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2015년 11월 03일 10시 47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11월 03일 14시 12분 KST

[18일간의 미국 서부 일주 ⑥]무단횡단 하니 횡단보도 만들어준 경찰

에너지솔루션아레나와 솔트팰리스 컨벤션센터 사이를 무단 횡단하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경찰이 임시 횡단보도를 만들어 지나가는 차를 멈추고 사람들을 건네주는 것을 보았다. 정부가 사람들에게 '우리의 규칙에 따르라'고 강요하는 대신 사람들의 요구를 수용해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준 것이다. 여전히 민(民)을 대하는데 관(官)의 권위주의를 내세우고, 민원인의 편의보다 까다로운 행정 절차를 앞세우는 우리나라의 행정 기관들이 보고 배워야 할 부분이다.

임은경

2015-10-31-1446280542-2077350-__20150912_134142.jpg

▲ 유타대학교 캠퍼스 꼭대기에 위치한 유타 자연사박물관(Natural History Museum of Utah) ⓒ 임은경

9월 12일, 컨벤션 마지막 날인 토요일. 아침에 조금 늦게 에너지솔루션아레나에 도착했더니 미국 최초의 여성 F-14 톰캣(영화 '탑건'에 나오는 미국 해군의 함재용 전투기) 조종사였던 캐리 로렌츠(Carey Lohrenz)의 리더십 강연이 한창이었다. 남자들의 세계로만 알려졌던 곳에서 버텨야 했던 자신의 모습을 '동물원에 새로 온 곰(New bear in the zoo)'으로 묘사한 그녀는 여성들에게 씌워진 '유리 천장'을 뚫고 노력에 노력을 거듭해 마침내 꿈을 성취한 자신의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들려주었다.

아프리카를 비롯한 제3세계 여성들에게 생리대를 보급하는 'D' 단체의 이야기도 인상 깊었다. 과거로부터 생리를 하는 여자는 부정(不淨)한 존재로 취급되었고, 사원 등 신성한 곳에는 출입을 금지 당했다. 그 당시 여성들은 현대의 여성들처럼 생리하는 날에도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필수적인 도구, 생리대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물자가 충분치 못한 오늘의 제3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성인 여성은 물론 한창 활동해야 하는 나이의 소녀들도 사나흘씩 종이 판자 위에 앉아서 꼼짝을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때때로 이들은 나뭇잎이나 새의 깃털, 심지어 돌 등을 대체품으로 쓰기도 하는데 이런 것들이 피가 새는 것을 제대로 막아줄 리가 만무하다. 이들에게 매번 일회용 생리대를 공급할 수는 없으므로 'D' 단체에서는 빨아서 계속 쓸 수 있는 천 생리대 보급 운동을 하고 있다.

사소해 보이는 이 작은 물건 하나가 그곳 여성들의 삶을 얼마나 변화시켰는지는 그들의 환한 웃음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단체의 담당자는 "여성을 일으켜 세우는 것은 그 가정을 일으키고 지역사회를 일으키는 일"이라며 이 소중한 일을 후원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깊은 감사를 전했고, 아레나를 가득 채운 청중의 기립박수를 받으며 퇴장했다.

생리대가 바꾼 아프리카 여성들의 삶

2015-10-31-1446280624-7421344-_20150912_130353.jpg

▲ 유타 자연사박물관 내부. 모든 것을 현미경으로 관찰하고, 직접 만져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 임은경

점심 약속이 없는 이날은 열한 시 반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강연장을 빠져나가 유타대학교 캠퍼스 꼭대기에 위치한 유타 자연사박물관(Natural History Museum of Utah)으로 차를 몰았다. 덕분에 두 시간의 점심시간을 박물관 관람에 알차게 사용할 수 있었다. 미국은 워싱턴D.C.를 포함한 모든 주에 자연사박물관이 있다. 드넓은 땅에서 나오는 다양한 천연 자원과 여전히 사람의 발길이 많이 닿지 않은 대자연 덕분일 것이다.

서양 문명이 건너간 지 수백 년밖에 되지 않은 신대륙 미국은 그 자체가 천혜의 배움터다. 이 박물관은 유타대학교에서 운영하는지 티켓에 'University of Utah'라고 쓰여 있다. 박물관 내부는 소용돌이 계곡 모양이다. 맨 아래층부터 나선 계단을 따라 올라가며 관람했다. 이 땅에 공룡이 살던 과거부터 최초의 원주민인 인디언들의 생활 모습까지 시간 순서대로 전시실이 배치되어 있었다.

