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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 비판 금기'였던 태국에서 반정부 시위가 한 달째 열리고 있다 (사진)

현 왕은 즉위 후 잇단 스캔들을 일으키고 있다.

‘부처의 현신’이라는 평가까지 받던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라마 9세)이 사망한 지 4년 만에 타이(태국)에서 왕실개혁 요구가 터져나왔다. 푸미폰 왕의 아들로 2016년 취임한 마하 와찌랄롱꼰 왕(68·라마 10세)이 여성 편력과 사치스러운 생활 등을 일삼아 왕실에 대한 불만이 누적된 탓이다.

왕실에 대한 비판을 법률로 금지할 정도로 왕실의 권위와 힘이 막강한 타이 사회에서 왕실 비판이 제기되며 긴장이 높아지고 있다.

18일 방콕 마히돌대학교에서 열린 야간 반정부집회에 참가한 학생들.
18일 방콕 마히돌대학교에서 열린 야간 반정부집회에 참가한 학생들. ⓒLauren DeCicca via Getty Images

오랫동안 태국에서 왕실 비판은 ‘금기’였다

지난 10일(현지시각) 오후 타이의 수도 방콕의 명문대 탐마삿대에서 대학생과 고교생 3천~4천명이 모인 가운데 집회가 열렸다. 한달 여 전부터 계속된 반정부 집회의 일환이었다. 정부 실정을 비판하고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를 이어가던 집회 말미, 타이 사회에 큰 충격을 던지는 주장이 제기됐다.

‘탐마삿 연합전선’이라는 이름으로 왕실 개혁을 촉구하는 10가지 요구 사항이 발표된 것이다. 내용도 내용이었지만, 왕실을 전면적으로 공개 비판했다는 점에서 파장이 컸다.

국제위기그룹(ICG)의 매튜 윌러 선임 연구원은 이를 두고 “(시위가) 루비콘 강을 건넜다”고 표현했다. 타이 진보 매체 <쁘라차타이>(자유민중)에 실린 시위대의 10가지 요구 사항은 다음과 같다.

16일 방콕 민주기념탑 근처에서 열린 집회에서 한 참가자가 손가락 세 개를 펴 저항의 뜻을 표하고 있다. 영화 '헝거 게임'에서 따온 것이다.
16일 방콕 민주기념탑 근처에서 열린 집회에서 한 참가자가 손가락 세 개를 펴 저항의 뜻을 표하고 있다. 영화 '헝거 게임'에서 따온 것이다. ⓒSOPA Images via Getty Images
18일 집회에서 손가락 세 개를 들어보이는 참가자.
18일 집회에서 손가락 세 개를 들어보이는 참가자. ⓒLauren DeCicca via Getty Images

태국 반정부 시위대의 10가지 요구

① 왕을 고소하지 못하도록 한 ‘헌법 6조’를 폐지하고 왕의 잘못을 국회가 조사할 수 있게 한다.

② 왕을 비판하면 3년~15년형에 처하는 ‘형법 112조’를 폐지해 군주제에 대한 비판을 허용하고 기소된 이들을 사면한다.

③ 2018년 개정된 ‘왕실재산법’을 폐지해, 왕실 재산과 왕 개인 재산을 분리한다.

④ 국가의 경제 여건에 맞춰 왕실에 대한 국비 배정액을 삭감한다.

⑤ 왕실 사무국을 해체한다. 왕실 보안사령부를 이전하고, 추밀원은 폐지한다.

⑥ 왕실 자선기금에 의한 기부와 수령을 중단하고, 모든 왕실 재산을 감사한다.

⑦ 정치적 견해를 밝히는 왕실의 활동을 중단한다.

⑧ 군주제를 미화하는 홍보와 교육을 중단한다.

⑨ 군주제를 비판했거나 왕실과 관련돼 사망한 사건을 조사한다.

⑩ 왕은 더이상 쿠데타를 지지하지 않는다.

현실 정치에 관여하는 왕의 정치적 행위와 불투명한 재산 관리,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특권까지, 타이 왕실의 모순을 하나하나 열거하면서 헌법과 형법, 왕실재산법은 물론이고 왕실 관련 행정 기구와 관행까지 모두 바꾸길 요구했다. 사실상 타이 왕의 힘을 상징적인 수준으로 되돌리라는 요구였다.

이들은 “왕이 정치 위에 있지 않다는 것을 국민들이 알아야 한다”며 “이것이 (타이의) 정치 문제의 근원이 돼 왔다”고 주장했다. 타이 왕이 쿠데타를 합법적으로 승인해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국가 재산을 개인 소유로 이관해 왕실의 이익만 추구하는 것을 비판했다.

또 헌법을 고쳐 왕이 섭정을 두지 않고도 국외에 머물 수 있도록 한 것도 국가원수로서 의무를 소홀히 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쿠데타 승인을 제외하고 모두 현재 왕인 와찌랄롱꼰 왕이 왕권 강화의 일환으로 취한 것들이다.

이들은 주장의 민감성을 의식해 “군주제를 폐지하자는 게 아니라, 개혁하자는 것”이라고 한발 물러섰지만, 기득권층과 왕당파들은 사법 당국의 수사를 촉구하는 등 강력하게 반발했다.

