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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5월 13일 18시 43분 KST

'택시운전사' 김사복씨 큰 아들 "진짜 아버지 알리고 싶어"

한겨레
지난 9일 오후 서울의 한 카페에서 영화 <택시운전사>의 주인공 ’만섭’의 실존 인물인 김사복씨의 아들 김승필씨와 만났다. 김씨가 아버지 김사복씨의 생전 모습이 담긴 사진을 들고 있다. 왼쪽 사진은 1975년 ‘재야의 대부’ 함석헌 선생과 김사복씨가 함께 찍은 사진이다. 김사복씨는 택시 운전을 하며 알게 된 외신 기자들에게서 국내 재야 인사들을 소개받았다고 한다. 오른쪽은 1973년 한 독일 기자가 김사복씨의 택시 앞에서 찍은 사진이다.

1980년 광주에서 ‘5·18 민주화운동’을 취재한 ‘푸른 눈의 목격자’ 독일 공영방송연합(ARD)의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는 2003년 청암언론문화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주는 제2회 송건호언론상을 받으며 “용감한 택시기사 김사복씨에게 감사하다. 그를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힌츠페터 기자는 끝내 그를 다시 만나지 못하고 지난 2016년 숨을 거뒀다.

잊혀진 듯 했던 김사복씨의 존재는 지난해 영화 <택시운전사>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김사복씨도 이미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난 뒤였다. 그러나 그들이 기록한 영상은 남았다. 김사복씨의 도움으로 광주에 간 힌츠페터 기자가 촬영한 영상은 오는 17일 <5·18 힌츠페터 스토리>라는 다큐멘터리로 개봉된다. <한겨레>는 지난 9일 서울의 한 카페에서 김사복씨의 큰 아들 김승필(59)씨를 만났다.

평범한 사업가로 살아왔던 김씨의 삶은 영화 <택시운전사>가 개봉하면서 달라지기 시작했다. 외롭게 숨을 거둔 아버지의 삶을 알릴 기회라는 생각에, 밀려드는 인터뷰 요청 등을 거절하지 않으면서다. 김씨는 처음 영화를 본 뒤 “기쁨과 아쉬움이 교차했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민주화에 말없이 기여한 점이 알려진 점은 기뻤죠. 하지만 아버지를 표현한 ‘만섭’이라는 캐릭터는 허구의 인물었습니다. 만섭의 이야기가 아버지의 이야기인 것처럼 알려지면 어쩌나 마음은 불편했죠.”

김승필씨 제공
1975년 10월3일 장준하 선생이 의문사한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 김사복씨(오른쪽 세번째에서 정면을 보는 이)와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김사복씨 왼쪽 안경쓴 이)가 함석헌 선생과 함께 답사를 갔던 모습이다.

김씨가 가장 바로잡고 싶은 사실은 아버지 김사복씨가 1980년 5월 광주로 가게 된 계기다. 영화에서는 ‘만섭’이 택시비 10만원을 벌기 위해 다른 기사의 손님을 가로챈 것으로 묘사되지만, 사실 당시 광주 상황을 알고 있던 김사복씨는 힌츠페터 기자와 ‘동지적 관계’로 움직였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1970년대 초반부터 서울 파레스호텔 택시를 운영하면서 외국인 손님들을 예약제로만 받으셨어요. 우연히 누구를 태우는 일은 없었습니다.”

김씨는 아버지 김사복씨가 주로 독일과 일본 기자들을 자주 태웠던 것으로 기억했다. “이번 다큐멘터리를 준비하면서 각종 자료를 찾아보니 아버지와 힌츠페터 기자는 5·18 민주화운동보다 5년 앞선 1975년께부터 교류가 있었더라고요.” 그는 1975년 10월 아버지 김사복씨가 힌츠페터 기자 등과 함께 찍은 사진을 공개했다. 사진 속에는 함석헌·계훈제 선생 등 당시 민주화운동의 ‘거목’들이 함께 했다. 김사복씨가 당시 ‘민주화의 물결’에 동참했다는 소중한 증거다. 김씨는 “아버지가 장준하 선생이 발행하던 사상계 등을 읽던 모습이 생생하다”고 전했다.

김승필씨 제공
함석헌(왼쪽에서 두 번째 흰 옷을 입은 이), 장준하(맨 앞 안경 쓴 이) 선생 사이로 김사복씨의 모습이 보인다. 1974년 1월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 선서를 한 뒤 재판을 받게 된 장준하 선생을 모시고 김사복씨가 서대문 형무소 재판장에 간 날이다.

김씨는 아버지가 ‘외신기자 전문’이 될 수 있었던 이유도 설명했다. “아버지는 1932년에 태어나 일제시대에 학창시절을 보냈어요. 일본어가 한국어만큼이나 편했던 거죠. 또 공부하는 것을 좋아했던 아버지가 영어책을 들여다 보던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이렇게 외국어 실력을 쌓아 통역 없이 외신 기자들과 직접 대화를 할 수 있었단 것이다.

김씨는 아버지의 죽음이 1980년 광주와 연결된다고 말했다. 간경화를 앓았던 김사복씨가 1980년 광주에 다녀온 뒤 “같은 민족끼리 어찌 이리도 잔인할 수 있느냐”며 통음을 하곤 했다는 것이다. “당시엔 끊었던 술을 다시 마시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웠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 상황을 견딜 수 없었던 것 아닌가 싶어요. 아버지는 1984년에 결국 간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김씨는 영화에 드러나지 않은 아버지의 진짜 모습을 알리고 싶다고 했다. 그에게 아버지는 시대의 아픔을 알리기 위해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 평범하지만 용기있는 시민의 전형이다. 1980년 광주 이후 세상이 조금이라도 나아졌다면, 저마다 최선을 다한 아버지 같은 이들의 덕분이라고 그는 믿는단다. “저희 아버지 말고도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민주화에 기여한 사람들이 많을 겁니다. 그분들의 모습을 찾아 알리는 일을 하는게 남겨진 저의 역할이 아닌가 싶습니다.”

김승필씨 제공
김사복씨가 위르겐 힌츠페터의 카메라를 들고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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