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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락없는 스킨십’ 거부하자 소개팅남은 징징대기 시작했다

[토요판] 이런, 홀로!?

몇 주 전, 성차별적인 발언을 한 부동산 중개업자 때문에 불쾌했던 이야기를 기고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글에는 “얘, 혜화동은 맨날 어디서 이상한 인간들만 만나서 찡찡거리고 지랄하는 글을 쓰냐”, “니 운명이니 마포대교로 가”라는 댓글이 달렸다. 어쩐지 뻘쭘했다. 더 이상한 인간들로부터 겪었던 더 불쾌한 일은 이거 말고도 더 많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 1, 이야기 2, 이야기 3… 들이 준비돼 있는데. 어쨌거나, 이와 별개로 주변의 여성들과 이야기를 해보니 나는 그들에 비해 비교적 그런 경험을 덜 겪어온 편이었다. 그것이 빈도의 부분이든 정도의 부분이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계속해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적어도 최근 몇 달 동안 한국 사회를 흔들었던 ‘미투 운동’(#me Too)을 보면서 내가, 그리고 우리가 왜 계속해서 ‘찡찡거리’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NicolasMcComber via Getty Images

징징거리던 그 소개팅남

6년 전 겨울, 동네에서 소개팅을 했다. 예상했겠지만 그래, 또 이상한 사람을 만났다. 그 사람이 일 때문에 조금 늦게 오는 동안 주선자인 친구와 술을 마셨고 조금 취했다. 정신 차리고 보니 친구는 자리를 비켜줬고 술집에 그 사람과 나만 앉아 있었다. 여느 소개팅이 그러하듯 첫인상에서 마음이 어느 정도 정해졌고, 따라서 오래 붙잡고 있는 것도 예의가 아닌 거 같아 적당히 집에 갈 각만 재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그 소개팅남이 갑자기 은근슬쩍 터치를 하기 시작했다. 추워하는 나에게 옷을 여며 주겠다며 허락도 없이 몸 가까이 불쑥 손을 내밀어 지퍼를 만지려 들었다. 그러더니 혼자서 술을 좀 마신 후에는 갑자기 옆으로 와 가까이 앉기도 했다. 황당했으나 친구의 지인이었고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으니 그 정도 수준에서 할 수 있는 거절 의사를 표했다. 그럼에도 반복되는 터치에, 이제는 정말 도망갈 때다 생각하며 술집을 나왔다. 따라 나온 그 사람은 갑자기 내 어깨를 감쌌고 나는 몸을 빼며 집으로 가겠다고 말했다. 상황적 맥락이라는 게 없었다. 대체 뭐 때문에 내가 이 스킨십에 동의할 거라 생각한 걸까.

즐거웠고 조심히 들어가시라고 하니, 소개팅남은 갑자기 징징거리기 시작했다. 술 한잔 더 하자, 같이 있자, 어쩌구저쩌구…. 자꾸만 붙잡았다. 최대한 나이스한 거절 방법을 고민했다. 어떤 거절이 진짜 가야만 할 거 같이 보이면서도 친절할까. 죄송하지만 통금 시간이 이미 늦었으며 부모님에게 혼나기 싫으니 지금 가야 한다며 돌아섰다. 그때부터 그 사람은 힘을 이용해 나를 붙잡기 시작했다. 처음 본 사이니 취한 건지 뭔지 황당하기만 해 일단 안 잡히는 택시까지 가까스로 잡아줬다. 뒤돌아 서 가는데 갑자기 쾅 하고 택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그는 택시를 보내고 같이 좀 있자고 버럭 외치며 쫓아왔다. 한번 더 택시를 잡아줬지만 그는 택시를 또 쾅 닫으며 협박에 가까운 징징거림을 시작했다. 큰 덩치에 술까지 먹은 남자가 자꾸 그러니 슬슬 무서워지기 시작해 이건 도망가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냅다 집 방향으로 튀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그 소개팅남은 다행히 쫓아오지는 않고, 뒤에서 “야!” 하며 동네가 떠날 듯이 소리를 질러댔다. 그는 그냥 내 친구의 지극히 평범하고 착실한 지인이었다.