16일 방콕 민주기념탑 근처에서 열린 집회 현장
16일 방콕 민주기념탑 근처에서 열린 집회 현장 ⓒLauren DeCicca via Getty Images

권위 높인 푸미폰, 아들 와찌랄롱꼰은 각종 스캔들

푸미폰 왕은 19살 때인 1946년 왕에 취임해 2016년 사망할 때까지 70년간 타이 왕으로 재임하며, 능수능란한 정치력으로 왕실의 권위를 높였다. 그가 왕에 취임하기 14년 전인 1932년 타이는 절대왕정이 무너지고 입헌군주제로 전환돼 혼란이 이어졌지만, 푸미폰은 재임중 이뤄진 19차례 쿠데타를 때로는 승인하고, 때로는 거부하면서 왕실의 정치력을 높였다. 또 직접 농촌 마을을 돌면서 농촌 개혁을 주도해 국민의 존경을 얻었다.

푸미폰 왕은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절제된 사생활로 왕실에 대한 불필요한 공격은 최소화시켰다. 반면 그의 아들로 2016년 12월 왕위에 오른 와찌랄롱꼰 왕은 복잡한 사생활과 사치스러운 행보, 외국 생활 등으로 왕실의 권위를 깎아먹었다.

현 왕실을 지지하는 이들 역시 맞불 시위를 열고 있다. 16일 방콕에서 열린 친왕실집회 참가자가 왕과 왕비의 사진을 들고 있는 모습.
현 왕실을 지지하는 이들 역시 맞불 시위를 열고 있다. 16일 방콕에서 열린 친왕실집회 참가자가 왕과 왕비의 사진을 들고 있는 모습. ⓒMLADEN ANTONOV via Getty Images

와찌랄롱꼰 왕은 정식 이혼만 3번 했고, 후궁을 두기도 했다. 셋째 부인이 반라 상태로 왕의 애완견 생일 파티에서 참가한 영상이 인터넷에 노출되는가 하면, 와찌랄롱꼰 왕이 독일에서 정체 불명의 여성과 쇼핑을 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이 나돌기도 했다. 과거였으면 알려지지 않았거나 뜬소문 정도로 그쳤을 사건이 대중에게 노출됐고, 타이 왕실의 권위는 낮아졌다.

특히 지난 3월 와찌랄롱꼰 왕이 코로나19를 피해 여성 20여명을 데리고 독일의 한 호텔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이 독일 언론 <빌트>에 보도되면서 파문이 일었다. 당시 타이 온라인에는 ‘왜 우리에게 국왕이 필요한가’(#why do we need a king)라는 해시태그 달기 운동이 전개돼 100만번 이상 공유됐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만들어진 군주제 반대 그룹에 수십만명이 가입하기도 했다.

 

예순이 넘은 나이에 왕위에 오른 그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벌인 행동도 반발을 불렀다. 국왕의 일시적인 부재시 섭정자를 지명하지 않아도 되는 규정을 헌법에 추가해, 수시로 독일 등 외국에 머물렀고, 2017년에는 ‘왕실 자산구조법’ 제정을 통해 그동안 타이 정부가 형식적으로나마 관리해 온 왕실 자산을 국왕이 직접 관할하고 처분할 수 있도록 했다. 타이 왕실 재산이 구체적으로 공개된 적은 없지만, 미국 경제매체 <비즈니스 인사이더>는 2018년 300억달러(33조4800억원)로 추산했다.

16일 반정부집회에는 1만명 정도가 참가했다.
16일 반정부집회에는 1만명 정도가 참가했다. ⓒJonas Gratzer via Getty Images

탄압의 빌미 될까 우려, 왕실 지지자들도 시위 나서

왕실에 대한 전면적인 비판에 타이 당국도 당황하고 있다. 비판을 방치하면 비판 여론이 더욱 높아질 수 있고, 강하게 억압할 경우 반발을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영국 <가디언>은 “왕실에 대한 이런 공개적인 비판은 매우 이례적인 일로, 타이 정부를 곤경에 빠뜨렸다. 전문가들은 왕실에 대한 비판을 허용하면 권력을 유지하는 현 체제가 훼손되고, 학생들을 엄중히 단속하면 더 큰 시위가 촉발돼, 군주제에 대한 반발이 커질 수 있다”고 전했다.

타이 사회의 어두운 기억인 1976년 ‘탐마삿대 학살’도 다시 소환되고 있다. 그해 타이 경찰과 군인들은 왕실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탐마삿대 학생들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타이 정부는 46명이 숨졌다고 공식 발표했지만, 비공식적으로 사망자가 100명 이상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당시 타이에선 1973년 민중봉기로 사퇴한 타놈 키티카촌 전 총리의 복귀 문제를 두고 정국의 혼란이 계속되던 시기였다.

시위대도 조심스러워 하는 모양새다. 지난달 시작된 이래 최대 규모로 열린 16일 집회에서 시위대는 왕실에 대해 추상적으로 비판하는 데 그쳤다. 민주진영 교수와 학자 100여명이 학생들의 왕실 개혁 요구가 정당하다고 옹호하고 나섰지만, 왕실 문제를 거론함으로써 공연히 정부 당국에 탄압의 빌미를 줄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이날 왕실 지지자들과 정부 지지자들도 왕과 왕비의 사진을 들고 엄호 시위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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