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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평등자문위는 무용지물? 정부의 낙태죄 관련 입법안에는 임신중지 당사자인 여성들의 현실이 반영되지 않았다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보장하라는 권고를 냈지만 정반대의 개정안이 나왔다.”

유니브페미, 전국생행진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15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열린 청소년·청년 페미니스트 100인 선언 '낙태 처벌의 세대-시대는 끝났다'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낙태죄 존치, 낙태 시 숙려기간 의무화, 낙태 거부권 행사 가능 등 내용의 정부입법 예고안을 규탄하는 발언을 하고 있다.
유니브페미, 전국생행진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15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열린 청소년·청년 페미니스트 100인 선언 '낙태 처벌의 세대-시대는 끝났다'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낙태죄 존치, 낙태 시 숙려기간 의무화, 낙태 거부권 행사 가능 등 내용의 정부입법 예고안을 규탄하는 발언을 하고 있다. ⓒ뉴스1

 

정부가 낙태죄 관련 입법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임신중지 당사자인 여성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절차를 제대로 진행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나온다. 국무조정실이 여성계의 면담 요청을 거절하고 법무부가 양성평등정책위원회의 권고와 반대되는 형법 개정안을 낸 데 이어, 보건복지부도 정책자문기구인 성평등자문위원회의 권고와 반대되는 개정안을 내놓은 것으로 확인됐다. 특히 여성계에서는 이런 태도가 “갈등 기간을 최소화하라”는 국무조정실의 지침과 무관하지 않다는 해석이 나온다.

 

성평등자문위 무용지물 만든 복지부

26일 <한겨레>가 입수한 복지부의 ‘인공임신중절 관련 모자보건법 개선 입법 방안’ 문서를 보면, 복지부 출산정책과는 입법예고안을 논의하면서 “9월28일 (복지부) 성평등자문위원회의 ‘안전한 임신중지 의료서비스 방안’에 대해 의견을 수렴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당시 회의에 참석한 복수의 위원 및 전문가들은 “복지부가 법안을 공개하지 않은 채 원론적 이야기만 반복했다”며 “의견수렴 절차를 거쳤다고 보기 어렵다”고 입을 모았다. 자문위원 ㄱ씨는 “자문위가 지난달 7일 임신중지와 관련한 보건의료 정책을 논의하자고 요청했는데 20여일 만에 열린 회의에서 ‘형법 개정 방향이 안 나와 모자보건법 개정안에 대해 말하기 어렵다’는 말만 들었다”고 했다. 전문가 ㄴ씨도 “논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당사자인 여성의 목소리가 반영되는 기회는 없고 절차가 비밀스럽게 진행됐다”고 지적했다.

복지부 출산정책과가 작성한 <인공임신중절 관련 모자보건법 개선입법 방안></div>
복지부 출산정책과가 작성한 <인공임신중절 관련 모자보건법 개선입법 방안> ⓒ한겨레 

 

입법예고를 불과 1주일여 앞두고 열린 자문위 회의에서 모자보건법 개정안 초안이 준비되지 않았다고 한 복지부 쪽 설명도 납득하기 어렵다는 주장이 나온다. 정부가 마련한 형법 및 모자보건법 개정안의 틀은 이미 지난 8월 국무조정실 주재로 법무부, 복지부 등 5개 부처가 참여해 열린 차관회의에서 사실상 정해진 상태였다. 당시 국무조정실 회의 자료를 보면, 국무조정실은 임신중지를 “태아 살해행위”로 규정하고 “(형법과 모자보건법의) 이원화 체계 및 형사처벌을 유지하고, 사회·경제적 사유 및 상담·숙려기간을 도입한다”고 잠정 결론 냈다.

또 “종교·여성계 반발은 문화체육관광부·여성가족부에서 주도적으로 완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형법과 모자보건법 개정안 입법예고 시기를 맞춰 갈등 기간을 최소화한다” “부처 간 원보이스(한목소리)를 유지한다”는 지침도 명시됐다. ㄱ씨는 “자문위에서 ‘처벌이 아니라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건강권을 보장하고 의무상담을 지양하라’는 권고를 냈지만 정반대의 개정안이 나왔다”고 비판했다.

국무조정실이 지난 8월 27일 정부서울청사에서 5개 부처 차관회의를 개최하면서 정리한 <낙태죄 헌법불합치 후속조치 아젠다 점검회의 진행참고자료></div>
국무조정실이 지난 8월 27일 정부서울청사에서 5개 부처 차관회의를 개최하면서 정리한 <낙태죄 헌법불합치 후속조치 아젠다 점검회의 진행참고자료> ⓒ한겨레
국무조정실이 지난 8월 27일 정부서울청사에서 5개 부처 차관회의를 개최하면서 정리한 <낙태죄 헌법불합치 후속조치 아젠다 점검회의 진행참고자료></div>
국무조정실이 지난 8월 27일 정부서울청사에서 5개 부처 차관회의를 개최하면서 정리한 <낙태죄 헌법불합치 후속조치 아젠다 점검회의 진행참고자료> ⓒ한겨레

 

여성이 겪는 현실 반영 못한 처벌 조항

정부의 일방통행식 입법 추진은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해 유지된 낙태죄 관련 처벌 조항에서도 드러난다는 지적이 나온다. 처벌 조항 때문에 안전하지 않은 환경에서 임신중지를 해야 하는 여성들의 경험이 법 개정안을 만드는 과정에서 고려되지 못했다는 얘기다.

권인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복지부와 법무부, 대법원으로부터 받은 ‘인공임신중절 현황 및 낙태죄 관련 처벌 현황’을 보면, 최근 10년간(2010∼2019년) 낙태죄 기소는 연평균 9.4건에 불과했다. 2017년 기준 임신중절이 4만9764건(한국보건사회연구원 조사) 이뤄졌고 그해 합법적 사유의 중절이 4113건(8.3%)에 불과했다는 것을 고려하면, 기소로 이어진 경우는 미미한 수준이다.

검찰의 낙태죄 기소율도 전체 고발 건수의 19.6%뿐인데, 이마저도 2019년 이후 고발된 44건은 모두 불기소 처리됐다. 불법 임신중절 수술을 한 의사를 의료법상 ‘비도덕적 의료행위’를 한 것으로 규정하고, 해당 의사의 자격을 한달간 정지하는 행정처분도 2018년 2월 이후 단 1건도 적용되지 않았다.

최근 10년간 낙태죄 위반 처분 현황
최근 10년간 낙태죄 위반 처분 현황 ⓒ한겨레

 

이에 권인숙 의원은 “처벌조항은 임신중지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법수술을 강요하는 상황을 만든다”며 “사문화된 낙태죄를 부활시키는 대신 여성의 재생산권 보장을 위한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도 보고서에서 “인공 임신중절을 강력하게 규제하는 국가와 반대로 합법적인 국가 사이에 중절 비율의 차이는 크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 합법화로 인해 증가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학계 의견”이라며 “불법으로 수술을 받는 경우 음성적으로 행해지기 때문에 여성이 안전하지 못한 환경에 노출될 위험이 있고, 여성의 생명권 및 건강권이 위협받는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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