얼마 전 서지현 검사의 폭로 이후, 연극계, 대학교, 정치계, 배우, 문학계 등 곳곳에서 미투 운동이 연일 이어졌다. 아직까지 미투 운동이 안 벌어진 곳이 가장 썩어 문드러진 곳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곳곳에 성폭력이 있다. 미투 운동의 정체성은 일시적인 폭로 이상인 ‘나도 말할 수 있다’를 담고 있다. 함께 공감하고 연대하여 서로의 용기가 되자는 것이다. 한편 미투 운동에서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은 대부분 유명인이었다. 역설적이게도 그가 유명인이었기 때문에 이제껏 쉽사리 말을 할 수도 없었을 것이고, 역설적이게도 그가 유명하기 때문에 이슈가 되고 뒤늦은 사과라도 받을 수 있었다.

미투 운동이 한창이던 때, 친구들과 모이면 연일 고무적인 미투 운동과 성폭력 이야기로 들뜬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늘 몇 가지 어두운 고민이 남았다. 가해자가 유명인이 아닐 경우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또 이 미투 운동이 폭로 이후에 바꾸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 미투 운동으로 일부 유명 인사들이 처벌받는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말조차 할 수 없는 여성들은 그 기억 속에서 계속 침묵해야 한다. 성폭력은 특정 유명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며 그러므로 그들이 잠깐 물러나거나 처벌받는다고 해서 끝날 일이 아니다. 몇몇 유명 인사들의 성폭력 가해 보도를 걷어내면 더 많은 ‘평범한 가해자들’과 더욱 교묘하고 일상적인 성폭력들이 산재해 있다. 직장 내 성폭력, 친족 간 성폭력, 연애 관계에서의 성폭력 등은 목소리조차 낼 수 있긴 한가.

 피해 이야기를 말하고 듣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의 고민이 필요하다. 그러나 현실은 거기까지 가기도 쉽지 않다. 미투 운동의 포문을 열었던 서지현 검사만 해도 지지부진한 사건 조사 탓에 또다른 고통을 받고 있다. 자극적인 언론 보도 탓에 진실 공방으로만 끝나버린 경우도 부지기수다. 미투 운동 이후 논의돼야 할 것들, 이를테면 성폭력 피해자가 바로 피해 사실을 알릴 수 있도록 보호하는 장치, 성폭력 사건을 2차 피해 없이 제대로 해결해 나갈 수 있는 장치와 인식, 근본적인 성폭력 문화(강간 문화)에 대한 논의 없이 그저 자극적인 진실 공방 프레임에서 피해자로서의 여성만 이야기돼왔다.

개인의 문제를 넘어

솔직히 말해, 소개팅남의 이야기는 대부분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살 거라는 사실을 안다. 연애 관계에 대한 기대로 나가는 게 소개팅이고 거기서 나는 술을 마셨고 그는 호감을 표시했을 뿐이라고(어쩌면 ‘남자답게’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어쩌면 딱히 별다른 일도 벌어지지 않았는데 그 정도 일 갖고 유난 떨 거면, 지면으로 옮길 정도면 앞으로 연애는 어떻게 하냐는 질문도 받을 수 있겠다. 이러니 펜스룰이 생긴다는 말을 들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가 내 허락 없이 나를 만졌던 것, 그것은 나의 저항 여부나 저항 정도에 따라 잘잘못이 결정되는 게 아니라는 것, 미디어에서도 종종 보이는 상호가 아닌 자신만의 어떤 목적을 위해 ‘조르는’ 남성의 모습이 문제적이라는 것, 그건 연인 관계여도 마찬가지라는 점, 나에게 소리를 지르고 윽박지르고 완력을 이용하는 것으로 자기 뜻을 관철시킬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그의 태도를 두고 그 개인이 아닌 개인이 발 딛고 있는 바탕을 이야기해야 한다. 문화를 이야기해야 한다. 그라는 이상한 개인 한 사람의 문제라기에는 너무 많은 여성들이 너무 많은 사람들로부터 겪어오지 않았나. 성폭력 문제 해결 과정과 가해자 처벌도 분명 중요하며, 더는 피해자들이 발생하지 않도록 피해자로 존재하는 여성이 아닐 수 있는 사회와 문화로의 변화를 논의해야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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