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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1월 13일 10시 28분 KST | 업데이트됨 2018년 01월 14일 14시 12분 KST

고마워요 오바마 | 게이인 아버지가 대통령에게 보내는 러브레터

Jonathan Alcorn / Reuters

친애하는 대통령께,

미사여구를 생략하자면, 나는 당신에게 첫눈에 반하지는 않았다. 사회 교사인 나는 희망과 변화의 가능성에 기뻐했지만, 비교적 젊은 정치인이 급부상해 케네디 가문 사람들에게 둘러싸이는 것은 좀 기회주의적이라고 보았다. 좋게 말한다 해도 나는 회의적이었다.

하지만 당신은 끈질겼다. 당신의 지력, 유머, 매력이 내 마음을 녹였고, 당신에겐 분명 LGBT 작전이 있었다. 난 그걸 당신의 '진화'가 널리 알려지기 전부터 눈치챘다. 2009년 6월에 그는 동성 동거인에게 혜택을 주도록 하는 명령을 내려서 국무부가 해외 근무 직원의 동성 동거인에게도 배우자와 똑같은 혜택을 받도록 했다. 2009년 10월에는 오랫동안 계류 중이던 매튜 셰퍼드 증오 범죄 방지법에 서명했다. 2010년 12월에는 국방부의 연구 결과들을 동원해, '묻지도 말하지도 말라'를 폐지하는데 상당한 정치적 자본을 투입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나는 체계적으로 동성애혐오 정책의 벽을 허물어가는 당신의 장기전을 보며 감탄했다. 나는 당신이 최고의 요령을 지닌 쿼터백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홀딱 반했다.

당신의 정권은 오바마케어의 일부로 LGBT라는 이유로 보험 가입을 거절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 트리트먼트 액션 그룹, 가족 평등 위원회 등 내가 이사로 있는 전국 규모 LGBT 비영리단체의 도움을 구했다. 또한 오바마케어 덕분에 HIV와 AIDS를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민간 건강 보험과 메디케이드를 받기가 쉬워졌다. 무엇보다도, 미국 최초의 종합적인 전국 HIV/AIDS 전략을 개발하고 발표했다. 여권과 학자금 대출 신청 양식을 보다 젠더 포괄적으로 바꾸었다. 다음에 내가 내 아이들의 정부 서류를 작성할 때는 예전처럼 '어머니' 란에 표시하지 않아도 된다. 이제 나의 가족 같은 가족들은 가족으로서 미국 재입국이 가능하다. 일반 대중들은 이런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을지도 모르지만, 수십 년 동안 다른 사람들과 같은 취급을 받고 싶다는 단순한 열망을 가졌던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2011년 부활절에 나는 내 파트너와 우리 쌍둥이를 데리고 백악관 달걀 굴리기에 참석했다. 레이건 시절에 두려워하며 성인이 된 클로짓 게이였던 나는 내 두 살짜리 아이들이 백악관 뜰 위에서, 역사의 그림자 속에서 신나게 뛰어노는 것을 보며 거의 유체 이탈 같은 경험을 했다. 예전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소속감을 느꼈고, 우리 나라가 나아가는 방향에 대한 새로운 낙관주의를 품고 돌아왔다. 당시 나는 당신의 재선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겠다고 느꼈다. 대학 졸업 후에는 처음 느껴 보는 감정이었다. 그래서 나는 밤마다 스윙 스테이트에 전화를 걸어, 투표할 것 같은 유권자들에게 오바마 정권이 내 인생을 바꿨다고 이야기했다. "백악관에 깜둥이가 있는 걸 참을 수 없다"고 말했던 펜실베이니아 주 스크랜튼의 여성 유권자를 잊을 수가 없다. 나는 미국 최고 공직에 흑인 남성이 당선된 것이 인종차별을 종식시키지 못했다는 것에 경이로워 했던 걸 기억한다. 우리의 싸움은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2013년에 나는 쌍둥이를 데리고 D.C.에 가서 당신의 두 번째 취임식에 참석했다. 그 날은 마침 쌍둥이의 네 번째 생일이었다. 쌍둥이는 순진하게도 그 모든 사람들이 자기들의 생일 때문에 모였다고 생각했지만, 그 엄청나게 춥던 날 오전에 우리 가족은 정말로 선물을 받았다. 당신이 세네카 폴스와 셀마에 이어 스톤월을 언급했을 때 나는 멍해졌다. 믿을 수가 없어서 주위 사람들에게 "정말로 방금 스톤월이라고 한 거예요?"라고 물었다. 그렇다, 미국 대통령이 방금 게이 남성으로서의 내 분투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나는 고마운 마음에 눈물을 조금 흘렸다. 그 해 겨울에 우리 가족은 다시 D.C.에 가서 윈저 사건[주: 결혼을 남녀간의 결합으로 규정한 결혼보호법이 위헌이라고 이디스 윈저가 제기한 소송] 판결이 나는 날에 연방대법원 앞 시위에 참여했다. 이건 여행이라기보다는 순례에 가까웠다. 내가 젊었을 때, 나는 남자 친구를 집에 데리고 올 만큼 내 섹슈얼리티를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게 어떤 건지도 몰랐다. 미국에서 가장 '평범한' 제도인 결혼은 생각조차 못했다. 나는 이제 파트너가 있는 성인 남성이고, 역사가 이루어지는 현장에 아이들을 데리고 왔다. 당신 정권이 보호 받을 여지가 없는 결혼보호법을 보호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 윈저 사건 판결로 이르는 길을 닦았다. 나는 그 현장에 꼭 있어야만 했다.

