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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3월 12일 10시 36분 KST | 업데이트됨 2018년 03월 12일 10시 36분 KST

한반도의 새로운 상상력

갑자기 선 따위를 신경 쓰지 않는 지도자가 북한과 미국에서 동시에 등장했다

huffpost

현실이 예측을 앞서 달린다. 김정은 위원장의 제안도, 문재인 대통령의 수용도, 트럼프 대통령의 결단도 속도가 빠르고 파격적이다. 과연 4월 남북정상회담과 5월 북-미 정상회담이 만들어낼 한반도는 어떤 모습일까? 솔직히 예측하기 어렵다. 관성적 사고의 한계와 상상력의 빈곤을 느낀다.

분명 북한과 미국의 두 지도자는 공통점이 있다. 실무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단계적으로 사고하지 않는다. 그래서 과거의 경험으로 현재를 이해하기 어렵다. 두 지도자 모두 인정욕구가 강하고, 계산 본능이 뛰어나다. 그래서 이해가 일치하면 담대한 합의도 가능하다. 두 지도자 모두 단기적 성과를 중시한다. 그래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속도가 빠르다.

Joshua Roberts / Reuters

우리에게는 ‘즐거운 혼돈’이고, ‘가슴 설레는 불확실성’이다. 한반도에서 북한과 미국의 정상회담은 처음이다. 의제보다 만남 자체의 효과가 크다. 아마도 1984년 12월 고르바초프를 처음으로 만난 대처 총리처럼 트럼프 대통령도 김정은 위원장을 ‘비즈니스가 가능한 상대’라고 생각할 것이다. 고르바초프의 제안으로 대처 총리는 실무자들이 만들어준 문서를 핸드백에 넣었다. 솔직한 대화의 시작이 바로 세계적인 냉전 해체의 출발이었다.

북-미 정상회담은 실무준비를 거칠 것이나 ‘준비’를 뛰어넘을 가능성이 크다. 중요한 것은 한국의 역할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인내와 의지, 그리고 협상의 기술로 북-미 정상회담이 만들어졌다. 확실하게 서울이 평양과 워싱턴을 연결하고 있다. 남-북-미 삼각대화를 주도하는 한국의 역할은 더욱 커질 것이다. 4월 남북 정상회담이 길을 만들고, 5월 북-미 정상회담이 포장을 하고, 곧바로 이어질 남-북-미 3자 정상회담으로 한반도 냉전 해체의 자동차가 달릴 것이다.

이제 관성을 뛰어넘는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하다. 미국은 단 한번이라도 북한을 파키스탄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미국이 파키스탄의 열악한 인권 상황에도 불구하고 군사지원을 하는 이유는 전략적 가치 때문 아닌가? 북한은 운동권 단체가 아니라 국가이고, 당연히 이념이 아니라 국익을 추구한다. 이익이 되면 미국의 항공모함이 원산이나 흥남항으로 들어오지 말라는 법도 없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의 전통적인 관료와 다르다. 북한과의 관계를 얼마든지 ‘남는 장사’라고 생각할 수 있다. 직감적 계산이 관성적 실무를 압도하는 지금 같은 기회가 또 언제 오겠는가?

북핵 문제의 해법도 마찬가지다. 앞으로의 해법은 지난 20년의 경험과 많이 다를 것이다. 우리가 아주 오랫동안 관성적으로 그렸던 행동 대 행동의 복잡한 설계도는 소용이 없을지도 모른다. 우크라이나의 핵시설을 해체해서 연료봉을 미국으로 옮기고, 미국이 돈을 내서 그 자리에 산업단지를 건설하고 원자력공학자들에게 새로운 일자리를 제공한 사례는 얼마든지 영변에도 적용할 수 있다. 핵시설이 있던 영변의 들판이 진달래 꽃밭으로 변하고, 그 앞에서 남-북-미 정상이 다정하게 사진 찍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미국과 베트남, 미국과 미얀마의 사례를 보면 수교부터 하고 현안 문제를 해결했다. 북-미 관계 정상화, 의지만 있으면 가능하다.

분단체제에서 상상력은 불온이었고, 자주 체포되었다. 누구도 상상력의 선을 넘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선 따위를 신경 쓰지 않는 지도자가 북한과 미국에서 동시에 등장했다. 2018년 봄 역사의 기차가 굽이를 돈다. ‘시대착오’는 튕겨져 나갈 것이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담대한 상상력이다. 머릿속의 38선을 넘을 때가 왔다.

*한겨레신문에 게재된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