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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03월 05일 16시 39분 KST | 업데이트됨 2022년 03월 05일 16시 47분 KST

“매일 먹는 혈압약도, 통장도 모두 두고 나왔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산불 지나간 경북 울진 마을에 남겨진 노인들

마을 곳곳 희뿌연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한겨레
5일 오전 9시30분께 경북 울진군 검성리 마을주민 남분옥(83)씨의 집이 전날 시작된 산불로 새까만 잿더미로 변했다. 박지영 기자

5일 오전 9시20분께, 경북 울진군 북면 검성리 마을로 가는 도로 주변 산은 여전히 빨간 불길이 타오르고, 자욱한 연기가 주변을 휘감았다. 10분 뒤 마을에 들어서자 전날 밤 울진을 휩쓴 산불의 열기가 식지 않은 듯했다. 마을 곳곳 희뿌연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전날 오후 5시께 ‘산불이 빠르게 번지고 있으니 몸만 어서 피하라’는 마을 이장의 대피령을 듣고 작은 배낭 하나만 챙겨 나온 남분옥(83)씨는 혈압약을 챙기러 집을 다시 찾았다. 하지만 집 앞을 30여미터 앞두고 다리가 풀린 채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아이고 우야노…아이고 우야노” 밤사이 화마가 휩쓸고 지나가 까맣게 잿더미로 변한 집을 보고 남씨는 눈물만 흘렸다. 한참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남씨의 집 곳곳은 여전히 자욱한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남씨는 “매일 먹어야 하는 혈압약도, 통장도 소중한 물건들 모두 두고 나왔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고 고개를 떨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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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오전 10시께 경북 울진군 검성리 마을주민 이홍자(87)씨가 화재로 내려앉은 자신의 집을 둘러본 후 황망한 마음으로 발길을 돌리고 있다. 박지영 기자

남씨의 집에서 차로 5분 정도 떨어진 곳에 사는 이홍자(87)씨의 집도 하룻밤 사이 새까만 잿더미로 변해 있었다. 이씨 또한 갑작스런 대피에 휴대폰 하나 들고 정신없이 집을 뛰쳐나왔다고 한다. 생활의 흔적이 모두 사라지고 검게 그을린 슬레이트 지붕만 내려앉은 것을 보고 이씨는 목 놓아 울며 집 주변에서 한참을 떠나지 못했다.

이날 찾은 울진군 북면 검성리 마을은 전날 밤 산불로 전체 52가구 중 절반 이상이 소실됐다고 한다. 검성리 마을이장 박영철(73)씨는 “어제 오전부터 앞산에서 불길이 심하게 번져 연기가 자욱했다. 어제 정오부터 주민들에게 화재 소식을 알렸고, 오후 5시부터 대피령을 내려 일단 주민들이 몸부터 피할 수 있도록 했다”고 말했다. 박씨와 검성리 마을 주민들은 “산 인근 집들이 큰 피해를 본 것 같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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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오전 10시께 경북 울진군 검성리 마을주민 이홍자(87)씨가 화재로 내려앉은 자신의 집을 바라보고 있다. 박지영 기자

검성리 마을 주민 장옥선(81)씨의 집도 불길을 피하지 못했다. 거동이 불편해 보행 보조기구와 손가방 하나만 들고 대피한 장씨는 힘없이 내려앉은 지붕 밑으로 혹여나 온전하게 남아 있는 물건은 없는지 찾느라 까맣게 타버린 잿더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장씨는 검게 그을린 장독대를 가리켰다. “이 된장 아까워서 우야노” 장독대 바로 옆 불에 타 버린 세탁기는 장씨의 딸이 며칠 전 새로 사줬다고 한다. 장씨는 “이 세탁기도 우리 딸이 사줘서 한 번밖에 안 쓴 건데…저 안에 새로 산 신발도 있는데…” 그는 자꾸만 흐르는 눈물을 손수건으로 연신 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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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오전 10시40분께 경북 울진군 검성리 마을주민 장옥선(81)씨가 화재로 내려앉은 자신의 집을 바라보고 있다. 박지영 기자

하루 사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집을 보고 황망해 하는 장씨를 이웃주민 부부 김운하(66)씨와 최경숙(57)씨가 끌어안았다. 김씨와 최씨의 집도 산불에 모두 소실됐다. 김씨는 장씨를 부둥켜안고 “괜찮아요 아지매. 우리 건강하기만 하면 돼. 괜찮아요 아지매”라며 위로했다. 최씨는 자신이 입고 있는 얇은 패딩을 가리키며 “이거 하나 입고 빈몸으로 정신없이 뛰쳐나갔다. 혹시 몰라서 집 주변에 호스로 물을 열심히 뿌리고 나갔는데 이렇게 새까맣게 집이 전부 타버렸다. 지금 전기도 없고 물도 안 나오고… 여기선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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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오전 11시께 경북 울진군 검성리 마을주민 최경숙(57)씨가 화재로 내려앉은 자신의 집 부엌을 둘러보고 있다. 박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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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오전 10시40분께 경북 울진군 검성리 마을주민 장옥선(81)씨가 화재로 내려앉은 자신의 집을 바라보고 있다. 박지영 기자

박지영 기자 jyp@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