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성폭력 피해자분들은 업계에서 매장되지 않을까 하는 공포가 있습니다. 책 ‘나, 여기 있어요‘는 ‘나 아직 여기 만화계 업계에 있다’는 뜻이에요. 피해자가 사라지지 않고 자신의 삶을 살고 있다는 메시지를 주고 싶어요.”(브장)
지난 6일 서울 마포구의 출판사 ‘교양인’ 사무실에서 만화 ‘나, 여기 있어요(2020)‘를 쓰고 그린 두 작가를 만났다. 스토리와 그림 작가 브장(필명, 28)과 그림 작가 디담(필명, 36)이 그 주인공이다. 두 작가는 만화계에서 성폭력 근절 운동을 하다 만나 함께 책을 냈다. 브장 작가는 2014년 만화가 정아무개씨를 강제추행으로 고소해 유죄 판결을 이끌어낸 당사자, ‘만화계 성폭력 생존자’다. 이 책은 브장 작가의 경험을 토대로 한 이야기다. 책은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의 ‘2020 다양성만화 제작 지원사업’에 선정된 뒤 지난해 12월25일 세상에 나왔다.
만화계에서 공론화한 첫 성폭력 사건
힘든 기억을 책으로 내기까지의 과정은 쉽지 않았다. 브장 작가는 “벌써 6년 전 일이다.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작업을 하면서 과거에 대해 회상하게 되면 트라우마처럼 (그때) 생각이 났다. 때론 울면서 작업을 하기도 했다. 디담 작가한테 연락해서 막 질질 짜고 그랬다”며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고 했다.
이 작품은 20살의 주인공 ‘현지’가 겪은 일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만화 작가의 꿈을 갖고 유명 만화가에게 도제식 교육을 받게 된다. 유명 웹툰 작가이자 한국만화가협회 이사이기도 한 40대 남성 정한섭은 사무실에 출근하는 문하생 현지에게 폭언과 폭행, 성추행을 일삼는다. 일을 가르쳐준다며 월급도 제대로 주지 않는다. 현지는 결국 만화가를 강제추행으로 고소해 징역 8개월의 유죄 판결을 이끌어낸다. 등장인물의 이름은 다르지만, 이 일은 브장 작가가 직접 겪은 일이다. 만화·웹툰계에서 공론화된 첫 성폭력 사건이다.
이는 문화예술계 미투 운동이 시작되기 전인 2014년의 일로, 지금보다 성폭력 피해를 공론화하기 더 어려운 환경이었다. 브장 작가는 “성폭력은 개인의 일이라고 생각하던 때였다. ‘피해자가 거짓말한 것일 수 있잖아?’ 이런 말이 보편적으로 오가는 상황이었다. 중간에 협회(한국만화가협회)가 ‘개인적인 일 아니냐’ 이런 식으로 이야기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업계의 낙인과 싸우고, 재판에서 진술하는 등의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었지만 성폭력 피해를 공론화한 것은 만화계에서 의미가 크다. 브장 작가는 “저는 업계에서 상당히 잘 (마무리) 된 사건이다. 가해자가 더는 업계에 돌아오지 않고 가해자 주변인들도 더는 가해자를 보호하지 않는다”며 많은 성폭력 사건이 이조차 이뤄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그는 “이 공론화를 계기로 ‘그때 그 사건이 있었지’ 하면서 비슷한 문제 제기가 나오면 이 사건을 기억한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