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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프 인터뷰] 웹툰 '며느라기' 후속작 '곤' 수신지 작가는 "낙태한 여성이 모두 처벌받는 세상을 바라냐"고 묻는다

수신지 작가는 "'낙태죄는 생명을 보호하는 법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 이인혜
  • 입력 2020.10.25 10:23
  • 수정 2020.10.26 15:48
지난 21일 만난 수신지 작가. 사진 촬영을 사양한 대신 웹툰 '곤'을 작업하는 모습을 공개했다.
지난 21일 만난 수신지 작가. 사진 촬영을 사양한 대신 웹툰 '곤'을 작업하는 모습을 공개했다. ⓒHUFFPOST KOREA / INHYE LEE

“낙태한 여성이 모두 감옥에 가는, 그런 세상을 정말 원하는 걸까요?” 지난 21일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한 카페에서 만난 수신지 작가가 한 말이다. 수신지 작가는 가부장제의 부당함을 그린 웹툰 ‘며느라기’로 2017년 ‘오늘의 우리 만화상‘과 2018년 ‘올해의 성평등 문화상‘을 수상했다. 웹툰 ‘곤(GONE)’은 그가 내놓은 ‘며느라기’ 후속작이다. ‘곤’은 ‘낙태(임신중단)’를 한 번이라도 한 여성은 모두 감옥에 가는 ‘가상의 대한민국’을 그렸다. 

 

곤(GONE): 여성들이 사라진(GONE) 세상  

절묘하게도 수신지 작가가 웹툰 ‘곤’을 완결하기 직전, 정부는 ‘낙태죄’ 존치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 지난 11일 완결한 웹툰 ‘곤’은 낙태죄가 헌법에 명시된 1953년부터 ‘낙태(임신중단)’를 단 한 번이라도 한 여성은 모두 감옥에 간다는 ‘가상의 대한민국’을 배경으로 삼는다. 웹툰 속 대한민국은 “생명 경시 풍조”를 이유로 여성들을 적극 처벌하는데, 작가가 가까운 미래를 예측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의미심장한 설정이다.

정부의 입법예고로 사문화된 ‘낙태죄‘가 부활하리란 우려가 나오면서 웹툰을 향한 관심도 덩달아 높아졌지만, 당사자인 수신지 작가는 당혹스러움을 느낀다고 했다. 그가 지난해 5월 웹툰을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이미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이 나온 상태여서 “어차피 ‘낙태죄’는 폐지될 텐데 굳이 왜 이런 만화를 만들어서 분란을 만드냐”는 부정적인 반응이 많았기 때문이다.  

“잘 되어가는 상황에서 제가 초를 치는 건가? 생각도 했어요. 하지만 법 개정이 된 건 아니니,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하는 마음으로 계속 그렸는데, 이런 결과가 나와서 굉장히 당황스럽네요.”

작가도 낙태죄를 처음부터 잘 알지는 못했다. 해당 이슈를 다룬 방송을 접한 뒤에야 생각보다 훨씬 더 의도가 있고 불합리한 법이라는 걸 알았고, 자신처럼 막연하게 알고 있는 이들에게 ‘낙태죄’의 실체를 조금이라도 쉽게, 널리 알리고 싶었다.

“그동안 ‘낙태’ 관련법은 있었지만 실제로 처벌받는 경우는 드물어서 ‘낙태죄’의 심각성을 잘 모르지 않나 싶었어요. 그래서 낙태죄 처벌이 ‘제대로’ 작동된다면 세상이 어떻게 될까. 그게 정말 사람들이 원하는 세상일까? 생각했고, 그걸 좀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위해 손만 넣으면 5초 만에 과거 낙태 여부가 판별되는 ‘IAT검사 키트’가 개발됐다는 설정을 만들었어요.”

 

낙태한 여성이 모두 감옥에 간다면 

낙태한 여성은 모두 감옥에 가야 하는 세상을 그린 웹툰 '곤'
낙태한 여성은 모두 감옥에 가야 하는 세상을 그린 웹툰 '곤' ⓒ수신지 작가 제공

 

웹툰 ‘곤’은 ‘낙태죄’를 키워드로 여성의 임신·출산·육아는 물론 가부장제, 육아휴직, 남아선호 같은 굵직한 젠더 이슈를 다룬다. 극중 노씨 집안 첫째 딸 노민형은 시험관 시술로 어렵게 얻은 아들 윤이를 친정엄마에게 맡기는 워킹맘이다. 둘째 딸 노민아는 계획에 없던 임신으로 경력단절을 걱정하고, 셋째 아들 노민태는 여자친구 나샛별이 ‘불법 낙태’를 할 만한 병원을 알아본다.

