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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만 조롱하는 것은 '광대'가 아니라 '양아치'다

“일단 뭐, 한동안 잠깐 또 시끄럽게 한 것에 대해서 대단히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린다.” tvN <코미디 빅리그> ‘충청도의 힘’에서 한부모가정 자녀 비하 논란으로 한바탕 소란이 일고 난 뒤 열린 채널A <오늘부터 대학생> 제작발표회 자리, 장동민은 자신을 둘러싼 많은 논란을 “또 시끄럽게 한 것”이란 말로 축약했다.

“성경험 여부를 남자들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여자들은 멍청하다”고 이야기한 과거 팟캐스트 발언으로 문제가 된 지 1년여 만에 터진 설화였지만, 이번에도 역시 별다른 일은 생기지 않았다. 장동민은 자신이 누구에게 무엇을 잘못했는지 적시해서 사과하는 대신 최대한 모호한 표현들로 일관하는 사과문을 발표했고, 그의 동료들과 프로그램을 연출한 PD는 장동민을 옹호하는 글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리며 비판자들을 비난했다.

문제적 발언 해도 아무것도 잃지 않는다

혹자는 그가 <코미디 빅리그>와 KBS <나를 돌아봐>에서 하차해 생계의 일부분을 내려놓은 것으로 책임을 치른 것 아니냐고 물었으나,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오늘부터 대학생>과 tvN <렛츠고 시간탐험대 시즌3>에 새로 들어가면서 출연 프로그램 개수를 동률로 채웠으니 꼭 그렇다고 말하기도 어려워졌다. 시간이 흐르며 논란은 점차 잊혔고, 장동민은 문제적 발언을 해도 어떤 식으로든 무마가 가능하다는 것을 또 한 차례 경험했다.

처음 한 번의 무마는 천운일지 몰라도 두 번 반복되면 그냥 당대의 룰이 그런 것이다. 장동민은 크게 잃은 것 없이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생계에 그리 크게 문제되지 않을 거란 사실을 재차 확인했고, 심지어 일부 예능 PD들은 웹진 <아이즈>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논란을 ‘노이즈 마케팅’ 효과가 있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자신들의 문제제기가 고작 그런 식으로 소비되는 걸 바라봐야 하는 이들이 느낀 좌절은 깊다.

물론 여성, 노인, 장애인 등 약자에 대한 비하를 ‘엔터테인먼트’화하는 것은 장동민만의 일이 아니고 어제오늘의 일도 더더욱 아니다. ‘여자는 자신의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 남자를 경제적으로 착취하는 존재’라는 편견을 코너의 동력으로 삼았던 SBS <웃음을 찾는 사람들> ‘남자끼리’는 그 기저에 깔린 편견의 불공정성과 폭력적인 희화화에도 불구하고 프로그램의 대표 코너 자리에 올랐다.

KBS <개그콘서트>에는 아예 전통적 미인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여성 코미디언들의 계보가 있어, 박지선-오나미-김영희-이수지 등으로 이어지는 일군의 코미디언은 끊임없이 외모 비하의 대상이 되거나 여성성을 부정당하는 농담의 재료로 활용되곤 했다. <코미디 빅리그>의 문제는 지면이 모자랄 정도로 심각해서, 매회 여성의 신체에 대한 성희롱이나 지적장애인 조롱, 외모 서열화를 개그의 뼈대로 삼는 코너가 화면을 가득 채운다.

공개 코미디만 이런 게 아니다. 최근 가장 각광받는 MC 중 한 명인 김성주는 JTBC <끝까지 간다> 제작발표회에서 공동 MC인 장윤정과의 호흡에 대해 설명하며 상대가 “아나운서에 순종적이고 호의적”이라서 좋다고 표현했는가 하면, MBC에브리원(every1) <결혼 터는 남자들>에선 아이가 돌도 안 지났을 무렵 부부싸움의 승기를 잡겠다며 아이를 인질 삼아 협박한 이야기를 신나게 늘어놓기도 했다.

