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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남편은 대학교 교육이 가난을 벗어날 유일한 길이라 믿었고, 학자금 대출 8억원을 지게 됐다. 그 과정에서 느낀 점은 이렇다

비싼 등록금과 치솟는 이자에 힘들다.

저자와 그의 남편과 아들
저자와 그의 남편과 아들 ⓒRachel Bevel

 

대학교 진학이 가난에서 벗어날 방법이라고 믿었다

1990년대 현재 남편인 오티스와 나는 초등학교 2학년 때 같은 반에서 만났다. 어느새 큰 귀를 드러내고 교정기를 낀 그가 놀이터에서 노는 모습에 사랑에 빠지게 됐다. 당시 나는 곱슬곱슬한 양갈래 머리에 레이스 없는 신발을 신은 어린 소녀였다. 당연히 당시에는 오티스와 미래에 어떻게 될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우리 가족이 다른 도시로 이사했을 때, 오티스를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모든 것을 변화시킨 소셜미디어의 탄생 전의 일이었다. 10년 후 그가 페이스북으로 친구 신청을 해왔고 우리 운명이 변했다. 

2008년 여름이었다. 내 인생 최고의 여름. 우리는 둘 다 18살이었고 각자 다른 대학으로 진학했다. 하지만 우리는 야심차게 사귀기로 했다. 친구들은 우리가 미쳤다고 생각했지만, 그냥 기분이 좋았다. 오티스는 다른 남자들과 좀 달랐다. 16살 때부터 그는 자신이 치과의사가 될 거라고 말했다. 나는 오티스가 앞으로 성공적인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안정감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나는 어려운 가정 환경에서 성장했다. 부모님은 10대 때 나를 낳았지만 그들이 함게 있는 걸 본 기억이 없다. 대부분 엄마와 함께 살았고 엄마는 여섯 명의 아이들을 혼자 키우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정부에서 보조금을 받으며 이사를 자주 했다.  부모님의 모습은 끊임없이 나에게 교육의 중요성과 재정의 독립성을 일깨워주곤 했다.

부모님 모두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 고등학교 졸업 후, 엄마는 헤어스타일리스트가 되었고, 아빠는 우편배달원으로 일했다. 조부모님은 무역 노동자였다. 우리 가족에게 돈은 항상 문제였다. 어릴 때부터 집안 경제 상황이 어려운 걸 알았다. 부모님이 대학 등록금을 내주는 건 꿈도 꾸지 못했다. 그저 살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나는 대학교 진학이야말로 그 악순환을 깨기 위한 답이라고 생각했다. 

 

자료사진
자료사진 ⓒRattanakun Thongbun / EyeEm
 

남편의 치대 진학 실패와 피임 실패로 아이까지 생겼다

반면, 오티스는 안정된 가정에서 자랐다. 그의 부모는 결혼했고, 교외에서 살았고, 성공적인 부동산 중개인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오티스가 12살이 되었을 때, 형의 비극적인 죽음과 아버지가 감옥에 가면서 집안 형편이 급격히 어려워졌다. 그의 어머니는 불경기 동안 혼자서 가족을 부양하려고 했지만 어려운 일이었다. 당시 오티스와 나는 어렸고, 희망적이었고, 부모님의 실수로부터 배우기를 열망했다.

난 오하이오주 마이애미 대학교에 지원했다. 그 학교가 불우한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 프로그램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지원 당시 그 학교가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붙었고 최고의 선택이었다. 대부분의 학비가 장학금으로 충당되었을 뿐만 아니라, 캠퍼스는 아름다웠다. 2012년에 학자금 대출 2만 3000달러 (한화 약 2543만 원)를 갖고 졸업했다. 영어를 전공하고 학위를 손에 들고 세상을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잡지 출판사에서 일하고 싶었다. 하지만 당장 어디서 구직을 시작해야 할지 전혀 알지 못했고 시도할 자신이 없었다. 오티스는 링컨 대학에서 생물학 학위를 마치기 위해 다른 주에 1년 더 머물러야 했다. 오티스가 졸업할 때까지 고향으로 돌아가 일하기로 결정했다. 거기서 우리는 결혼 계획을 세우고 그가 치과대학에 입학할 때 (미국에서는 보통 일반 대학교를 졸업한 후 의대에 진학한다) 이사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오티스와 나는 높은 월급을 받는 직업을 구할 수 없었다. 오티스는 학자금 부채로 8만 달러 (한화 약 8835만 원)를 떠안았다. 치과의대 입학을 위해 공부했지만 합격에 필요한 시험 점수를 얻지 못했다. 난 작가로서의 내 능력을 의심하기 시작하며 정신건강 분야의 직업에 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우리는 2014년에 결혼했고, 피임 실패로 깜짝 임신을 해 2015년 아들을 낳았다. 계획하지 않은 출산이었지만 우리에게 가족은 매우 중요했다. 우리가 인생에서 원했던 두 가지는 아이들과 경제적인 행복이었다. 나는 집에 머물면서 아들을 키우고 또 다른 아이를 낳기 위해 일을 그만두었다. 일을 그만둔 후 갑자기 정체성 문제에 직면했다. ‘대체 나는 누구지?’ 

