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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석에 앉은 사우디 공주 ‘보그’ 표지가 비판받는 이유

“사우디는 여성을 운전석에 앉히고 있다. 우리도 그렇게 했다"

<보그> 아라비아 6월호 표지 Boo George/Vogue Arabia
<보그> 아라비아 6월호 표지 Boo George/Vogue Arabia ⓒvogue

패션지 보그 아라비아판이 사우디아라비아 내 여성 운전 허용 시행을 앞두고 공주가 운전대를 잡은 모습을 표지로 내세웠다. 그런데 정작 국내외에서 이 잡지에 대한 비판 여론이 일고 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지난달 30일 보그 아라비아는 하이파 빈트 압둘라 알 사우드 공주가 사막을 배경으로 자동차 운전석에 앉아있는 6월호 표지를 공개했다.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은 여성들을 운전석에 앉히고 있다. 우리도 그렇게 했다(The Kingdom of Saudi Arabia is putting women in the driving seat - and so are we)”라는 말로 시작하는 하이파 공주의 인터뷰와 여성 운전면허 허용에 대한 표지 기사도 함께 공개했다.

보그 아라비아는 기사에서, 이번 조처가 2030년까지 사우디를 현대화하겠다는 모하메드 빈 살만 왕세자의 ‘비전 2030’의 일부라는 점을 언급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전하는 저명한 왕실 여성이 잡지 표지를 장식하는 것은 중동에서 최초”라고 자부했다. 하이파 공주는 기사 속 인터뷰에서 “변화를 두려워하는 보수주의자들이 일부 있다”며 “개인적으로는 (여성 운전 허용과 같은) 변화를 강력하게 지지한다”고 말했다.

이 표지와 기사가 논란이 된 이유는 바로 불과 2주 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인권 운동가들이 10여명 넘게 갑작스럽게 체포됐기 때문이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오는 24일부터 공식적으로 여성의 운전면허 취득이 허용된다. 사우디 여권 상승의 상징 같은 조처인 여성 운전 허용을 불과 한 달 앞둔 시점에서, 사우디아라비아 검찰은 정작 여성 인권 증진을 위해 오랫동안 활동해 온 인권 운동가들을 구금한 일이 발생한 것이다.

검찰 당국이 밝힌 체포 이유는 이들이 시위로 “왕실의 안정을 위협했으며 사회적 평화와 국가 통합을 악화시켰다”는 것이었다. 3일까지 일부가 가석방됐으나 여성 4명, 남성 5명 등 9명은 ‘(위협의) 증거가 충분하다’는 이유로 여전히 구금돼 있다.

게다가 이들의 구금 장소도 공개되지 않고 있다. 국제인권단체 앰네스티는 “사우디에서 더 많은 인권 운동가들과 시민들이 체포되고 있어 심히 우려된다”며 사우디 정부를 규탄했다. 유엔 인권사무소도 “여성 인권 문제를 위한 활동 때문에 운동가들을 구금했다면 즉각 석방해야 한다”고 입장을 냈다.

사우디 여성들은 운전을 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남성 후견인과 동행해야 도시 간 이동을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사우디 내 인권 운동가들은 수년 동안 시위와 구금을 반복하며 운전할 권리를 얻기 위해 싸워왔다. 여성 운전 허용이 결정된 지난해 9월까지 트위터 등 사회관계망서비스에는 ‘#나는 나의 후견인이다’(#IamMyOwnGuardian), ‘#사우디 여성도 운전할 수 있다’(#SaudiWomenCanDrive) 해시태그가 1만 4000건 이상 올라온 바 있다.

이런 상황에서 나온 보그 아라비아의 표지와 기사는 첫째, 사우디 당국이 여성의 운전을 허용한 ‘비전2030’을 대외적으로 홍보하면서도 정작 국내에서는 인권운동 탄압을 이어가고 있는 상황이라는 점을 간과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둘째, 사우디 당국의 이런 이중적 행보에도 불구하고 “왕국의 여성들의 너른 성취”라는 표현과 함께 사우디 왕실의 공주를 표지 모델로 정하면서 결과적으로 당국을 상찬했다는 비판도 함께 받고 있다.

사우디 시민들은 보그 아라비아의 트위터에 “진짜 기념해야 할 것은 수년간 여성 운전 허용을 위해 싸워온 이들”, “보그가 (왕실이 아닌) 실제로 여성 인권을 주장해온 사람들에 대한 기사도 감히 써주길 기대한다”는 의견을 남겼다. “애초에 여성 운전 금지한 것은 공주의 왕가고, 여권 운동가들을 체포한 것도 왕가”라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지적하는 글도 있었다.

몇몇 트위터 사용자는 현재 구금 상태인 사우디 인권 운동가 아지자 알 유세프와 루자인 알 하스럴의 얼굴을 보그 아라비아 표지에 포토샵으로 삽입한 사진을 올리기도 했다. 알 유세프는 사우디아라비아 여권 운동가 1세대이고, 알 하스럴은 2014년 아랍에미리트에서 사우디아라비아까지 운전해서 가려다 73일 동안 구금된 전력이 있다.

반면, 일부에선 보그 아라비아의 이번 표지와 기사를 환영하는 의견도 나왔다. 보그 아라비아와 인터뷰한 인권 운동가 마날 알 샤리프는 트위터를 통해 “이번 호는 사우디 여성들에게 헌정됐다. 우리나라 여성들이 축하받는다는 것이 기쁘다. 하지만 진짜 영웅들을 잊지 말자”며 알 유세프와 알 하스럴을 언급했다. 샤리프는 논란에 대해서는 “모두 같은 바다에 더해지는 물방울이다. 나는 모든 물방울들에 감사한다”고 썼다.

보그 아라비아의 마누엘 아르나우트 편집장은 뉴욕타임스에 “중동과 사우디 사회에서 여성의 역할이라는 의미있는 주제를 위해 건강한 토론을 시작하게 하는 게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미션”이라며 “이번 표지는 이에 부합하며 우리가 이 토론에 활발하게 목소리를 냈다는 게 자랑스럽다”고 입장을 밝혔다. 하이파 공주와 왕실은 별다른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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