약자 비하를 농담의 소재로 삼았다가 몇 차례 논란을 겪은 전현무는 MBC <나 혼자 산다>에서 기껏 자신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 고민 끝에 상담을 받으러 가서는 자신이 겪는 고통만 토로하고는 하던 대로 하겠다는 엉뚱한 다짐만 한 차례 더 하고 돌아왔다.

여성을 ‘개념녀’와 ‘된장녀’로 양분하는 궤변을 한껏 논리적인 듯한 말투로 늘어놓던 성시경이나, tvN <초인시대>를 통해 여성에 대한 자신의 공격성을 ‘찌질함’의 프레임으로 위장해 자조적인 개그인 양 유통시킨 유병재 또한 편견과 혐오를 엔터테인먼트의 재료로 삼는다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비하와 조롱을 문제 삼을 때마다 반대편의 논리로 등장하는 것이 ‘광대의 모럴’이다. 중세의 광대는 그 광기를 핑계로 최고권력자를 조롱하고 욕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받았다. 성역이나 금기 없이 모두를 조롱 대상으로 삼는 것은 코미디의 전통을 이루는 근간이라는 것이다. 과거 박성호가 ‘갸루상’ 캐릭터를 들고나왔다가 일본 내 여론이 안 좋아졌을 때 “웃기기 위한 건데 괜찮다”고 옹호한 일본 코미디언 진나이 도모노리의 예를 들며, 마치 문제제기하는 이들이 코미디를 이해하지 못해서 그렇다는 식으로 치부해버리는 경우도 있다.

아래로만 향하는 ‘광대의 모럴’?

그러나 정치권력이나 자본권력 등 상대적 강자들은 좀처럼 조롱 대상이 되지 못하는 가운데 상대적 약자에 대한 조롱만 집요하고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현상은 ‘광대의 모럴’을 무력화한다. 위아래 없이 모두를 조롱하고 금기를 건드린다면 그건 광대의 코미디겠지만, 위를 향해서는 별말 못하면서 아래를 향해서만 조롱을 던지는 건 광대가 아니라 양아치의 모럴일 수밖에 없다.

꾸준한 비판과 문제제기에도 여전히 장동민은 다수의 프로그램에 출연 중이고, 김성주와 전현무는 출연 프로그램 개수를 헤아리기 위해 두 손을 동원해야 할 지경이다. 하지만 이걸 꼭 절망적 상황이라고만 볼 일은 아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한국 코미디가 약자 비하를 동력으로 삼은 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고, 최근의 현상은 오히려 그간 문제라고 여기지 않은 채 관성으로 넘어가던 농담들이 비로소 문제로 인식되고 가시화하는 흐름에 가까우니 말이다.

논란에 대처하는 연예인들의 자세나 방송사의 문제 인식은 아직 한없이 미흡한 수준이지만, 한국 코미디의 폭력성에 지친 이들은 유튜브나 비메오(Vimeo) 등 동영상 서비스를 통해 해외 스탠드업 코미디를 보며 “다른 웃음도 가능하다”는 걸 학습하기 시작했다. 장동민과 그 동료의 여성 비하 발언들이 문제가 될 무렵 발족한 ‘페미니스트 코미디 클럽’은 여성의 목소리가 반영된 코미디를 발굴해 공유하고 함께 토론하는 것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 중이다.

해외 사례들을 연구하고 벤치마킹하는 것만큼이나, 한국 예능산업에서 대안을 모색하는 움직임도 결코 작지 않다. 특히 요 몇 년간 예능에서 지속적인 대상화에 시달렸을 뿐 제대로 된 무대를 제공받은 적 없던 김숙의 약진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40대 여성 코미디언에게 좀처럼 무대를 제공하지 않는 주류 미디어의 외면 속에, 송은이와 함께 팟캐스트 <송은이 & 김숙의 비밀보장>를 만들어 자신들의 시장성을 증명해낸 것은 한국에서 전례 없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송은이와 김숙은 팟캐스트의 선풍적 인기를 바탕으로 SBS FM <언니네 라디오>로 진출하는 데 성공했으며 이에 그치지 않고 다시 TV로 그 영토를 넓혔다. 김숙이 윤정수와 함께 투입된 JTBC <님과 함께 시즌2-최고의 사랑>에서 선보인 ‘가모장’ 캐릭터는 프로그램을 폐지 위험에서 구해낼 정도로 강력했는데, “남자는 자고로 집에서 조용히 있으며 아내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가모장’ 김숙은 ‘가부장적 남편과 순종적 아내’라는 전통적인 한국의 가정 구도를 전복함으로써 쾌감을 선사했다.

