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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방' 조주빈 징역 40년 : 디지털 성범죄에 분노한 사람들의 추적과 연대가 만든 변화

디지털 성범죄에 무감하던 한국 사회가 그렇게 조금씩 움직였다.

  • 허완
  • 입력 2020.11.26 11:49
엔(n)번방 성착취 강력처벌 촉구 집회가 지난 7월25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연세로에서 열렸다.
엔(n)번방 성착취 강력처벌 촉구 집회가 지난 7월25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연세로에서 열렸다. ⓒ한겨레

텔레그램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25)씨가 1심에서 징역 40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조씨가 지난 3월 경찰에 붙잡힌 지 9개월 만이다. 대학생 두 명으로 이뤄진 ‘추적단 불꽃’의 취재로 세상에 드러난 ‘텔레그램 성착취’는 ‘디지털 성범죄’에 무감하던 한국사회를 흔들었다. 조씨 검거 뒤 9개월 동안 디지털 성범죄는 비로소 하나의 ‘범죄’로 눈 앞에 드러났고, 사회는 늦었지만 조금씩 반응했다. ‘디지털 성범죄’에 분노한 이들의 추적과 연대가 만들어낸 변화다.

‘디지털 성범죄’ 근절을 위한 연대와 감시는 뜨겁고 동시에 꾸준했다. 트위터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모인 수십명의 익명의 여성들은 지난 3월부터 수개월 동안 서울·수원·창원 등 전국 각지에서 열리는 텔레그램 엔(n)번방 관련 재판을 직접 방청하고, 후기를 공유했다. 텔레그램 성착취 신고 프로젝트 ‘리셋’(ReSET)과 ‘추적단 불꽃’은 시민 7509명을 상대로 디지털 성범죄 양형기준에 대한 설문조사를 벌여 ‘사법부가 디지털 성범죄를 진지하게 여기고 있지 않다’는 응답자 대다수의 견해를 대법원 양형위원회에 전달했다. 엔번방 성착취 강력처벌 촉구시위팀 ‘eNd’는 리셋과 함께 디지털 성범죄 가해자의 엄벌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받아 지난 11월 대구지법 안동지원에는 2만장을, 서울중앙지법에는 8만장을 전달하기도 했다.

서울 서초구 중앙지방법원 앞에서 열린 텔레그램 성착취 공동대책위원회 기자회견 '우리의 연대가 너희의 공모를 이긴다'에서 참석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2020년 6월11일.
서울 서초구 중앙지방법원 앞에서 열린 텔레그램 성착취 공동대책위원회 기자회견 '우리의 연대가 너희의 공모를 이긴다'에서 참석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2020년 6월11일. ⓒ뉴스1

 

활동가들은 디지털 성폭력 범죄 실태를 목격한 당사자로서 판사들 앞에서 강연을 했다. 지난 5월 대법원 산하 젠더법연구회와 사법연수원은 법관 전문분야 연수의 강연자로 ‘리셋’, ‘디지털성범죄아웃’(DSO)의 활동가들을 초청했다. 42명의 판사 앞에선 이들은 디지털 성범죄의 가해 유형과 수사·처벌의 한계에 대해 강의하고 판사들과 2시간 넘게 토론을 벌였다.

끈질긴 이들의 지난한 노력에 한국사회는 조금씩 반응하기 시작했다. 국회는 지난 4월29일 ‘엔번방 사건 재발방지법’이라 불리는 형법과 성폭력처벌법, 범죄수익은닉규제법, 청소년성보호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날 법안 통과로 불법 촬영물의 반포·판매·임대·제공만 처벌하던 성폭력처벌법은 불법 촬영물의 소지와 시청까지 처벌 대상으로 삼을 수 있게 됐다. 또 본인이 직접 촬영한 영상물이라도 다른 사람이 의사에 반해 유포하면 처벌할 수 있게 한 규정도 명확해졌다. 미성년자 의제 강간 연령 기준은 만 13세에서 만 16세로 높아졌고, 강간·유사강간을 계획한 사람도 예비·음모죄로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할 수 있게 됐다.

서울 종로구 서울지방경찰청 앞에서 열린 'n번방 사건 관련자 강력처벌 촉구시위 및 기자회견'에서 텔레그램 n번방 박사(조주빈), 와치맨, 갓갓 등 관련 성 착취 방 운영자, 가담자, 구매자 전원에 대한 강력한 처벌, 이와 같은 신종 디지털 성범죄 법률 제정 및 2차 가해 처벌 법률 제정 등을 촉구하고 있다. 2020년 3월25일.
서울 종로구 서울지방경찰청 앞에서 열린 'n번방 사건 관련자 강력처벌 촉구시위 및 기자회견'에서 텔레그램 n번방 박사(조주빈), 와치맨, 갓갓 등 관련 성 착취 방 운영자, 가담자, 구매자 전원에 대한 강력한 처벌, 이와 같은 신종 디지털 성범죄 법률 제정 및 2차 가해 처벌 법률 제정 등을 촉구하고 있다. 2020년 3월25일. ⓒ뉴스1

 

입법부에 이어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로 ‘공범’이라 비판받던 사법부도 조금씩 반응했다. 대법원 양형위원회(양형위)는 지난 9월15일 아동·청소년 성착취물을 2차례 이상 조직적으로 제작한 범죄에 최대 징역 29년3개월을 선고하도록 권고하는 내용이 포함된 ‘디지털 성범죄’ 양형기준안을 발표했다. 이날 발표된 양형기준안은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제작 범죄의 기본 양형을 징역 5년∼9년형으로 상향했고, 특별가중인자도 새롭게 정비했다. 또 아동·청소년 성착취물을 영리 목적으로 여러 차례 판매한 범죄에 대해서는 최대 징역 27년형까지 선고가 가능하도록 했다. 2017년 아동 성착취물 제작 등 사건의 1심 선고 유형의 38.5%가 벌금형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작지만 중요한 한 발이었다.

하지만 디지털 성범죄 근절을 위한 연대와 노력은 이제 시작 단계다. 법원은 지난 12일 엔번방에 유포된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2000여개를 구매한 20대 남성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올해 상반기 군 검찰의 디지털 성범죄 기소율은 36%에 그쳤다. 활동가들은 여전히 양형기준에서 ‘카메라 등 이용 촬영죄’와 ‘통신 매체 이용 음란행위’의 최소 형량이 4개월에 불과한 점도 한계로 꼽는다. 조씨가 선고받은 ‘40년형’이 연대와 추적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어야 하는 이유다. <한겨레21>은 그동안 밝혀진 디지털 성범죄 세계를 정리하고 앞으로의 기록을 저장할 ‘디지털성범죄 끝장 프로젝트 너머n’ 아카이브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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