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배운 성별 고정관념이 훗날 성차별이나 여성혐오 인식에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들이 있습니다. 전문가들이 성평등 교육의 중요성에 주목하는 이유입니다. 허프포스트가 직접 다녀온 인도, 스웨덴, 호주의 성평등 교육 현장 이야기를 4주 동안 전합니다.
쌀쌀하다. 9월 중순의 날씨가 이렇게까지 춥다니. 믿기지 않는다. ‘히트텍을 한국에서 가져왔어야 했어..’ 후회가 몰려오는 순간, 활기차게 모래 놀이를 하는 아이들이 보인다. 한두명이 아니다. 옷을 잘 껴입은 아이들은 춥다고 생각지도 않는 듯, 모래 놀이에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세상에 나쁜 날씨란 없다. 나쁜 옷만 있을 뿐이다’라는 속담이 있는 나라. 우리는 지금 스웨덴에 와있다.
스웨덴의 유치원은 한국과 여러모로 다르다. 일단 ‘유치원’이라고 쓰인 커다란 간판이 없다. 스웨덴어를 잘 모른다면, ‘이곳은 유치원입니다’라고 누군가 알려주지 않는 이상 여기가 뭐 하는 덴지 알 길이 없다. 내세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문화의 나라답다. 소박한 건물의 내부로 들어가면, 1살부터 5살까지 귀여운 아이들이 잔뜩 앉아있는 걸 볼 수 있다. (스웨덴 법률은 부모 동의 없는 미취학 아동의 얼굴 노출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아이들의 귀여움을 여러분과 공유할 길은 없다.)
아이들과 손 인사를 하며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얘는 여자애인가? 남자애인가?’라는 의문이다. 예를 들어, 보라색 바지에 반짝반짝 스팽글이 달린 흰 티를 입은 매우 귀여운 아이가 있었는데 외형만 봐서는 성별 구분이 힘들다.
“우리는 ‘여자아이’, ‘남자아이’라는 단어 자체를 쓰지 않는다. 이곳에는 그냥 ‘아이’와 ‘어른’이 있을 뿐이다.” ‘성중립 유치원’(Gender Neutral Preschool)으로 잘 알려진 이갈리아 유치원의 원장 로따 라얄린의 말이다.
“왜 ‘남자아이’, ‘여자아이’라고 부르지 않는 건가요?”
“이 아이가 ‘남자’라고, ‘여자’라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아이의 무한한 가능성을 한계짓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남자와 여자는 다르지 않나요?”
“저희는 생물학적인 차이를 부정하는 게 아니에요. 아이들이 성별에 갇히지 않고 자신만의 인생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중요시 여길 뿐입니다.”
″취지는 알겠는데, 아직 아이들이 너무 어리지 않나요?”
″아이가 태어난 후의 첫 6~7년은 무언가를 제일 잘 배울 수 있는 시기이기 때문에, 이때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잠시 뒤, 원장 로따가 오히려 우리에게 물었다.
“그런데 아이를 남자와 여자로 꼭 나눠야 하는 이유가 있나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남자와 여자로 나뉜 세상‘은 태어난 직후부터 우리가 수십년 넘게 봐온 모습이다.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성별에 따라 다른 색깔의 옷이 입혀지고, 울음소리도 다르게 해석된다. 보호자, 교육기관, 미디어 등 온갖 통로를 통해 ‘남자와 여자는 서로 다르다’는 메시지를 계속 주입받는다.
몸가짐과 차림새도 달라야 하고, ‘남자가 할 일‘과 ‘여자가 할 일‘이 따로 있음을 의식적/무의식적으로 학습하며 우리는 살아왔다. 지극히 당연한 것 앞에서 ‘그런데 왜 그래야 하지?’라는 의문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이유 없이 ‘여자애‘, ‘남자애’ 나누는 것은 ‘차별’
그러나 스웨덴의 유치원에서는 ‘너무나 당연해 보이는’ 성별 구분이 금지된다. 스웨덴의 아동과 청소년을 보호하는 법에 따르면, 교육학적 목표 없이 여자아이와 남자아이를 나눠 그룹을 만드는 것은 ‘차별 행위’에 속하며 문제가 될 수 있다. 교사가 아이들을 소그룹으로 나눌 때는 교육 전문가의 방침을 따라야 한다.
