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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우영 조선일보 고문 별세, 64년 신문인생은 '빛과 그림자'

  • 원성윤
  • 입력 2016.05.09 06:52
  • 수정 2016.05.09 08:38

방우영 조선일보 상임고문이 지난 8일 별세하면서 64년에 달하는 그의 신문인생도 저물었다. 그의 인생에는 조선일보가 부수 1위 언론이 되는데 지대한 역할을 한 '빛'과 숱하게 권력이 바뀌는 동안 '밤의 대통령'으로 불린 '그림자'도 공존한다.

고인은 1928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다. 일제 강점기 시절에 조선일보 사장을 역임한 방응모의 친형 방응곤의 손자다. 선친 방재윤이 방응모의 양자로 가면서 형 방일영과 함께 양손자가 됐다. 방응모는 금광사업으로 큰 돈을 벌게 된 뒤 1932년 조선일보를 인수하게 된다.

사진은 2008년 1월 22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방우영 팔순 출판기념회'에서 이명박 당시 대통령 당선인, 전두환 전 대통령 등과 인사하는 모습.

그의 기자 인생은 1952년으로 조선일보 기자로 입사하면서 시작된다. 그는 사회부, 경제부 등에서 8년간 기자생활을 한 뒤 본격적으로 경영을 하기 시작( 62년 상무, 63년 발행인, 64년 전무 대표이사, 70년 대표이사)하면서 조선일보를 키우게 된다.

고인은 조선일보 사장으로 취임한 뒤 타사에서 유능한 편집기자들을 스카우트해 신문 편집을 변화시키고, 젊은 기자들에게 “제호 빼고 다 바꿔보라”고 주문하는 등 파격과 혁신을 요구하며 사세 확장을 이끌었다. 62년 10만부가 채 안 됐던 조선일보의 판매 부수는 79년 100만부를 돌파하는 등 업계 선두로 자리잡았다. 한국언론사 전공인 김민환 고려대 명예교수는 “고인은 한국 신문의 현대적 경영을 일궈낸 거목으로서, 개발독재 체제에 기대어 ‘산업화’를 이룬 한 시대를 이끌고 대표했다”고 평가했다. (한겨레, 5월8일)

그는 조선일보의 지면 혁신과 더불어 '월간조선', '월간 산', '월간낚시' '스포츠조선' 등을 잇달아 창간하거나 인수했다. 특히 사세 확장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사진은 2000년 3월 3일 열린 조선일보 창간 80주년 리셉션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 김종필 당시 자민련 명예총재, 박태준 당시 총리 등과 대화하는 방우영 고문(김영삼 바로 옆).

1992년에는 국내 신문사 최초로 전국 동시인쇄망을 구축하고, 신문제작 전산시스템(CTS) 개발을 완료하기도 했다. 1960년대 초반 10만부를 밑돌던 조선일보 발행 부수는 고인이 사장이 된 1970년 35만부를 기록했으며, 1979년에 100만부, 1991년에는 200만부를 넘어섰다. (연합뉴스, 5월8일)

방우영 고문의 '언론자유'를 둘러싼 평가는 엇갈린다.

조선일보는 방 고문을 추모하며 조선일보의 박정희 정권 당시 만들어진 '언론윤리위원회'에 반대한 사실을 강조했다.

정권들은 툭하면 융자금을 회수하겠다거나 신문 용지 공급을 끊겠다고 으름장을 놓곤 했다. 논조가 거슬리면 필진을 바꾸라고 압력을 넣었다. 그러나 방일영·우영 형제는 5·16 후 '군정(軍政) 연장 반대' 사설을 밀어붙였다. 1964년 정부가 언론을 탄압하려고 언론윤리위원회법을 만들자 26개 언론사 발행인들이 모여 찬반 투표를 했다.

방우영은 투표장을 나서면서 기자들에게 말했다. "조선일보는 분명히 반대했습니다." 조선일보는 재고로 가진 신문 용지가 20일치밖에 안 됐지만 반대표를 던진 4개 신문 대열에 섰다. 은행 융자 회수부터 용지 공급과 광고 중단까지 갖은 보복이 쏟아졌다. 형제는 신문사 문을 닫을 각오로 물러서지 않았고 결국 정부는 언론윤리법을 철회했다. (조선일보, 5월9일)

그러나 박정희 정권과의 대립각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박정희 정권의 제안으로 일본 차관을 들여와 광화문에 코리아나 호텔을 '현금 한 푼 없이' 짓게 됐다. 이후의 논조는 다음과 같다.

사진은 올 1월 코리아나호텔에서 열린 미수 문집 출판기념회 때 방우영 고문.

<조선일보>는 박 전 대통령의 3선 개헌과 유신 개헌을 찬양하는 것으로 보답했다. 3선 개헌 국민투표가 실시되기 하루 전인 1969년 10월16일치 <조선일보>는 ‘각계 인사들이 본 성장한국’ 기사를 내보냈다. 대학총장과 영화배우, 탤런트 등 11명의 의견을 모은 기사였다. 11명의 ‘각계 인사’ 의견이란 한결같이 개헌을 지지한다는 것이었다.

1972년 10월18일치 <조선일보>는 사설 ‘평화통일을 위한 신체제’에서 10월 유신을 가리켜 “앞으로의 보다 보람되고 영광스러운 삶을 얻기 위하여 진정 알맞은 조치임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유신이 선포된 다음날이었다. (한겨레21, 2009년 10월21일)

유신 이후에도 조선일보 논조는 바뀌지 않았고 급기야 유신 찬양 기고문에 항의하는 백기범·신홍범 기자를 해고했다. 이에 75년 3월6일 기자들이 두 동료의 복직 약속을 지키라며 제작 거부 농성에 들어가자, 이들 32명까지 해고하기에 이른다. 한겨레에 따르면 고인은 이에 대해 2008년 팔순 기념 회고록 '나는 아침이 두려웠다'에서 “마음의 멍에로 남아 있다”면서도 “당시 일은 거론하지 마라. 차라리 나 죽고 나서 내 무덤에 와서 나를 욕하고 침을 뱉어라”고 밝히기도 했다.

당시 조선일보는 책에 대해 "방 명예회장은 1975년 조선일보 기자 30여 명이 회사를 떠나야 했던 '3·6사태'의 전말을 상세히 밝히면서 "이 일은 여전히 내 마음의 멍에로 남아 있다"고 썼다"고만 밝혔다.

이런 '친권력적' 성향은 1980년 전두환 신군부에서도 이어진다. 전두환 쿠데타 이후 만들어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에 참여한 이력으로 이어진다. 이는 조선일보가 5·18 광주민주화 운동을 폄하하거나 전두환을 찬양하는 논조로 이어졌다.

한겨레는 "그의 국보위 참여로 조선일보는 신군부가 주도한 언론 통폐합을 비켜감으로써 최대 발행 부수 신문으로 도약할 수 있었다는 평가도 나온다"고 평가했다. 한겨레는 김민환 고려대 명예교수의 말을 인용해 “고인과 조선일보는 산업화에 매몰된 나머지 개발독재 시대가 낳은 모순들은 제대로 살피지 못했고, ‘민주화’에 대해서는 오히려 대립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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