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스
2021년 12월 15일 20시 44분 KST | 업데이트됨 2021년 12월 15일 22시 25분 KST

'골 때리는 그녀들/골때녀' 송소희처럼 매주 혼성 축구(풋살)하는 여성의 눈물나는 '깍두기' 탈출기

'깍두기' 취급은 배려가 아니다. 진짜 필요한 배려가 따로 있다.

풋린이 도혜민| 퇴근 후엔 풋살을 하고 출근해선 풋살을 씁니다. 둘 다 좋습니다.

SBS/풋스타
FC원더우먼의 송소희. 오른쪽은 풋린이 에디터. 

풋린이 2년차 일하랴, 풋살하랴 바쁜 나는 여자들이 축구를 하는 SBS 예능 ‘골 때리는 그녀들‘ 본방까지 사수한다. 수요일 밤마다 과몰입하며 ‘골때녀’를 보던 중에 경기보다 인상적인 인터뷰가 있었다. 직장인 혼성 풋살 동호회에 가입했다는 송소희의 말. ”동호회 남자분들이 배려를 너무 많이 해주셔서 많이 못 배웠어요” 지금부터 송소희도 해봤다는 혼성 축구썰을 풀어본다.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의 오일남(오영수 배우)

″나 너무 무서워!!!! 그만해!!!!!”

처음으로 혼성 풋살(미니 축구)을 했을 때 내 심정이 딱 그랬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서 서로 물고 뜯는 남녀 참가자들 앞에서 어쩔 줄 모르고 울부짖는 오일남. 나도 그처럼 정말 울고 싶었다. 그러나 차마 울지는 못했다. ‘오징어 게임’에서는 오일남이 소리치자 경기가 종료되었지만 현실에서는 그런 게 있을 리 없었다. 이날 풋살 경기는 정해진 시간 120분을 꽉 채워 진행됐다. 눈물을 흘릴 시간조차 없었다. 

Portra via Getty Images
자료사진. 

풋살을 시작하고 10개월 정도 됐을 때 나는 풋살 매치 업체의 실수로 남녀 혼성 경기를 뛰게 됐다. 나만 빼고 모두가 남성 플레이어인 경기에서, 나는 풋살 인생 최초로 ‘하기 싫다‘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공을 다루는 기술도 파워도 스피드도 체력까지 모든 것이 나보다 월등한 남자들 사이에서 나는 그저 ‘민폐만 되지 말아야겠다’라는 심정으로 공만 보고 달렸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우리 팀도, 상대 팀도 유일한 여성 선수였던 나를 신경써줬다. 공을 못 받아 내가 주눅이라도 들면 ”괜찮아요”라고 위로해 주었고, 웬일로 공을 받아 우리 팀에게 패스까지 성공하면 ‘엄지척’을 날려줬다. 내가 좀 짠했는지 어떤 분은 자신에게 온 슈팅 찬스를 나에게 양보하기까지 했다. 내가 멋진 골로 마무리한 뒤 하이파이브를 했다면 해피엔딩이었을 테지만 현실은 현실이었다. 나는 입에 떠먹여줘도 곧바로 뱉어버리는 처참한 실력자였으니까. 

풋스타
혼성 풋살 경기 중.

이날을 계기로 나는 혼성 풋살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완전히 발린 주제에 무슨 자신감이냐고? 혼성 풋살은 나와 비슷한 실력의 여성들과 뛰었을 때와는 조금 다른 쾌감을 줬다. 어찌 됐든 나는 남자 플레이어들과 함께 경기를 끝까지 뛰었고, 보다 빠른 템포의 경기를 소화하면서 풋살을 재미를 조금 더 느꼈달까. 게다가 여성 풋살을 하려면 여자 10명이 필요한데 그 많은 인원을 모으는 것보다는 남성 경기에 참가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었다. 

DOHYEMIN/HUFFPOSTKOREA
남자친구와 함께 혼성 풋살 수업을 들었던 첫 날. 2020.12

그렇게 나는 종종 혼성 매치를 신청해 모르는 사람들과 경기를 하다가 2020년 12월 마침내 혼성 풋살 클래스를 등록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1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는 일주일에 한 번 혼성 풋살 경기를 한다. 수많은 회원들이 가입과 탈퇴를 반복하는 동안 제 자리를 지킨 나였지만, 나는 내가 어쩐지 ‘깍두기’ 같다는 느낌을 쉽게 지울 수 없었다. 경기를 할 때마다 남자 회원들이 나를 대놓고 봐주는 게 느껴져서다. 살짝 부딪힐 때도 친절한 남자 회원들은 ”괜찮아요?”라고 아주 크게 걱정해 줘서 민망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zhihao via Getty Images
Three men urinating.

