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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 성차별 만연한 만화계 현실 가감 없이 폭로한 만화 (인터뷰)

브장 작가는 만화계 성폭력 생존자로, 본인의 힘든 기억을 책에 담았다.

  • 이인혜
  • 입력 2021.01.13 20:59
  • 수정 2021.01.13 21:00
만화계에서 처음으로 공론화된 성폭력 사건을 책 '나, 여기 있어요'에 담아낸 작가 디담(사진 왼쪽)과 브장.
만화계에서 처음으로 공론화된 성폭력 사건을 책 '나, 여기 있어요'에 담아낸 작가 디담(사진 왼쪽)과 브장. ⓒ한겨레

 

“많은 성폭력 피해자분들은 업계에서 매장되지 않을까 하는 공포가 있습니다. 책 ‘나, 여기 있어요‘는 ‘나 아직 여기 만화계 업계에 있다’는 뜻이에요. 피해자가 사라지지 않고 자신의 삶을 살고 있다는 메시지를 주고 싶어요.”(브장)

지난 6일 서울 마포구의 출판사 ‘교양인’ 사무실에서 만화 ‘나, 여기 있어요(2020)‘를 쓰고 그린 두 작가를 만났다. 스토리와 그림 작가 브장(필명, 28)과 그림 작가 디담(필명, 36)이 그 주인공이다. 두 작가는 만화계에서 성폭력 근절 운동을 하다 만나 함께 책을 냈다. 브장 작가는 2014년 만화가 정아무개씨를 강제추행으로 고소해 유죄 판결을 이끌어낸 당사자, ‘만화계 성폭력 생존자’다. 이 책은 브장 작가의 경험을 토대로 한 이야기다. 책은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의 ‘2020 다양성만화 제작 지원사업’에 선정된 뒤 지난해 12월25일 세상에 나왔다.


만화계에서 공론화한 첫 성폭력 사건

책 '나, 여기 있어요'
책 '나, 여기 있어요' ⓒ한겨레

 

힘든 기억을 책으로 내기까지의 과정은 쉽지 않았다. 브장 작가는 “벌써 6년 전 일이다.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작업을 하면서 과거에 대해 회상하게 되면 트라우마처럼 (그때) 생각이 났다. 때론 울면서 작업을 하기도 했다. 디담 작가한테 연락해서 막 질질 짜고 그랬다”며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고 했다.

이 작품은 20살의 주인공 ‘현지’가 겪은 일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만화 작가의 꿈을 갖고 유명 만화가에게 도제식 교육을 받게 된다. 유명 웹툰 작가이자 한국만화가협회 이사이기도 한 40대 남성 정한섭은 사무실에 출근하는 문하생 현지에게 폭언과 폭행, 성추행을 일삼는다. 일을 가르쳐준다며 월급도 제대로 주지 않는다. 현지는 결국 만화가를 강제추행으로 고소해 징역 8개월의 유죄 판결을 이끌어낸다. 등장인물의 이름은 다르지만, 이 일은 브장 작가가 직접 겪은 일이다. 만화·웹툰계에서 공론화된 첫 성폭력 사건이다.

이는 문화예술계 미투 운동이 시작되기 전인 2014년의 일로, 지금보다 성폭력 피해를 공론화하기 더 어려운 환경이었다. 브장 작가는 “성폭력은 개인의 일이라고 생각하던 때였다. ‘피해자가 거짓말한 것일 수 있잖아?’ 이런 말이 보편적으로 오가는 상황이었다. 중간에 협회(한국만화가협회)가 ‘개인적인 일 아니냐’ 이런 식으로 이야기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업계의 낙인과 싸우고, 재판에서 진술하는 등의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었지만 성폭력 피해를 공론화한 것은 만화계에서 의미가 크다. 브장 작가는 “저는 업계에서 상당히 잘 (마무리) 된 사건이다. 가해자가 더는 업계에 돌아오지 않고 가해자 주변인들도 더는 가해자를 보호하지 않는다”며 많은 성폭력 사건이 이조차 이뤄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그는 “이 공론화를 계기로 ‘그때 그 사건이 있었지’ 하면서 비슷한 문제 제기가 나오면 이 사건을 기억한다”고 전했다.

책 <나, 여기 있어요></div>의 한 장면.
책 <나, 여기 있어요>의 한 장면. ⓒ한겨레/ 브장 제공

 

이 작품은 단지 유명 작가 한 명의 성폭력만을 말하지 않는다. 남성 중심사회, 가부장제의 문제를 함께 드러낸다. 가족 내에서 아빠와 오빠만을 위하는 현지네 가정을 만화 스토리 안에 함께 녹였다. 성폭력은 개인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구조적인 문제임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브장 작가는 “사람들은 피해자에게 ‘왜 문하생으로 계속 있었어? 네가 선택한 거 아냐?’라고 쉽게 말한다. 하지만 피해자는 별다른 선택지가 없는 사회 구조 속에 놓여있다”고 전했다.