정부의 ‘낙태죄 처벌’ 발표는 이들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놓는다. 과거 산아제한 정책으로 낙태를 장려했던, 이른바 ‘낙태버스’에서 여아를 지운 경험이 있는 노씨 집안 3남매 엄마도 예외는 아니다. 그는 ‘둘만 낳아 잘 기르자‘며 정부가 임신중단을 장려하던 시절 임신중단을 했는데, 수십년이 지난 후에야 당시 경험 때문에 감옥에 갈 처지가 된 것이다. 한때는 ‘애국’이던 임신중단이 ‘죄’가 된 모순. 엄마는 이렇게 말한다. “옛날에는 그게 흔한 일이었어. 흉도 아니었다니까.” 여성의 재생산권을 통제하려는 국가의 이중성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다. 

노씨 집안 3남매의 엄마가 감옥에 갈 처지에 놓이면서, 노민형은 아이를 어디에 맡겨야 할 지 고민하며 남편의 육아휴직을 재촉한다. 나샛별은 감옥에 갈 미래를 걱정하며 가족에게도 말 못 할 아픔으로 홀로 눈물짓는데 공교롭게도 샛별의 엄마 역시 과거 임신중단 경험으로 인해 감옥에 가야 할 상황에 놓였다.

 

‘낙태(임신중단)’한다고 반드시 죄책감 느낄까?  

과거 '임신중단'에 죄책감을 느끼는 엄마들(왼쪽), 죄책감과는 거리가 먼 노민태.
과거 '임신중단'에 죄책감을 느끼는 엄마들(왼쪽), 죄책감과는 거리가 먼 노민태. ⓒ수신지 작가 제공

 

‘곤’에 나오는 흥미로운 설정이 여럿 등장하지만, 유독 눈에 띄는 건 ‘낙태’와 죄책감의 연관성에 의문을 가지는 설정이다. 웹툰에서 ‘낙태’ 경험을 판별하는 키트, 즉 ‘IAT 키트’는 오류가 속출하는데, 피검인의 죄책감 유무가 오류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으로 지목된다. “피검인에게 죄책감이 있다면 ‘낙태’ 경험이 있다는 판정을, 죄책감이 없다면 경험이 없다는 판정을 받는다”는 검사원들의 폭로가 이어지고, ‘낙태’ 키트가 사실상 거짓말탐지기와 유사한 ‘죄책감탐지기’라는 문제제기가 나오고야 키트검사는 폐지된다. 작가는 어떤 생각으로 이 이야기를 구상했을까? 

“‘낙태‘를 하면 당연히 죄책감을 가질 것이라는 인식에 의구심이 들었어요. 낙태를 하고 난 뒤에 몰려오는 죄책감과 안도감, 그리고 자신이 안도한다는 사실에 대한 또 다른 죄책감. 이런 복잡한 감정은 ‘낙태’가 ‘불법’이기 때문에 생기는 건 아닐까요? 만약 ‘낙태’ 수술을 받는 여성도 출산하는 산모와 비슷한 (의료)서비스를 받는다면 그렇게까지 죄책감을 느낄까요?” 

‘낙태’를 의료서비스로 접근해야 한다는 관점은 오래 전부터 있었다.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는 여성만 요구하는 의료서비스를 범죄시하는 것을 여성에 대한 차별로 보며, 2018년 한국 정부에 낙태죄 전면 폐지뿐 아니라 안전하고 접근 가능한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도록 권고한 바 있다.  

생각해보니 희한하네. 벌은 여자가 받고 성(姓)은 남자가 받고?

 

현실에서 임신중단은 오직 여성에게만 책임을 묻는다. 웹툰이라고 다를 건 없다. 웹툰 속 노민태는 여자친구가 중절수술을 받은 날 ‘색색버거‘를 먹으러 가자고 하고, 노씨 3남매의 아버지는 감옥에 갈 부인을 걱정하긴커녕 이제 밥은 누가 차려주냐고 한탄한다. 철없고 이기적인 이들의 모습에 많은 독자가 공분했다. 수신지 작가는 “임신이 내 몸과 삶에서 직접 일어나는 ‘내 일’이 아니어서 느낄 수 밖에 없는 한계”를 표현하려고 남성 캐릭터들을 다소 극단적으로 설정했다고 밝혔다.  

노민태, 제갈경, 노씨 아버지. 독자들의 비난을 한몸에 받은 남성캐릭터들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언행을 했을까? 이들이 실제로 살아 있었다면 어떤 해명을 내놨을까? 궁금한 독자들을 위해 준비했다. 이른바 ‘남성캐릭터 3인방의 미니인터뷰’다. 웹툰에서는 표현되지 않은 남성캐릭터들의 속마음을 가상인터뷰로 들어봤다. 속마음을 대신 전해준 사람은 다름 아닌 그들의 창조주, 수신지 작가다.