2014년 12월, 나는 백악관 크리스마스 리셉션에 초대받는 놀라운 영예를 누렸다. 지지자가 아닌 내 어머니조차 자랑스러움을 억누르지 못했다. 내 마음 속 경외감처럼 거품이 피어나는 샴페인 잔을 들고 백악관 복도를 걷자니, 교사인 나는 정말로 인민의 집에 온 기분이 들었다. 드디어 당신을 직접 만나보고 싶다는 충동을 억누르지 못하고, 나는 일부러 영접 열에 끼어섰다. 당신이 나를 만난 걸 기억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지만, 나는 은밀히 당신이 기억해 주길 계속 바라고 있었다. 나는 최선을 다해 즉석에서 말했다. "당신은 대통령이니 아첨하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진심으로 말하고 싶어요. 나는 게이 아버지고, 내 남편은 아마 지금 뒤에서 사진 찍고 있을 거예요. 우리 쌍둥이는 당신이 취임한 다음 날에 태어났어요. 당신의 리더십 때문에 우리의 삶은 어마어마하게 나아졌어요. 의회가 저항하며 당신을 좌절시키려 할 때마다 나와 내 가족을 생각해 줬으면 해요. 당신은 세상을 바꾸고 있어요." 당신은 내 어깨에 손을 얹고 "고맙습니다. 내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일이에요." 하지만 정말이지, 당신이 인사를 건넬 때부터 난 이미 당신에게 반해 있었어요(you had me at hello).

당신 임기의 마지막 2년 동안 LGBT 커뮤니티는 벨몬트 경마장에서 경주마 '아메리칸 파라오'가 결승선을 향해 달리는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발전했다. 대법원이 오버거펠 대 호지스 사건(20215년) 판결로 동성결혼이 합법화되던 날, 당신은 백악관 외부 조명을 게이 깃발 색으로 바꾸도록 지시했다. 믿을 수 없는 제스쳐라, 난 이게 사실인지 인터넷을 뒤져 봤을 정도였다. 백악관 사진은 바이럴로 퍼져나갔고, 전세계의 게이들에게 초현실적인 낙관의 메시지를 전했다. 하지만 이 무지개색 느낌표가 끝이 아니었다. 2015년에 당신은 트랜스젠더를 군에 받아들였고, 공립 학교에서 트랜스젠더 학생들의 화장실 사용을 제한하는 자들을 표적으로 삼았다. 언젠가 트랜스젠더에 대한 차별은 점심 식사 카운터 분리가 들어가 있는 역사의 쓰레기통에 들어갈 것이다. 우리는 당신의 행동이 티핑 포인트였다고 되돌아 보게 될 것이다. 현대 게이 인권 운동의 시작으로 간주되는 스톤월에서 죄 없는 게이들은 폭동을 일으켰고 체포되었다. 6월에 국립공원 관리청에게 스톤월을 LGBT 역사를 기리는 최초의 국가기념물로 지정하도록 한 것이 당신의 마지막 공격이었다. 우리는 그 이후 아이들을 데리고 스톤월에 몇 번 다녀왔다. 진보의 맛이 얼마나 달콤한지 느끼기 위해 그때마다 빅 게이 아이스크림 숍에서 아이스크림 콘을 사먹었다.

당신의 관리하에서 미국은, 사람들이 헌법보다 성경을 더 많이 참조해왔던 나라 미국은 언덕 위의 LGBT 도시가 되었다. 우리가 증오하는 법을 배워야 증오할 수 있다는 게 사실이라면, 당신은 당신의 가족과 행동을 통해 수용과 관용의 본보기를 보임으로써 사랑을 가르칠 수도 있다는 걸 보여주었다. 당신의 비젼, 엄청난 장애물 앞에서 당신이 보여준 결의, 모든 사람에게 위대함을 꿈꾸게 해준 것에 대해 나와 내 가족은 당신에게 감사한다.

사랑을 담아,

프랭크 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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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핑턴포스트US의 Thanks, Obama: A Gay Dad's Love Letter To POTUS를 번역, 편집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