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너에게 가는 길' 주인공이자 성소수자부모모임 활동가 비비안은 아들의 게이 커밍아웃을 “0.001%도 상상해본 적 없던 일"이라고 했다

27년 차 승무원 워킹맘으로 살아온 비비안
영화 '너에게 가는 길' 스틸컷
(주)엣나인필름
영화 '너에게 가는 길' 스틸컷

태어나서 한 번도 상상하지 못 한 일이 내 인생에 일어났다

2016년 6월, 21살 아들(장예준)은 엄마 아빠에게 자신이 없을 때 편지를 읽어달라 말하고 집을 쌩 나가버렸다. 아들이 식탁 위에 올려두고 간 것은 편지 한 장과 성소수자 부모 모임 책자. 책에 쓰인 ‘성소수자’라는 단어를 보는 순간까지도 엄마 비비안(본명 강선화)은 아들이 게이일 거란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그순간 그에게 단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던 일이 일어났다. 아들이 쓴 편지에서 한 문장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저는 남성 동성애자입니다.’ 다음부터는 아무 글자도 보이지 않았다. 비비안이 가장 첫 번째로 든 생각은 말 그대로 ‘충격’이었다.

충격과 동시에 ‘평범함’이란 범주에서 추락하는 느낌을 받았다. 27년 차 국내 항공사 승무원 비비안은 자신이 아주 순탄하게 잘 살아왔다고 자부했다. 학교 졸업 후 안정된 회사에 바로 취직했으며 운이 좋게 연애도 잘해서 남편과 진하게 연애 하고 결혼했다. 아주 평범하고 많은 사람이 누리는 삶이 제일 성공적인 삶이라고 생각했다.

영화 '너에게 가는 길'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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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너에게 가는 길' 스틸컷

승무원 일을 하면서 여행 가는 게이 커플을 손님으로 맞이한 적도 있었고, 외국에 수없이 드나들면서 ‘프라이드 축제’라는 것도 알았다. ‘프라이드’가 열리는 6월에는 상점마다 무지개 깃발이 달린 모습도 구경했다. 그러나 성소수자가 일상 속 아주 가까이에 존재하고 있고, 그 사람이 아들일 거라고는 0.001%도 상상해본 적 없었다. 비비안은 “나한테 일어날 일이란 걸 상상조차 못 했다는 것 자체가 편견이었다”고 회상했다.

아들이 커밍아웃 한 후 비비안은 몰려오는 죄책감을 느꼈다. 아들한테 상처 주는 말을 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엄마가 노력해볼게. 아직 잘 몰라서 혼란스럽지만, 시간을 줘라. 이런 힘든 인생 살게 낳아줘서 너무 미안하다”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엄마 마음과는 달리 아들 예준은 부모한테 죄책감을 안겨줬다는 사실에 또 한 번 상처를 받았다. 2016년 7월, 엄마 비비안은 아들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 ‘성소수자 부모모임’에 나가기 시작했다.

영화 '너에게 가는 길' 스틸컷
(주)엣나인필름
영화 '너에게 가는 길' 스틸컷
영화 '너에게 가는 길'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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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너에게 가는 길' 스틸컷

성소수자 부모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얻다

위 이야기에 등장하는 비비안은 11월 17일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영화 ‘너에게 가는 길’의 주인공 중 한 명이다. 영화에는 성소수자 부모모임 활동가인 34년 차 소방 공무원 나비와 27년 차 항공 승무원 비비안이 단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내 아이의 커밍아웃 이후 벽을 허물어나가는 이야기가 담겼다.

성소수자라는 단어조차 낯설었던 기성세대 여성이자 워킹맘으로 살아온 두 사람은 갑작스럽게 성소수자 부모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얻었다. 성적소수문화인권연대 연분홍치마 활동가인 변규리 감독은 아주 보통의 중년 여성들이 편견에 맞선 우먼 파이터로 거듭나는 모습을 총 4년에 걸쳐 담아냈다.

영화 '너에게 가는 길' 주인공 나비(왼쪽), 비비안(오른쪽), 변규리 감독(가운데)
(주)엣나인필름
영화 '너에게 가는 길' 주인공 나비(왼쪽), 비비안(오른쪽), 변규리 감독(가운데)

‘너에게 가는 길’이라는 영화 제목처럼 아들 예준이의 커밍아웃은 엄마 비비안에게 어떤 길이 되었을까. 어느새 30년 차 승무원이 된 비비안은 ‘걸어 다니는 커밍아웃’이 됐다. 아들 또래인 20대 후배가 “며느리로 저는 어떠냐”고 물으면 “내 아들은 게이다”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더 넘어서서 비비안은 자신의 견고한 벽을 허물었다. ‘승무원은 이래야 한다’는 틀에 갇혀있던 그는 과거 어린 후배들한테 친근감의 표현으로 반말을 썼고, 후배들을 미숙한 존재로 보기도 했다. 이제는 후배들을 동등한 위치에서 볼 수 있게 됐다. 비비안은 ”스스로 틀을 깰 수 있게 됐다. 시작은 아이의 커밍아웃이었는데 결국 내가 성장했다”고 말했다.

'성소수자부모모임' 활동가이자 영화 '너에게 가는 길' 주인공 비비안
(주)엣나인필름
'성소수자부모모임' 활동가이자 영화 '너에게 가는 길' 주인공 비비안

우연히라도 이 영화를 마주치길 바란다

비비안은 “대중들에게 이 영화가 어떤 길이 되어줬으면 하냐”는 질문에 “우연히라도 영화를 보고, 각자가 상상하는 세계가 좀 넓어졌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성소수자가 존재하는 세계가 누군가에게는 상상할 수도 없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어 “최종적으로 바라는 건 이성애자가 당연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고 서로 소통하는 세상”이라며 “젊은 여성에게 ‘남자친구 있어요?’라고 당연하게 묻는 게 아니라, 성별을 지정하지 않고 ‘애인 있어요?’라고 자연스럽게 물어보는 거다”라고 밝혔다.

12월을 한 달 앞두고 ‘차별 금지법’ 연내 제정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진다. 변화로 향하는 길목에 영화 ‘너에게 가는 길’이 함께 한다. 11월 17일 개봉을 알린 이 다큐멘터리가 2021년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바치는 희망이자 변화에 다가서는 한 걸음이 아닐까.

이소윤 에디터 : soyoon.lee@huffpost.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