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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5월 09일 10시 40분 KST | 업데이트됨 2018년 05월 09일 10시 40분 KST

투 메니 피플 해브 다이드

huffpost

오는 17일 개봉할 <5·18 힌츠페터 스토리>를 미리 봤다.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을 세계에 알린 독일 방송기자 위르겐 힌츠페터(1937~2016)의 실제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다. 힌츠페터는 지난해 개봉해 1000만명이 본 극영화 <택시운전사>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2003년부터 힌츠페터를 인터뷰한 내용과, 그가 찍은 광주의 영상이 영화의 주를 이룬다. 1980년 독일 제1공영방송(ARD) 도쿄 특파원이던 힌츠페터는 5월20일 광주에 들어가 군인이 민간인을 무차별 가격하는 모습, 병원에 늘어선 민간인 시체 등 참상을 필름에 담는다. 영화 속 인터뷰에서 그는 학살 현장을 목격하면서 ‘방관자의 모멸감’이 밀려왔다고 했다. 하지만 진상을 취재해 세상에 알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모멸감을 눌렀다고 했다.

이틀 뒤 그는 도쿄로 가서 필름을 독일로 보내고 다시 갔다. 진압이라는 명목의 또 다른 학살이 기다리고 있는 광주로. 거기서 ‘진압’ 직후의 전남도청까지 찍었다. 그걸 보며 생각했다. 사명감, 인본주의, 직업정신, 뭐라고 부르든 저렇게 헌신적인 실천을 하고 광주의 진상을 알리는 특종을 했으니 그는 방관자의 죄의식에서 풀려났겠구나. 그런데 아니었다.

그의 부인에 따르면, 그가 중년을 넘기면서 멀쩡한 정신 상태에서 이런 말을 자주 했다. “뒤에 남한 군인들이 와 있어.” 부인이 “없다”고 하면 “갔나 보네”라고 말했다고 부인은 전했다. 학살을 목격한 데서 오는 공포, 모멸감, 죄의식은 결코 쉽게 지워지지 않는 것이구나. 뒤통수를 세게 맞은 것 같았다.

한겨레

극영화인 <택시운전사>와는 당연히 많이 다르다. 힌츠페터를 태우고 간 택시운전사 김사복은 아무것도 모른 채 광주에 엮여든 게 아니라, 70년대 말부터 민주화운동 인사들의 모임에 힌츠페터를 태워다 준 의식 있는 운전사였다. 극영화처럼 뉴스 필름을 빼앗으려고 쫓아오는 보안사 직원도, 보안사 직원을 막기 위해 목숨을 던지며 차량을 충돌시키는 택시기사도 없다. 직접적, 가시적이지 않지만 재현 아닌 실제 영상의 광주 공기에 실린 공포는 더 깊고 무겁다. 그 때문일 거다. 힌츠페터가 다시 광주로 갈 때, 머리털이 쭈뼛 서고 가슴이 뭉클했다.

공교롭게도 이 영화를 본 건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날 오후였다. 그날 저녁 오랜 친구들과 술 마시다가 문득 노벨문학상을 받은 밥 딜런의 노래 가사가 떠올랐다. “얼마나 더 많이 죽어야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걸 그가(우리가) 알까.”(‘블로잉 인 더 윈드’) 경사스러운 날에 왜 이 가사가 떠올랐을까. 최근 몇달 동안 한국전쟁과 관련된 콘텐츠 만드는 일을 하면서 분단과 전쟁을 전후해 사람들이 너무 많이 죽었음을 새삼 실감했기 때문일 거다. 제주4·3사건, 여수·순천 사건, 전쟁 동안의 민간인 학살 사건….

한국전쟁은 2차 세계대전, 베트남전쟁보다 군인 사상자에 비해 민간인 사상자의 비율이 높다. 아직도 ‘종전’이 아닌 ‘정전’ 상태다. 생각해보면 광주민주화운동도 같은 선상에 있다. 그때, 1980년에 남북 사이에 통일까지는 아니어도 평화협정이 맺어지고 활발한 교류가 있었다면, ‘간첩과 좌익용공 분자들의 소행’이라는 누명을 씌우고 군인이 주민들에게 총을 쏘지 못했을 거다.

분단 이후 그 많은 죽음들마다 또 다른 힌츠페터가 있었을 거다. 생존자, 목격자에게 남겨진 모멸감과 죄의식은 헤아릴 수 없을 거다. 며칠 전 한 후배가 페이스북에 ‘한국전쟁, 1950~2018’이라고 쓴 걸 봤다. 그렇게 돼야 한다. 이미 너무 많이 죽었다.

* 한겨레 신문에 게재된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