‘남자아이는 파란색, 여자아이는 핑크색’ 과 같은 표현이나 행위도 일절 안 된다. 한국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행해지는 것들이 스웨덴에서는 ‘차별’에 해당한다니, 다소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공립 유치원인 크리스탈렌 유치원의 원장 안느 샬로떼 카를손은 ”아이들이 성별 고정관념에 휘둘리지 않고 독립적으로 사고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며 ”아이 스스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이 되고 싶은지 ‘선택’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유튜브나 TV를 보고 ‘남자다운 것‘, ‘여자다운 것‘에 대한 고정관념이 생길 수도 있다. 이런 경우에 유치원은 어떻게 할까. 원장 안느는 ”아이들이 유치원에서 그런 말이나 행동을 하면 ‘왜 그렇게 말했는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묻는다”며 ”‘너는 잘못했다’면서 혼내기보다는 질문함으로써 아이 스스로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고 말했다.
알고 보니 스웨덴은 정부 차원에서 “유치원에서부터 성평등 교육을 아주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고 주문하고 있었다. 스웨덴 유치원은 1998년 ‘유치원의 교육과정’에 관한 정부 정책이 발표되면서, 이전까지 단순한 탁아소 기능을 했던 데서 ‘교육기관’으로 정체성이 바뀌었다. 이에 따라 유치원은 학교법에 따라 운영되고 있었고, “놀이 교재부터 다양한 활동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분에서 성평등 교육을 실천해야 한다”는 정부 정책을 따르게 됐다.
“여자아이들과 남자아이들은 어른들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 요구 및 희망 사항 등에 따라 무엇이 여성스럽고 남성스러운 것인지 깨닫는다. 유치원에서는 전통적인 양성 역할이나 패턴에서 탈피해야 한다. 여자아이들과 남자아이들 모두 같은 가능성을 가지고 능력과 흥미를 개발할 수 있어야 한다.”
스웨덴 유치원의 교육 과정에 담긴 내용이다. 성평등 교육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제재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각 유치원은 정부에 관련 보고서를 제출해야 하며 정부의 감독도 받는다.
허프포스트는 유치원을 방문한 다음 날 성평등 장관 오사 린드하겐을 만나 이러한 교육 정책의 이유를 물었다. 그는 “한 개인으로서 우리는 원하는 대로 인생을 살 수 있어야 한다. 성별 때문에 제한받아선 절대 안 된다”며 개개인이 ‘자신만의 최고의 모습’이 될 수 있도록 돕는 게 사회의 책무”라는 설명을 내놓았다. (성평등 장관 인터뷰 기사 보러 가기)
‘감정 다루는 법’을 적극적으로 가르치는 유치원
우리가 방문한 스웨덴의 유치원들에서는 눈길을 잡아끄는 게 또 하나 있었다. 아이들이 ‘감정을 잘 다루는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상당한 신경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아래 6개 인형은 각각 ‘기쁨’, ‘슬픔’, ‘분노’ 등의 감정을 의미한다. 아직 말을 잘 못 하고, 말을 좀 하더라도 표현을 어려워하는 아이들은 인형을 통해 감정 표현을 배우고 있었다. 예를 들어, 긴장되는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아직 모르는 아이들은 자신의 감정과 유사한 표정을 가진 인형을 집어 듦으로써 교사에게 감정 상태를 알린다.
슬프고 화날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럴 때 교사는 ‘위로’의 인형을 등장 시켜 슬프고 화난 인형을 토닥거리는 걸 보여준다. 성인임에도 불구하고 슬픔과 분노의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해 갑자기 폭발하는 이들이 상당히 많은 걸 감안한다면, 스웨덴 유치원은 어릴 때부터 인생의 아주 중요한 부분을 가르치고 있는 셈이다.