2015-10-31-1446280670-8692592-_20150912_125229.jpg

▲ 실물 크기의 공룡과 매머드 뼈 조형물. ⓒ 임은경

또 다른 전시실에서는 먼 옛날 바다 밑에서 솟아오른 소금 호수인 그레이트 솔트레이크(The Great Salt Lake)의 생성 과정과, 그곳에서 살아가는 크고 작은 생물들의 생태를 현미경으로 직접 보고 만지면서 관찰할 수 있다. 유타의 사막에서 나는 다양한 광물과 아름다운 보석들이 전시된 곳도 있었다. 인간의 역사와 자연의 역사를 한 공간 안에 동시에 기록했다고나 할까. 기대했던 대로 10달러의 입장료가 아깝지 않았다.

특히 살아 움직이는 듯 정교한 실물 크기의 공룡 뼈와 화석이 가득한 백악기, 쥐라기 방은 가히 어린이들의 천국이다 싶었다. 맨 꼭대기 층은 미국 원주민 전시관이다. 벽에 '우리는 줄곧 여기서 살아왔다(We've always been here)'고 쓰여 있는 문구가 인상적이었다. 원형의 전시관을 따라 원주민들이 사용하던 물건들과 옛날 모습을 담은 비디오 등을 볼 수 있었다.

2015-10-31-1446280702-1310759-_20150912_131145.jpg

▲ 미국 원주민 전시관 모습. ⓒ 임은경

이 전시관은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야외 테라스와 연결되어 있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니 유타대학교 캠퍼스는 물론 솔트레이크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테라스 옆 지붕을 까맣게 뒤덮은 것은 태양열 전지다. 토요일 낮 시간이어서 그런지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가족 방문객으로 가득하다. 유타에는 유난히 어린이들이 많다. 화목한 가정을 지상낙원으로 여기는 모르몬교의 가르침 덕분일 것이다.

입장료가 아깝지 않은 유타 자연사 박물관

이들은 다산(多産)을 축복이자 자랑으로 여겨 요즘에도 대여섯 명씩 자녀를 낳는 가정이 많다. 컨벤션에서도 갓난아기를 안고 강연을 듣는 젊은 부부를 쉽게 볼 수 있었다. 주변 사람들은 불편해하기는커녕 아기가 있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듯했다. 우리나라 같으면 아이가 울거나 칭얼댈까봐 다른 사람들 눈치가 보여서 아이를 데리고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어린이 양육에 대한 사회적 배려도 훌륭하다.

2015-10-31-1446280739-869725-__20150912_123918.jpg

▲ 모래 놀이터 속에 들어가 공룡 화석을 발굴(?) 중인 어린이들. ⓒ 임은경

박물관에 들어올 때 '2세 이하 입장료 무료'라는 안내문이 눈에 띠었다. 어린 아기를 떼어놓고 다닐 수 없는 부모들을 배려한 것이다. 요즘 한국에서도 유행하는 어린이 배움터가 곳곳에 있는 것은 물론, 모든 전시실이 아이들이 직접 만지고 가지고 놀면서 느껴볼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아이들은 모래 놀이터 안에 들어가 직접 공룡 화석을 발굴(?)하기도 하고, 모래로 가득 찬 모형 계곡에 물을 흘려보내 수백만 년 걸리는 지형의 변화를 몇 초 만에 만들어보기도 한다.

대상에게 다가가기 위해 눈높이를 맞추는 이런 방식은 미국을 여행하는 동안 여러 차례 느낀 것이다. 이날 낮에도 에너지솔루션아레나와 솔트팰리스 컨벤션센터 사이를 무단 횡단하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경찰이 임시 횡단보도를 만들어 지나가는 차를 멈추고 사람들을 건네주는 것을 보았다.

정부가 사람들에게 '우리의 규칙에 따르라'고 강요하는 대신 사람들의 요구를 수용해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준 것이다. 여전히 민(民)을 대하는데 관(官)의 권위주의를 내세우고, 민원인의 편의보다 까다로운 행정 절차를 앞세우는 우리나라의 행정 기관들이 보고 배워야 할 부분이다.

