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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4월 25일 10시 47분 KST | 업데이트됨 2018년 04월 25일 10시 47분 KST

북한, 기로에 서다

huffpost

나는 결코 식민사관의 종사자는 아니다. 즉 나는 한반도의 역사가 주로 타율적으로, 외부 원인에 의해 좌우된다고 절대로 보려 하지 않는다. 한반도도 세계의 어느 지역 못지않게 그 고유한 역사의 리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자명하다. 한데 동시에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

한반도는 동북아의 요충지인 만큼 늘 ‘외압’에 노출돼 있으며, 때로는 외부로부터의 영향이 그 운명에 큰 역할을 한다. 만에 하나 한국을 ‘반공의 최전선’으로 인식한 미국·일본이 1960년대부터 박정희 정권에 차관과 기술을 제공하여 한국의 유치산업이 국내 시장의 보호를 받으면서 부유한 외부 시장에 접근할 수 있도록 신(新)중상주의적 보호무역을 관철시키지 않았다면 과연 초고속 개발이 가능했을까. 그러나 남한에 대한 개발 지원의 이면에는 북한에 대한 개발 저지가 있었다.

1970년대부터 대미·대일 정상화의 길에 들어선 중국은 이미 1970년대 후반부터 서방·일본으로부터 좋은 조건으로 개발원조와 기술 지원 등을 받을 수 있었지만 미국의 ‘적대국’으로 확정되어 있었던 북한은 대체로 그때부터 엄청난 국방비용 부담 등으로 경제 침체에 봉착했다. 내부적 요인들도 물론 있었지만, 일차적으로는 미국으로부터의 적대라는 외인이 크게 작용한 것이다.

중국·베트남 등과 마찬가지로, 소련식 ‘적색 개발주의’, 즉 국가가 독점적으로 주도하는 경제의 한계에 직면한 북한도 개방정책 추진을 위해 나름의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한 사례를 들자면, 중국의 개혁개방을 참고한 북한은 이미 1984년 1월에, 최고인민회의 제7기 3차 회의를 통해 ‘대외경제사업 및 무역 확대 발전 방침’을 채택했으며, 같은 해 9월 ‘합영법’, 즉 외국 자본과의 합작기업 설립에 대한 법률을 제정했다. 이후 이를 근거로 1986년부터 합영회사를 설립하기 시작했으며, 1991년 12월에 나진·선봉 경제특구 등을 설립했다.

한데 이와 같은 조심스러운 시도들은 국제 정치의 ‘벽’에 부딪쳤다. 미·일과의 미(未)수교 상태에서는 서방·일본 투자자들이 북한을 여전히 ‘고(高)위험지역’이라고 외면했다. 그 당시에 김일성 주석은 이 ‘벽’을 과감한 대일 외교로 돌파하고자 했다. 일본 자민당의 ‘킹메이커’로 알려진 가네마루 신(金丸信) 의원은, 1990년 9월 일본 자민당과 사회당 대표단을 이끌고 방북했다. 그는 김일성과의 회담에서 북-일 수교와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금 지급 등에 대해 예비적 합의를 이끌어내고, 북한 노동당과 북-일 국교 정상화를 위한 3당 공동선언 발표를 주도했다. 소련의 대남 수교와 때를 같이하여 일본의 대북 수교도 이루어지려는 순간이었다. 한데 김일성의 대일 수교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미국이 비토를 놓아 북한의 중국식 개혁개방의 가능성을 사실상 차단시킨 것이다.

이후 북한에서 ‘봉쇄정책’이라고 부르는 미국의 대북고립책은 계속 이어졌다. 비록 1995년과 2000년에 냉전시대부터 있어온 대북 무역제한들의 대부분은 철폐되었다고 하지만, 미국은 끝내 북한에 정상무역관계(Normal Trade Relations: NTR) 지위를 부여하지 않았다. 무역 우대도 거부되어 북한으로부터의 수입품들은 징벌적 관세율 적용 대상으로 남아 있었다. 대북 접근이 비교적 용이했던 1990년대 후반에도, 위와 같이 미국은 북한과의 무역과 북한에 대한 투자를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곤 했지만, 부시 대통령의 집권과 악명 높은 ‘악의 축’ 발언 이후에는 북한이 ‘전쟁 준비’로 느낄 정도의 극도로 적대적인 정책이 지속되었다.

북한은 이에 맞서 양면적인 형태의, 상당히 합리적인 대응을 해왔다. 일면으로는 최악의 경우에 대비하여 핵·미사일 개발로 방위력을 높여 갔고, 또 일면으로는 점진적인 개혁과 개방을 진행해왔다. 동시에 대일 수교를 위한 노력을 계속 경주하는 등 미국이 강요한 고립에 나름대로 맞서온 것이다. 이제 북한은 미국의 도발을 상당히 어렵게 만들 만큼의 핵·미사일 억지력을 가졌으며, 이미 약 50%의 국민총생산이 민간부문에서 발생하는, 국가 관료 주도형 반(半)시장적 경제 모델을 과시한다. 중국·베트남과 본질상 크게 다르지 않은 모델이다.