“스웨덴에서는 스트레스로 내면이 완전히 무너지는 상황을 ‘벽에 들어간다’는 말로 표현한다. 다른 사람이 벽에 들어갔을 때, 혹은 스스로가 벽에 들어갈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다. 어렸을 때부터 다른 이를, 혹은 스스로를 위로하는 방법을 미리 배워두면 벽에서 좀 더 빨리 나올 수 있지 않겠나. 안정적으로 지내는 법을 배우는 건 매우 중요하다.”(이갈리아 유치원 원장 로따)
2가지의 길 VS 수백가지의 길
스웨덴의 성평등 교육은 어떤 효과를 보일까? 2017년 10월 아동 실험심리학 저널에 실린 ‘초기 유치원 환경과 젠더 : 스웨덴 젠더 교육의 효과’에 따르면, 성평등 교육에 특화된 ‘성중립 유치원’을 다닌 아이들이 일반 유치원에 다닌 아이들보다 다른 젠더의 아이들과도 스스럼없이 놀고 다른 사람의 젠더를 덜 의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성중립 유치원 3~6세 아동 30명과 일반 유치원 50명을 비교 분석한 결과다. 보고서 작성자는 ”인간으로서 더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아이들의 발전에도 긍정적이라 보여진다”고 밝혔다.
보고서의 대표 연구자인 벤 켄워드 박사는 “남자와 여자는 생물학적으로 다르니까 성별에 따라 다르게 대하는 게 당연하다는 주장은 사실 그 사람이 젠더 문제를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걸 의미한다”며 “X염색체와 Y염색체의 결과물로서 ‘남자다운 행동’과 ‘여자다운 행동’이 자연스럽게 나타났다고 어느 누가 말할 수 있을까?”라고 물었다.
그는 “성중립 유치원은 남자애들이 인형을 가지고 놀게 만들고, 여자애들에게는 전통적으로 ‘남자 옷’이라고 여겨지는 옷을 입게 만드는 곳이 아니다”라며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압박 없이 아이들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전했다.
성평등 교육의 필요성은 과학적 연구로 입증된다. 2013년 초등학교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이 있었다. ‘여자애들이 남자애들보다 잘한다‘와 같은 어른들의 고정관념을 계속 접한 남학생들은 그 말대로 학업 성적에서 낮은 점수를 선보였다. 반면 ‘남자애와 여자애의 성적이 거의 비슷할 것이다’라는 말을 계속 들려주자, 놀랍게도 남학생들의 성적이 올라갔다. 여러 연구는 성별에 따라 아이들을 다르게 취급하는 것이 한창 커나가는 여학생, 남학생 모두에게 해로운 영향을 끼친다고 지적하고 있다.
“아이에게 남자로 사는 길과 여자로 사는 길, 이 두 가지 길만 알려줄 것인가? 아니면 수백가지의 다른 길들이 있고, 그중에서 네가 무얼 선택하든 우리는 지지해줄 거라고 말할 것인가?”
이는 스웨덴 최초의 평등 전문 컨설턴트인 크리스티나 헨켈과 교육자인 마리 토미치가 저서 ‘스웨덴식 성평등 교육’에서 명쾌하게 정리한 스웨덴 성평등 교육의 목적이다.
“남자애는 힘이 세야 해” “여자애치고 제법인데”와 같은 이야기를 듣고 자란 아이와 ‘너는 한 개인으로서 모든 걸 선택할 권리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란 아이는 장래에 어떤 차이를 보일까? 한국에 사는 우리는 전통과 문화라는 이유로 아이들에게 무한대가 아닌 ‘2개의 길’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스웨덴 유치원은 우리가 너무 당연하게 생각해왔던 것에 대해 커다란 물음표를 던지고, 새로운 길을 가고 있었다.
*진행: 박수진, 윤인경
[Beyond Gender Project]
1편. 인도
- ‘여성에게 위험한 나라 1위’ 인도의 ‘페미니즘 학교’를 찾아갔다
- 18세에 억지로 결혼해야 했던 소녀는 ‘위대한 교육자’가 되었다(인터뷰)
- ”남자가 성평등 교육을 받는 이유는 ‘더 나은 남자의 삶’을 위해서다”
2편. 호주
- ”맞을만해서 때렸다”는 말에 호주는 이렇게 대처했다
- “여성을 일상적으로 비하하는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이 일어난다”
- 가부장적인 남성들과 가부장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법
3편. 스웨덴
- “나는 여자 안 때린다”고 말하는 남자들 뿐이라면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 세계 최초로 ‘페미니스트 정부’ 표방한 나라의 장관이 한국인에게 전한 말
- 이 나라의 유치원에는 ‘남자아이’, ‘여자아이’가 없다
4편. 한국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취재 지원으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