2015-10-31-1446280771-7254027-__20150912_124913.jpg

▲ 화석이나 암석을 다듬는 실험실 내부를 관람객들이 직접 볼 수 있도록 개방해 놓았다. ⓒ 임은경

박물관 2층에 있는 카페에서 점심을 먹었다. 연어 샐러드와 샌드위치, 커피. 시간 내에 오후 컨벤션에 돌아가야 하기에 간단히 때우려고 시킨 것인데, 음식이 기대 이상이었다. 치즈를 사이에 끼워 그릴에 구운 샌드위치도 맛있었고, 구운 연어를 곁들인 샐러드는 싱싱하고 아삭했다. 신선하고 좋은 재료로 정직하게 만든 음식이었다. 박물관 카페니까 단골보다는 일회성 방문으로 그치는 손님이 많을 텐데도 그랬다.

값이 비싼 편인데다 맛도 별로인 한국의 박물관·공연장 카페들이 생각나 맛있는 음식을 씹으면서도 잠시 씁쓸했다. 미국의 카페에서는 음식이 준비되면 진동벨이 울리는 대신 손님의 이름을 부른다. 이름이 뭐냐고 묻기에 영어 이름이 따로 없는 나는 잠시 고민 끝에 '림(lim)'이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조금 뒤 주문한 음식이 나왔을 때는 결국 직원이 우리 테이블까지 음식을 갖다 주어야 했다. 그녀가 '림'이라고 부르는 소리가 내 이름이라는 것을 알아듣지 못했던 것이다. 외국에서 급조한 이름 사용은 실패.

급조한 이름 까먹고 있다가 밥 못 먹을 뻔

시간 내에 돌아와 오후 세션까지 잘 마쳤다. 드디어 나흘간의 컨벤션이 모두 끝났다. 오후 세 시, 수많은 인파와 함께 아레나를 나오니 숨이 턱턱 막힌다. 9월 중순이지만 이곳은 낮 기온이 섭씨 30도를 훌쩍 넘는다. 볕이 이렇게 뜨거운데 양산은커녕 모자나 선글라스를 쓴 사람도 보지 못했다. 여자들도 맨 얼굴로 다니기는 마찬가지다. 한국 같으면 이 뙤약볕에 길거리의 여자란 여자는 모두 양산을 썼을 텐데. 처음에는 양산을 펼쳐들었던 한국 참가자들도 눈에 띠는 것이 어색했는지 이내 도로 접고 만다.

이제 보니 아레나 바로 옆에 미대륙 횡단 열차인 암트랙(Amtrak) 기차역이 있다. 바쁘게 다니느라 정작 컨벤션장 주변을 잘 보지 못했던 것이다. 한동안 즐겨보던 미드 '빅뱅이론'의 주인공 쉘든이 저 기차를 타고 여행을 떠나던 장면이 생각난다. 기차로 떠나는 미국 여행도 낭만적일 것 같다. 하지만 막상 역에서 내리면 그때부터 어떻게 하나? 자동차 없이 미국 땅에서 돌아다녀야 한다는 것에 생각이 미친 순간 기차 여행은 바로 포기.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지금부터 어디를 가나. 아침에는 근처에서 열리는 그릭 페스티벌 행사에 가려고 했는데, 오후의 땡볕을 대하자 생각이 바뀌었다. 이날 열린 그릭 페스티벌은 시내에 있는 작은 그리스 정교회 처치를 중심으로 부근의 주차장에 천막을 치고 다양한 그리스 음식과 구경거리를 선보이는 장터다. 외국 장터 구경도 여행의 즐거움 중 하나지만, 푹푹 찌는 한낮에 파김치가 되는 것을 감수할 만큼은 아니었다.

2015-10-31-1446280810-8814960-___20150912_152812.jpg

▲ 에너지솔루션아레나 옆에 있는 솔트레이크시티 암트랙 기차역. 에너지솔루션아레나는 NBA 소속 농구팀 '유타 재즈'의 홈구장이다. ⓒ 임은경

결국 여행안내 책자에서 본 빅 코튼우드 캐년이 있는 와사치(Wasatch) 마운틴 주립공원으로 방향을 정했다. 차를 타고 지나면서 보니 넓은 주차장에 그리스 국기 색깔인 파란 줄무늬 천막들이 가득해 축제 분위기가 난다. 그 옆길은 자그마한 저팬 타운(Japan Town)이 자리 잡고 있다. 스시 전문점 등 일본 식당들과 일본인 교회도 있다.

어제 방문했던 음식점 '명가'에서는 유타 한인회의 소식을 다룬 한인 신문을 발견하고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흥미롭게 읽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중국 전승절 방문 기사와 오바마 대통령의 동정이 동시에 실린 한국어 신문이라니. 유타는 미국의 다른 주들에 비해 백인 인구가 많은 곳인데도 이렇다. 다양한 피부색, 다양한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다인종 국가 미국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