그래서 남한에서 합리적이고 평화공존 지향적인 정권이 등장한 이 시점이 적기라고 판단한 북한은, 그 억지력의 일부분인 핵을 완벽한 체제 보장을 대가로 하여 점진적으로 포기하는 동시에 중국·베트남이 이미 그랬듯이 자본주의 세계체제로 완전히 편입되고자 한다. 지금 이 순간순간이야말로 북한 역사뿐 아니라 동북아 전체 역사의 기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북한 지도부의 이 원대한 포부가 실현되느냐 마느냐에 따라 동북아의 미래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이 미·일과의 수교와 제재 철폐에 성공한다고 가상해보자. 이렇게 되면 북한은 그 개발에 필요한 세 가지 요소, 즉 기술 이전과 투자, 그리고 해외시장에의 접근을 즉각적이고 충분하게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의 대미·대일 수교에 따라 중국도 이미 확보한 북한 시장을 놓치지 않기 위해 투자·무역 증강에 주력할 것이고, 적어도 일정 기간 ‘북한 투자 붐’ 같은 현상이 일어날 것이다. 거기에 일본의 식민지배 배상금까지 들어오면 방직물과 자원 수출국으로서의 북한은 캄보디아나 라오스, 방글라데시 같은 유사한 수출 구조를 가진 다른 나라들만큼의 7% 성장률 혹은 그 이상의 성장을 바라볼 수도 있다. 그리고 북한의 기초과학과 교육제도, 군수공업 등이 가진 기술력을 고려한다면 노동집약적인 방직 수출에서 전자제품이나 소프트웨어 같은 기술집약적인 상품 수출로의 이행 속도는 생각보다 훨씬 빠를 수도 있다. 어쩌면 이미 20~30년 후에 성장 동력이 거의 소진된 한국의 젊은이들은 북한 기업에 취직하려고 줄을 서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처럼 한반도에서 평화·경협 무드가 조성되기만 하면 북한뿐만 아니라 주변의 정세도 여러모로 호전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남한부터 보자. 북한과의 안정적인 평화·교류·경협 관계가 정착되기만 하면 남한 사회에서는 가히 혁명적이라 할 만한 변화들이 일어날 것이다. 양안 관계가 어느 정도 안정되면서 지금 대만에서는 징병제를 폐지하는 과정이 진행 중이다. 만약 북한이 ‘주적’이 아닌, 통일로 가는 기나긴 여정에서의 파트너가 된다면 과연 한국에서 징병제를 계속 고집할 명분은 남아 있을까. 징병제가 철폐된다면 이는 단순한 국방정책의 변화만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여태까지 한국 사회를 사로잡아온 군사문화는 이렇게 해서 점차 청산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북-일 수교는 북한의 ‘위협’을 명분으로 한 일본 재무장 계획의 지속적 실행을 훨씬 더 어렵게 만들 것이고 일본 내 평화지향적 세력들의 지위를 대폭 강화시킬 것이다. 또한 북한이 중·미 사이에 균형을 찾아가면서 양쪽에 실리외교를 할 수 있는 국가가 되는 순간에는, 한반도가 중-미 갈등의 잠재적인 ‘전장’으로 부각되는 패턴을 남북한의 공동의 노력으로 바꾸어나가기가 훨씬 쉬워질 것이다. 과거에 노무현 대통령이 언급했던 ‘균형추’로서의 역할을 하려면 남북한의 공동의 노력이 필요하다. 남북한 대립이 지속되는 이상 ‘균형추’와 같은 형태의 지역적인 외교·안보적 주체로 거듭나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평화는 아직도 약속된 것은 결코 아니다. 백악관 안보보좌관 볼턴 등 트럼프 주위의 전쟁광들의 면모만 봐도 평화로의 길이 얼마나 험난할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북한뿐만 아니라 한반도, 나아가 동북아 전체가 기로에 선 이 운명적 순간이야말로 ‘운동’이 매우 중요하다. 평화를 위한 촛불시위 같은 형태로 대다수 한국인들이 대북 적대정책의 폐기와 평화 레짐의 성립을 원한다는 것을 세계에 보여주면 전쟁세력의 저항을 뚫고 한반도, 나아가서 동북아 지역 전체의 평화로 가는 길은 훨씬 수월해질 것이다. 적폐정권을 무너뜨린 민중의 힘이야말로 평화 쟁취의 주체가 되어 마땅하다.

* 한겨레 신문에 게재된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