런 제안을 했는지 이해가 된다. 나는 그때 권력을 보았으나, 그는 우리 사회의 미래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김기원 교수가 곁에 있을 때 그의 지혜와 용기는 당연한 듯 보였다. 그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흔쾌히 지혜를 나누고 용기를 북돋아주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불현듯 그와 같은 역할을 해 줄 사람이 우리 사회에 없다는 사실이 깨달아진다. 아, 너무 큰 상실이다. 그의 죽음이 개인의 소멸과 유족의 슬픔으로 끝나지 않는 이유다.

한겨레신문은 그의 별세 소식을 알리는 기사에 '진보경제학계의 큰 별, 김기원 교수 지다'라는 제목을 달았다. 맞다. 큰 별이 졌다. 그는 내게도 별 같은 멘토였다. 이제 누굴 보고 따라 걷나. 누구에게 지혜를 구하나. 마음이 아프다.

김기원 교수의 허핑턴포스트코리아 블로그 페이지에서 고인의 글을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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