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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03월 11일 17시 34분 KST | 업데이트됨 2014년 05월 11일 14시 12분 KST

제가 동정을 잃은 것은 다 선배님 때문입니다.

그동안 감춰져 있던 충격적인 이유가 그 입에서 흘러나왔다. "선배님, 사실은..." D가 나를 처음 본 것은 1995년. 자신이 살던 동네의 조그만 만화가게 뒷방에서였다. 당시 만화가게들은 뒷방에서 비디오로 영화를 틀어주곤 했는데, 그가 거기서 우연히 본 영화가 '엄마에게 애인이 생겼어요' 였던 것이다.

강우석프로덕션

일년 반쯤 전, 런닝맨이라는 영화를 찍을 때였다.

우리는 대전에서 며칠 묵으며 촬영을 했는데, 일과 후에 포장마차에서 어찌어찌 술 한잔을 마시게 됐다.

함께했던 멤버들은 형사 역할과 국정원 요원 역할을 맡았던 몇몇 조,단역 배우들.

이 친구들은 작품 안에서 대사는 거의 없었지만, 주인공 신하균을 쫓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그야말로 영화 제목처럼 열심히 달렸던 친구들이었다.

나는 국정원 간부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이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이 많았고, 금새 서로 많이 친해져서 형님 아우님 하며 지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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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닝맨 모니터 화면

그런데 그 중 유난히 나를 어려워해서 나와 눈도 잘 마주치지 못하는 D라는 친구가 있었다.

다른 친구들과 나를 대하는 태도가 좀 다르긴 했지만, 그냥 내성적인 친구겠거니 했다.

그날의 술자리에는 물론 D도 함께 있었다.

하루동안 현장에서 있었던 이야기들, 그 전에 찍었던 영화들, 파란만장 살아온 이야기들을 안주 삼아 시원한 맥주잔이 오고가는 느긋한 여름밤이었다.

다들 취기가 오를 때 쯤 얼굴을 붉어졌지만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D가 눈에 띄었다.

술기운에 웃으면서 그에게 한마디 툭 던져보았다.

"D야, 너는 왜 그렇게 말이 없니? 다른 사람들 얘기 들어보면 재밌는 친구라던데 왜 내 앞에선 그렇게 얌전한거야?"

고개를 숙이고 비실비실 웃던 그는 이윽고 나를 쳐다보더니 말문을 텄다.

그리고 그동안 감춰져 있던 충격적인 이유가 그 입에서 흘러나왔다.

"선배님, 사실은..."

D가 나를 처음 본 것은 1995년. 자신이 살던 동네의 조그만 만화가게 뒷방에서였다.

당시 만화가게들은 뒷방에서 비디오로 영화를 틀어주곤 했는데, 그가 거기서 우연히 본 영화가 '엄마에게 애인이 생겼어요' 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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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에게 애인이 생겼어요'는 기혼자들의 사랑 문제를 다룬 문제작이었다.

나에게는 영화로는 두번째 출연작이었는데, 운 좋게도 이경영, 최진실, 정선경 등 당대 최고의 스타들과 함께 연기하는 행운을 누렸었다.

영화 안에서 이경영 최진실 커플이 좀 플라토닉한 사랑을 담당했다면 나와 정선경 커플은 충동적이고 육체적인 사랑을 맡았었다.

그래서 당시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러브씬들이 꽤 있었다.

이 "상당히 파격적인" 러브씬을 당시 중학생이었던 D는 만화가게 뒷방에서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머릿속에서 그 장면들이 떠나지 않아 괴로워하던 그는 결국 비디오대여점에서 그 비디오를 빌렸고, 집에서 그 문제의 장면을 몰래 보면서 생애 첫 자위행위를 했단다.

그리고는 그 주요장면들만 열 몇번을 돌려봤대나 어쨌대나...

물론 D가 주로 본 것은 정선경이었고, 내 등짝이야 그저 무의미한 풍경이었겠으나, 어쨌건 자신의 동정을 앗아간 그 장면의 주인공을 거의 20년만에 직접 보았으니 당황스러움과 알 수 없는 죄책감에 고개를 들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그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좌중은 잠시 얼어붙을 뻔도 하였으나 참을 수 없이 터져나온 나의 폭소에 모두 함께 호응하여 손뼉치며 웃는 것으로 그 자리는 흥겹게 마무리되었다.

사실 그 영화는 나에게는 상당히 힘든 경험이었다.

멋도 모르고 출연한 두번째 영화에서 지나치게 큰 역할을 맡았고, 처음 약속과는 달리 노출 심한 베드신까지 하게 돼서 여러모로 맘고생이 많았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 오래 전에 내가 나온 어떤 장면 때문에 동정을 잃은 한 중학생이 있었고, 세월이 흘러 그 소년이 배우가 되어 나와 한 영화에서 만나 그 첫경험을 나누다니, 이건 참으로 보람찬 연대기가 아닌가.

아직 연기로만은 먹고 살기 힘들어 씩씩하게 온갖 아르바이트를 하며 배우의 꿈을 키우는 D야.

어서 인기배우가 돼서 베드신도 많이 찍고, 그래서 이땅의 수많은 건강한 청소년들의 동정을 떼 주는 소임을 너도 해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