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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장제 깨부수기

ⓒnito100 via Getty Images
ⓒhuffpost

호주제가 폐지된 건 13년 전이다. 이젠 호주제 없는 세상에 모두 익숙해졌다. 그걸 부활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없다. 하지만 당시 폐지 반대자들은 지지자들을 ‘민족 반역자’에서 ‘공산도배’에 이르기까지 살벌한 용어들을 총동원해 욕하면서 호주제 폐지는 ‘망국의 길’이라고 아우성쳤다. 물론 나라는 망하지 않았고, ‘민족 반역자’나 ‘공산도배’도 없었다.

호주제 폐지 운동에 앞장선 고은광순은 <한국에는 남자들만 산다>는 책에서 자신이 겪은 일을 하나 소개했다. 호주제 폐지 문제로 저자와 사이버 논쟁을 벌인 한 네티즌은 자신의 어머니를 생각하면 ‘눈물이 글썽’하고 ‘가슴 저리기도 하고 애틋하기도’ 하다는 등 지극한 어머니 사랑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는 호주제 폐지에 대해선 ‘어머니 모독’이라고 화를 내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고 한다.

“우리 어머니가 힘들게 자식 키우신 것을 무시하는 발언을 어떻게 계속 놓아둘 수 있단 말입니까? 어머니는 집에서 노예였단 말입니까? 그래서 어머니가 소중히 생각해오신 가정을 없애버려야 한단 말입니까? 정말 파렴치한 범죄자들입니다.”

2005년 3월2일 호주제 폐지안을 주 내용으로 하는 민법개정법률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자 본회의장 밖에서 이를 지켜보던 지은희 전 여성부 장관(오른쪽에서 두번째) 등 여성계 인사들이 기뻐하며 만세를 외치고 있다. 
2005년 3월2일 호주제 폐지안을 주 내용으로 하는 민법개정법률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자 본회의장 밖에서 이를 지켜보던 지은희 전 여성부 장관(오른쪽에서 두번째) 등 여성계 인사들이 기뻐하며 만세를 외치고 있다.  ⓒ한겨레

‘웃픈’ 이야기지만, 결코 웃어선 안 된다. 지금 우리는 페미니즘과 관련해 위와 같은 식의 주장과 논리가 ‘주류’로 통용되는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진지하고 심각하게 혈압까지 높여가면서 열변을 토하는 사람들을 향해 웃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나는 13년 후 사람들이 마음 놓고 웃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지금 벌어지고 있는 모든 페미니즘 관련 논쟁·논란·폭력을 열심히 기록하는 중이다.

그런 기록 작업을 하면서 평소 해온 생각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페미니즘 문제는 사실상 가족 문제라는 사실을 말이다. 여성 억압의 원흉이 ‘가부장제’라는 건 수많은 전문가들이 지적해온 사실이지만, 가부장제는 적절한 용어는 아니다. 과도한 학술적 완곡어법이기 때문에 문제의 심각성을 드러내지 못한다. ‘여성착취제’라고 부르는 게 옳지만, 일단 소통을 위해 가부장제로 부르기로 하자.

가부장제는 교묘한 이중 구조를 갖고 있어서 깨부수기가 영 쉽지 않다. “여성이 약자라고? 우리집의 왕은 어머니다”라는 어느 댓글이 시사하듯이, 많은 남성들은 자신의 가족을 근거로 ‘여성 약자론’마저 인정하지 않는다. 어머니는 오랜 희생과 투쟁을 통해 자신이 낳은 자식들을 기반으로 세력권을 구축해 이른바 ‘자궁 가족’의 수장이 되는데, 이 자궁 가족이 가부장제를 유지하는 안전판 노릇을 하고 있는 셈이다.

자궁 가족에서 어머니들은 가부장제의 적극적인 협력자로 활약한다. 당했던 며느리가 시어머니가 되면 달라질 법도 하건만, 그 지긋지긋한 고부 갈등이 여전히 계속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물론 그건 어머니 탓은 아니다. 여성의 결혼을 ‘시집을 가는’ 걸로 여기는 의식과 관행 자체를 깨버려야 어머니도 해방된다.

ⓒebs

한국은 사회가 져야 할 비용과 책임을 모두 가족에게 떠넘기는 식으로 압축성장을 해온 나라인지라, “믿을 건 오직 가족뿐”이라는 신앙이 한국인의 일상적 삶을 지배한다. 여성혐오는 엄밀히 말하자면 ‘가족 밖 여성’과 사회에 대한 혐오다. 나의 어머니는 숭배 대상이지만, 너의 어머니는 혐오 대상이다. 그래서 나온 말이 ‘맘충’이다.

극단적 가족이기주의와 결합한 가부장제는 내외의 방어벽을 갖고 있는 셈인지라, 난공불락의 요새다. 하지만 우리는 목숨 걸고 반대했던 기득권자들의 극렬한 저항과 탄압에도 불구하고 노예제와 신분제를 깨부순 역사의 수혜자들이 아닌가. 시간이 얼마나 걸리느냐의 문제일 뿐 결론은 이미 나와 있다. 가부장제는 산산조각 난 채로 부서져 허공으로 사라지게 돼 있다.

가부장제, 아니 우리의 가족, 이대론 안 된다는 걸 생생하게 증언한 책이 많이 나와 있다. 그 책들을 읽으면서 역사의 도도한 물결에 동참하진 않더라도 가부장제 사수 의지에 의심을 품어보는 건 어떨까? 이미 ‘페미니즘의 경전’이 된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2016) 외에 내가 재미있고 감명깊게 읽은 책은 조주은의 <기획된 가족>(2013), 김보성·김향수·안미선의 <엄마의 탄생>(2014), 김희경의 <이상한 정상가족>(2017), 영주의 <며느리 사표>(2018), 최윤아의 <남편은 내가 집에서 논다고 말했다>(2018) 등이었다.

* 한겨레 신문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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