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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09월 14일 16시 28분 KST | 업데이트됨 2020년 09월 14일 17시 29분 KST

[기고] 2020년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상영작 ‘속삭임(murmur)’ 리뷰 : 연결되지 않는 자신을 부둥켜안고 사는 것

캐나다 여성감독 헤더 영의 작품 '속삭임'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영화 '속삭임 Murmur (헤더 영|캐나다|2019|86 MIN)' 한 장면

과감합니다. 비전문 배우들의 연기, 대본이 없는 대화, 실제 위치를 활용해 만들었습니다. 극영화이면서도 마치 한편의 다큐멘터리를 본 것 같은 경험을 하게 만듭니다. 네, 캐나다에서 주목받는 여성감독 헤더 영의 작품 얘기입니다. 제목은 ‘속삭임(murmur, 2019)’ 이고, 지난 9월 12일~13일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상영했습니다.

영화는 노인 여성 도나의 일상을 비추며 시작합니다. 술을 마시려고 손을 떨면서 와인오프너로 열리지 않던 술병 입구를 망치로 부수고, 유리 파편이 섞인 술을 거름망에 걸러서 와인잔에 담아 마십니다. 도나는 알코올 중독자입니다. 그녀는 음주 운전 혐의로 기소되어 동물 구조 대피소에서 지역 사회 봉사를 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하나 뿐인 딸이 있긴 하지만, 딸은 전화를 받지 않고 피합니다. 그녀는 가족도, 친구도, 대화 상대도 없습니다. 의사나 보호소 관계자, 중독 치료 상담사와 대화를 할 때 카메라 앵글은 줄곧 도나만을 비추며, 대화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샷으로 넣지 않습니다. 이 단독샷들은 도나의 단절된 사회적 관계와 고립을 보여줍니다.

그러던 도나에게 친구가 생깁니다. 도나는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동물보호소에서 안락사가 예정된 노령견 찰리를 입양하기로 결정합니다. 도나가 딸과 연락을 시도하고 번번이 거부당한다는 점에서 강아지가 마치 자식의(모성애 대상의) 대체제가 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도나에게 모성애의 대상이 필요했던 것은 아닙니다. 도나가 입양한 찰리는 노령견이고, 안락사가 예정된 병들고, 똥오줌도 가릴 수 없는 아무도 관심 가져주지 않는 개입니다. 사회적 연결망이 끊어진 노인 여성 도나는 자신과 같은 이에게 어루만지고, 끌어안고, 괜찮아(it’s ok)라고 속삭여줄 대상이 필요할 뿐입니다. 찰리를 돌보는 것은 어머니의 모성애가 아니라 고립된 인간으로서 도나가 자신 스스로를 부둥켜안는 삶의 방식입니다. 

영화 '속삭임 Murmur (헤더 영|캐나다|2019|86 MIN)' 한 장면

영화는 거품을 짜는 씬들을 많이 보여줍니다. 도나가 동물보호소에서 가장 많이 하는 일은 대걸레 청소입니다. 대걸레 통에서 걸레를 짤 때 거품이 나와서 흘러서 천천히 배수구로 빨려 들어갑니다. 이렇게 청소씬에서 반복되었던 거품 쇼트는 찰리를 입양한 도나가 집안의 모든 와인 뚜껑을 따서 싱크대에 버리는 씬에서 의미가 새로워집니다. 와인이 배수구로 빨려들어갈 때 와인은 마치 걸레에서 짠 거품처럼 천천히 사라져버립니다. 도나의 삶의 환풍구는 알코올에서 노령견 찰리로 바뀌었고, 알코올 중독으로부터 벗어나 새롭게 삶의 활기를 얻어갑니다.

도나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온갖 병든 동물들과 유기동물들을 집에 들이고, 아예 멀쩡한 동물도 분양받아서 데려오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집안에는 기니피그와 햄스터, 고양이, 강아지들이 넘쳐나고 톱밥과, 동물들의 오물, 흩어진 사료들이 난잡하게 바닥을 뒤덮습니다. 알코올 중독은 사라졌지만, 사회적 관계에 대한 갈증은 사라지지 않았고,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동물을 계속 집에 들이는 형태를 띄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그녀의 갈증과 고립된 위치는 사회적인 문제이므로 동물을 여러 마리 더 입양하는 개인적인 방법으로는 영원히 충족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노년의 여성인 도나는 일을 할 수 없고, 병든 유기동물들을 많이 보호할 수 있을만한 실질적인 능력을 갖출 수 없습니다. 말끔히 씻겨나간 거품 같던 알코올과는 정반대로 집 거실은 어지러운 난장판이 되어버립니다. 

영화 '속삭임 Murmur (헤더 영|캐나다|2019|86 MIN)' 한 장면

 

결국 아픈 찰리를 함께 병원에 데려가자고 초대했던 보호소 직원의 신고로 도나는 자신이 기르던 모든 동물들을 보호소에 강제로 입양시키게 되고, 지역 사회 봉사는 다른 기관에서 하라는 통고를 받게 됩니다. 동물들이 떠나 휑한 집을 청소하려다 말고 도나는 끊었던 술을 다시 마십니다. 설상가상으로 찰리가 병으로 너무 고통스러워하자, 의사의 권유로 찰리를 안락사시키기로 결정하게 됩니다. 도나는 울부짖습니다. 동물들의 사체가 담긴 봉투를 소각하러 가는 차에서 도나는 운전 중 열린 창문에 흘러드는 바람이 사체가 담긴 봉투를 흔드는 것을 보는데, 여기서 잠시 동물들이 봉투 속에서 움직인 것처럼 보입니다. 도나는 그날 소각함의 문을 닫는 것을 한참 망설입니다. 이후에 있을 찰리의 죽음을 도나가 쉽게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도나는 찰리의 안락사 앞에서 중독 치료 상담사에게 찰리가 없으면 자신이 이야기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울면서 털어놓는데, 이 씬 역시 도나의 단독샷으로 나옵니다. 이것은 도나의 단절된 위치와 상담사와의 비인격적 관계를 드러냅니다. 이야기할 대상이 없다는 말 역시 혼자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단독샷입니다. 도나가 찰리의 죽음을 쉽게 극복할 수 없는 중요한 이유는 세상이 병든 노령견인 찰리에게 무관심한 것처럼, 노인 여성인 자신이 누구와도 관계 맺을 수 없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결국 도나는 늦은 밤 아무도 없는 보호소에 들어가서 안락사 된 찰리가 담긴 봉투를 꺼내 쓸어안고 울다가, 보호소의 강아지 한 마리를 몰래 데리고 나와서 버스를 탑니다. 도나는 강아지와 함께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도나가 행복한 세상이 되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한걸까요?

 

2020년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포스터

‘속삭임(murmur, 2019)’은 헤더 영 감독의 장편 데뷔작입니다. 헤더 영은 여성과 동물, 고립된 사회적 연결망와 소외에 대해 꾸준히 주목해왔습니다. 낙농장에서 젖을 짜는 일을 하는 여성의 일상과 자신이 임신한 것을 깨닫게 된 젖소의 이야기를 다룬 단편작 ‘우유(milk, 2017)‘로 주목을 받은 헤더 영 감독은 고립된 여성 노인이 강아지에게 위안을 얻는 내용의 자신의 단편 ‘하워드 앤 진(Howard and Jean, 2014)’의 이야기를 확장하여 이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9월 15일 화요일까지 상암월드컵경기장과 인디스페이스에서 진행됩니다. 일자별 시간표를 참고하셔서 다른 작품들을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 필자의 페이스북에도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