내가 진짜로 하고 싶었던 게 뭐냐면…

<님과 함께 시즌2-최고의 사랑>이 성역할극을 통해 기존 질서를 조롱하고 질문을 던진다면, 최근 시작한 KBS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언니들의 슬램덩크>는 그간 제대로 반영된 적 없던 여성들의 목소리를 주류 미디어 안으로 끌고 들어간다. 라미란, 김숙, 홍진경, 민효린, 제시, 티파니 등 여섯 명으로 구성된 <언니들의 슬램덩크>는 아예 프로그램 콘셉트부터 “하고 싶었는데 다양한 이유로 포기해야 했던 꿈에 도전하자”다.

김숙은 관광버스를 몰고 아끼는 이들과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다소 황당한 꿈을 고백하고, 라미란은 어린 시절 시골 마을에서 직접 무대를 꾸려 친구들과 쇼를 만들던 추억을 신나게 이야기하며 한때 가수를 꿈꾸었노라 말한다. 그리고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번지점프를 해보고 싶었다는 제시의 이야기까지. 멤버들은 크고 작은 꿈을 고백하고, 프로그램은 그게 어떤 종류의 꿈이든 일단 진지하게 경청한다. 여성이 자신의 삶과 욕망을 고백하고, 동료들은 그를 응원하고 독려해주는 그림. 그간 “여성들은 망가지거나 서로 경쟁하는 프로그램에 적합하지 않다”며 여성 배제를 합리화한 지상파 TV가 마침내 여성이 주체로 설 수 있는 새로운 포맷을 개발해내는 성의를 보였다는 건 주목할 만한 일이다.

JTBC가 선보인 힙합 예능 프로그램 <힙합의 민족> 또한 주목할 만하다. 김영옥·염정인·양희경·최병주·이용녀·이경진·김영임·문희경 등 평균연령 65살의 ‘할머니’들이 힙합에 도전한다는 이 엉뚱한 프로그램은, 할머니들이 멘토들과의 가사 작업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기묘한 시너지를 만들어내고 있다.

본격 힙합 프로그램으로 보자면 부족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제 삶에 대한 고백을 서사의 원동력으로 삼는 힙합 장르 특유의 자기고백·자기과시적 성격이 그간 ‘여성+노인’이라는 이중의 편견 안에 갇혀 경청되지 못한 할머니들의 삶과 만나며 그들의 삶을 재조명하는 예상치 못한 효과를 낳은 것이다. 국악계의 스타로 살아온 김영임이 무대 위에서 뽐내는 ‘스웨그’(Swag)나, 자살 시도나 이혼 같은 삶의 상처를 가사에 녹인 이용녀와 염정인의 자기고백, 나이가 많다고 실력이 부족할 것이라는 편견을 정면으로 맞받아치는 양희경과 문희경의 활약은 여러 논란에도 <힙합의 민족>을 꾸준히 주목하게 만든다.

주체가 된 소수자, 코미디의 지평 넓혀

물론 ‘걸크러시’(Girl Crush·여성이 다른 여성의 매력을 동경하는 마음)라는 단어를 두고 외모가 아름답거나 여성스러운 이들에겐 해당하는 일이 아니라고 이야기한 김숙의 경우를 보면, 아직 예능인들이 소수자 대변에 대한 구체적인 지향점이나 정체성을 지니고 방송에 임하는 건 아닌 듯하다. 그러나 꼭 인식이 실천에 우선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 발언권에서 배제되던 이들이 더 많이 농담의 주체가 되어 자기 농담을 던진다면, 코미디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지평 또한 넓어질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2015~2016년은 한국 코미디 속 소수자 혐오가 가시화되고 그에 대한 대안 모색이 적극적으로 시작된 시기로 기록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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