중절수술을 받은 여자친구에게 햄버거를 먹으러 가자는 노민태의 속마음

“여자친구가 좋아하는 음식이었어고, 제 입장에서는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해요. 병원도 알아봤고, 돈도 부담했고요.”

 ▲부인 노민아에게 “‘낙태’하면 그 병원 내가 신고할 거야”라고 말한 제갈경의 속마음

“신고한다는 말은 그냥 겁주려고 했을 뿐이에요. 제가 그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그런 말은 하지 말 걸...후회스러워요.”   

부인이 감옥에 갈 처지에 놓여도 밥 걱정만 하는 노씨3남매 아버지의 속마음

“예전엔 나라에서 ‘낙태버스’를 운영할 정도로 ‘낙태’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는데, 갑자기 처벌한다는 게 이상하긴 하지. 그런데...이제 밥 해줄 사람이 없는 건 좀 억울하네.” (밥해줄 사람이 없다니? 수신지 작가는 “극 중 엄마의 제안으로 노씨 집안 부모도 ‘졸혼’한 결말”이라고 설명했다.) 

부인 노민아를 협박하는 제갈경 (왼쪽), 아내 노민형을 불신하는 남편
부인 노민아를 협박하는 제갈경 (왼쪽), 아내 노민형을 불신하는 남편 ⓒ수신지 작가 제공
불법 '낙태' 알아보는 민태, 민태 부친.
불법 '낙태' 알아보는 민태, 민태 부친. ⓒ수신지 작가 제공

 

웹툰이 끝난 후 그들의 삶은 어떨까?  

'이제 언니만 남았네?' 수신지 작가에 따르면 이는 극중 엄마의 '졸혼'을 암시하는 대사였다 (왼쪽), 극 중 둘째 아이를 계획하는 노민형 모습
"이제 언니만 남았네?" 수신지 작가에 따르면 이는 극중 엄마의 '졸혼'을 암시하는 대사였다 (왼쪽), 극 중 둘째 아이를 계획하는 노민형 모습 ⓒ수신지 작가 제공

 

웹툰 ‘곤’은 끝났다. 일종의 ‘열린 결말’이었다. ‘곤’의 애독자라면 궁금할 법하다. 주인공들은 웹툰이 끝난 후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이번에도 수신지 작가를 통해 그들의 ‘현생’을 들어보았다.

우선, 노민아는 제갈량과 갈라선 뒤, 강아지 ‘노랑이’와 씩씩하게 잘 산다. 자신의 성 ‘노’씨를 강아지에게 물려준 것이다. 언니 노민형의 삶은 다소 현실적이다. 그는 둘째를 계획 중이며, “아기가 생기면 돌보겠다”는 남편의 말을 철썩같이 믿지만, 알다시피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육아휴직도 안 쓰는 남편이 육아는 무슨. 아마 둘째도 친정엄마가 키우게 될 것이라는 게 작가의 귀띔이다.

“민형아. 둘째도 엄마가 봐 줄테니까 직장 그만 두지 말고 잘 다녀” - 엄마 

 

수신지 작가가 “가장 애정을 쏟았던” 나샛별은 노민태와 헤어진 후 ‘낙태죄’가 없는 캐나다로 어학연수를 다녀와 아나운서가 됐다. 수신지 작가는 나샛별의 근황을 이렇게 전했다. “여성 인권에 관심 많은 아나운서로 잘 활동하고 있습니다.” 

“(임신 중단 여성을 처벌하지 않은 캐나다에서 지내면서) 임신 중지를 ‘국가가 처벌할 일’이 맞는지 의문을 갖지 않았던 저의 한계를 깨달았습니다.” -아나운서 면접에서 나샛별이 한 말

 

현실에서도 나샛별처럼 여성 인권을 위해 싸우는 이들이 있다. 작가는 그런 모습에서 희망을 보지만 “아직 멀었다”고 말한다. “더 많은 여성들의 목소리가 나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낙태죄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좋겠어요.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법으로 낙태죄가 과연 효과적인 걸까? 생각해봤으면 좋겠어요.” 

나샛별의 “왜 어떤 임신 중지는 죄가 맞다고 생각했을까요? (중략) 여러분. 함께 지켜봅시다”는 말처럼 현실 속 우리도 멈추지 않고 끝까지 지켜봐야 할 시점이다.

 

이인혜 에디터 : inhye.lee@huffpos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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