특히, 현지는 정한섭뿐만 아니라 남자 과외 학생의 추행 등도 일상에서 겪는다. 그는 “여성이 살면서 다양한 사람들에게 성희롱·성폭력을 경험한다는 사회 구조를 그리고자 했다”고 전했다. 브장 작가는 2019년부터 문화체육관광부 성희롱·성폭력 강사로 활동 중이다.

2019년 11월13일 제주대에서 브장 작가가 ‘문화예술계 성폭력과 성적 대상화’를 주제로 강의하는 모습.
2019년 11월13일 제주대에서 브장 작가가 ‘문화예술계 성폭력과 성적 대상화’를 주제로 강의하는 모습. ⓒ한겨레/ 브장 제공

 

만화엔 브장 작가의 경험을 그림으로 담아낸 디담 작가의 섬세한 접근이 눈에 띈다. 독자들이 읽기에 지나치게 폭력적이지 않도록 일부 순화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가해자 정한섭과 가부장제의 문제를 드러내는 핵심 인물인 오빠의 얼굴에 눈을 그리지 않았다. 영화나 만화에서 사람의 눈은 감정을 전달하는 통로로 쓰이는데, 가해자의 의도나 감정을 설명하고 나타내는 표현을 배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눈 대신 안경알만 그렸다.

디담 작가는 “브장 작가와 ‘이거 어때’, ‘지나치게 폭력적이지 않을까’ 의논해가면서 작업했다”고 말했다. 그가 스토리를 시각화할 때 가장 염두에 둔 부분은 만화 전반의 톤을 담담하게 유지하는 것이었다. “주제 전달을 위해 만화 전반의 톤을 지나치게 다이나믹하지 않게, ‘기승전결’이 아니라 잔잔하게 끌고 갔다”고 했다.

 

신인 작가도 안전한 만화계를 위하여

책 '나, 여기 있어요'의 한 장면.
책 '나, 여기 있어요'의 한 장면. ⓒ한겨레/브장 제공

 

작품은 성차별이 만연한 만화계 현실 전반을 드러낸다. 웹툰을 싣는 포털의 피디(PD)가 현지의 작품을 3초 훑어보더니 “‘여자 그림체’네? 필요 없어”하고 가버린다. 이런 일은 6년이 지난 지금도 자주 일어난다. 브장 작가는 “에스에프(SF) 장르는 남자들이 주로 본다면서 ‘남성적인 그림체’를 가져와야 한다고 주장하고, 소위 로맨스 작품은 여자들이 많이 보게 ‘예쁜 그림체’를 가져와야 하고…(포털 결정권자들이) 정한 틀에 작가들을 끼워 맞추고 있다”고 했다.

특정 성별의 범주 안에 규정할 수 없는 개성있는 작품들이 나오고 있는데, 그림체에 대한 고정관념이 시장에서 여전히 강하다고 했다. “소위 ‘순정만화’ 하면 떠올리는 예쁜 그림체에서 벗어난 작가분들의 전형적이지 않은 순정만화 그림체도 있다. 또한, 눈을 크게 그리는 등 순정만화 그림체에 가까운 데 깊이 있는 에스에프(SF) 작품을 그리는 작가도 있다. 특정 성별의 범주 안에 넣을 수 없는 작품들이 많음에도 왜 ‘여자 그림체’라는 개인의 편견을 버리지 못할까”(디담)

2020년에도 ‘웹툰계 여성혐오 중단하라’ 해시태그 운동이 벌어지는 등 논란이 뜨거웠다. 만화가 기안84의 ‘복학왕’ 등 여성 비하 표현을 담은 작품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이에 대해 두 작가는 “작가 개인을 비난하는 것만으론 해결되지 않을 문제”라며 “업계 자체가 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포털 등 웹툰을 게재하는 플랫폼이 작품에 많이 개입하는데, 막상 작품에 문제가 생기면 작가를 앞세워 책임이 없다고 하는 게 현실이다.

브장 작가는 “포털 웹툰은 ‘조회수 장사’를 하며 더 자극적으로 작품을 유도한다. 여성 비하 웹툰은 포털이 고민해야 할 부분”이라고 지적했다.

최근 만화·웹툰계에 많은 변화가 일고 있지만 더 많은 사람의 동참이 필요하다고 작가들은 강조했다. 디담 작가는 “작가들이 거리에 나와 시위를 하고, 젊은 작가들 나름의 커뮤니티 형성해 변화를 꾸려가고 있다. 그런데 오로지 젊은 작가들만 움직여서 바뀔 수 있는 게 아니다. 파트너인 업계의 회사들, 오래 일한 기성 작가들 결국 다 동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두 작가는 책 ‘나, 여기 있어요’가 단지 개인적 경험을 전달하는데 머물지 않기를 바랐다. 디담 작가는 “업계에 관한 지식과 정보가 없는 신인이나 준비생이 업계에 들어갈 때도, 이 업계가 안전했으면 좋겠다. 결정권을 가진 사람들은 내가 권력을 행사하지 않아도 나보다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 결정권이 권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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