 

ⓒpick-uppath

사람의 가치를 신용 점수, 급여, 은행 계좌 등 숫자로 측정하는 문화 속에 살고 있다

 

소셜미디어를 보며 다른 사람들과 나를 비교하곤 했다. 다른 이들은 여행하고, 쇼핑하고, 완벽한 집에 사는 것처럼 보였다. 한편 나는 임신 중이었고, 꿈만 꾸고 있었고, 가난했다. 나중에 감정적인 공백을 메우기 위해 석사 학위를 위한 학교에 등록했다. 6만 4500달러 (한화 약 7131만 원)가 든 결정이었다. 오티스는 치과대학 진학에 3년간 실패했고 결국 포기했다. 대신 무려 10만 1천 달러 (한화 약 1억 1150만 원)에 보건 행정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문제는 우리에게 맞춤형이 아닌 삶을 살기 위해 너무 힘들게 노력했다는 거다. 오티스와 나는 부모가 대학교를 졸업한 흑인 가정이 거의 없는 도시에서 자랐다. 아무런 자원도 없이 오티스와 나는 목적지를 향해 성공하기 위한 큰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대외적으로, 우리는 모든 것을 잘 해냈다. 우리는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했고, 집을 샀고, 아이를 가졌다.

하지만 우리 경력은 생각대로 잘 흘러가지 않았다. 26만 8621달러 (한화 약 2억 9661만 원)의 학자금 대출을 갚기 위해 노력했지만 정말 힘들었다. 되돌아보면 우리가 원했던 걸 다 가질 수는 없었다. ‘아메리칸 드림’ (경제적 번영과 이상적인 사회를 이룩하려는 꿈)은 희생을 요구한다.

내겐 완벽한 부모님이 없었다. 나는 이복 남매와 두 집을 오가며 살았다. 내가 결코 어린 시절 가지지 못한 이상적인 가족을 만들고 싶었다. 우리는 사람의 가치를 신용 점수, 급여, 은행 계좌 등 숫자로 측정하는 문화 속에 살고 있다. 많은 사람이 사랑이라는 가치는 돈을 위해 포기해도 되는 거라고 여긴다. 만약 내가 수치만을 위해 산다면, 이미 인생이 끝장났을 거다.

그러나 내겐 오티스가 있고 아이들이 있어 희망이 있다. 오랜 꿈이 다시 떠올랐다. 오티스는 정말 마지막으로 치과의대에 지원했다. 2019년 2월 27일 마침내 그는 합격했다. 아메리칸 드림의 비용은 결코 싸지 않다. 그가 졸업할 때 우리 가족은 학자금 대출로 총 71만 8천 달러 (한화 약 7억 9267만 원)의 빚을 지게 될 거다. 

ⓒChatchai Somwat / EyeEm

학자금 빚에 힘들지만 그래도 아이들에게 좋은  삶을 제공하고 싶다

나와 오티스 모두 가족 내에서 처음으로 대학교에 진학한 세대다. 4년제 대학 진학을 선택한 건 결코 가벼운 마음으로 한 선택이 아니었다. 교육이 가난에서 벗어나는 길이라 믿었다. 남편은 현재 치대에 다니고 있다. 그가 돈을 벌기는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막대한 부채에 시달리고 있다. 의료 전문가로서의 그의 월급은 우리를 구할 수 없다.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선택한 교육이 우리를 더 가난하게 만드는 느낌이 든다. 

미국은 세계에서 대학교 평균 등록금이 가장 비싸다. 미국은 기회의 땅이기도 하지만 가난의 모래 구멍에서 기어 나오려면 엄청난 손실을 필요로 한다. 공짜는 없다. 오티스와 나는 경제적으로 어려웠지만, 미국 시민으로서 우리는 열심히 일하고 성공을 이룰 기회를 가졌다. 단지 믿음만으로 비싼 대학원에 진학했다. 남편이 치과대학으로 가는 길은 경쟁이 힘들었고 매우 비싼 비용을 내야 했다.

오늘날, 우리는 두 아이에게 보람 있는 삶을 제공하기를 열망하고 있다. 사회에 환원하고, 사업을 지원하고, 부모님을 돕고 싶다. 하지만 비싼 등록금과 치솟는 이자에 사실 힘들다. 국가가 미국인들에게 꿈을 팔고 그것을 추구했을 때 벌을 받는다고 느낀다.

미국이 금전적 이익보다 타인에 대한 공감과 시민을 중시하는 법을 배웠으면 좋겠다. 우리에게 미래는 밝아 보여야 하지만, 현재 삶은 어두운 터널을 운전하는 출퇴근 시간 꽉 막힌 교통과 비슷하다. 남편과 나는 많은 어려움을 경험했고, 인내심을 가지고, 그러한 장벽을 극복했다. 우리는 평화를 찾았고 학자금 대출을 천천히 갚아나갈 거다. 비록 빚을 지는 걸 피할 수는 없지만 그게 우리의 인생을 지배하지는 못한다. 그 빚이 행복을 방해하도록 두지 않겠다. 

 
 
 
 
 

 

 

*저자 레이첼 비벨은 유색인종을 위한 밀레니얼 육아 블로그인 크래들 매거진의 설립자이다. 그는 두 명의 아름다운 아이들을 키우는 엄마이며 아동 도서 작가가 되는 게 꿈이다. 

*허프포스트 미국판에 실린 독자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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