풋살장도 나를 비롯한 여성들을 깍두기 취급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왕왕 있다. 아무래도 여자들보다 남자들의 이용률이 높다 보니 풋살장 자체가 남성 위주로 설계된 경우가 많다. 내가 자주 가는 풋살장에는 여자 탈의실이 아예 없다. 다행히 여자 화장실은 있어서 그곳에서 불편하게 옷을 갈아입곤 했다. 조금 민망할 때도 있는데 오래된 풋살장에는 남녀 공용 화장실이 많은 편이다. 그럴 때 나는 최대한 물을 마시지 않는다. 목이 말라도 꾹 참는다.

두잇풋살 인스타그램
혼성 풋살 클래스에서 단체로 맞춘 유니폼을 입고 기념 사진을 찍었다. 2021.4

‘깍두기’ 벗어나기

그러나 한 번 깍두기가 영원한 깍두기란 법은 없다. 매주 빠지지 않고 열심히 훈련하는 동안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야금야금 성장해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친구들이 ”왜 이렇게 많이 늘었어?”라고 말해줄 때마다 온몸이 짜릿짜릿했다.

혼성 풋살 클래스에서도 변화가 있었다. 작년만 하더라도 우리 팀 남자 플레이어들은 경기 때마다 나에게 ”골대 앞에 서 계시면 될 것 같아요”라는 말을 자주 했다. 나는 그 말이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포워드, 미드필더, 센터백, 윙백 등 포지션이 분명한 축구와는 분명히 다른 풋살의 특징 때문이다. 특히 아마추어 풋살에서는 정해진 포지션이 거의 없다. 쉴 새 없이 뛰면서 기회를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도 풋살을 할 때 골대 앞에 서 있으란 건? 아주 솔직히 말해서 그냥 주워 먹기만 하라는 의미다. 이 이치를 깨닫고 난 뒤 나는 절대로 골대 앞에 가만히 서 있지 않는다. 상대 진영을 넘어갔다가 공을 빼앗기면 다시 우리 골대 앞으로 뛰어가 수비에 힘을 보탠다. 20m 이상 거리를 한 번에 전력질주하는 일이 쉽지 않지만 일단 풋살장을 이리 저리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포지션과 플레이가 바뀌면서 나의 경기 기록도 달라졌다. 슈팅 위주가 아니라 패스 위주로 바뀌었다. 슈팅을 욕심내기보다 결정력이 좋은 다른 플레이어에게 어시스트를 하기 시작했다. 

송소희가 말하는 ‘아쉬운 배려’의 정체

경기에서 자신감이 생긴 나는 혼성 풋살의 암묵적인 룰을 깨트리기 시작했다. 규칙으로 정해놓은 것은 아니지만 혼성 풋살을 할 때면 1) 몸싸움이 거의 없고 2) 킥인(축구의 스로인)과 코너킥은 주로 남자들이 한다. 3) 골키퍼도 위험하다는 이유로 여자들을 제외시키곤 한다. 아마도 이것이 송소희가 말하는 ”배려”일 것이다. 나 또한 송소희처럼 그 배려가 아쉬웠다. 나도 남자들처럼 몸싸움을 할 수 있고, 킥인과 코너킥이 가능하고, 골문을 지킬 자신이 었었다. 그래서 누가 시켜주기 전에 그냥 하기 시작했다. 내가 한다고 해도 뜯어말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풋스타
즐거운 혼성 풋살.

남자와 여자? ㄴㄴ 그냥 축구하는 사람들

변화는 금방 찾아왔다. 오직 공을 빼앗아야겠다는 일념으로 상대팀 남자 플레이어와 부딪히면서 내가 듣는 말은 이제 ”괜찮아요?”라는 걱정이 아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경기가 계속된다. 경기에 몰두하다 보면 말할 정신이 없기도 하다. 1년 넘게 함께 공을 차면서 우리는 승부를 위해서라면 몸싸움을 마다하지 않게 됐다. 그리고 나는 키퍼로서도 활약하기 시작했다. 슈팅력이 좋기로 소문난 남자 플레이어의 강슛을 맨손으로 막고 골인이 유력한 공을 막는 ‘슈퍼 세이브’도 종종한다. 

지난 1년 동안 혼성 풋살을 하면서 깨달은 사실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봐주는 것은 운동장에서 정말 불필요한 배려라는 것이다. 운동장까지 찾아간 여자들은 배려 받기를 기대하며 풋살을 하러 간 것이 아니다. 여자든, 남자든 우리 모두는 그저 풋살을 하고 축구를 하기 위해 모였을 뿐이다. 

도혜민 에디터: hyemin.do@huffpost.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