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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행 총재는 청와대·정부의 '한국형 양적완화'에 맞장구를 칠 생각이 없다

  • 허완
  • 입력 2016.05.05 09:40
ⓒ연합뉴스

기업 구조조정 추진 과정에서 국책은행 자본확충 방안을 둘러싼 논란이 뜨거운 가운데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구체적인 견해를 밝혔다.

이 총재는 4일(현지시간) '아세안(ASEAN)+3(한중일)' 재무장관·중앙은행총재회의 참석차 독일 프랑크푸르트를 방문한 자리에서 중앙은행의 원칙 2가지를 제시했다.

발권력을 동원하려면 국민이 납득할만한 타당성이 필요하고 지원금 손실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그는 산업은행, 수출입은행 등 국책은행에 대한 출자보다 회수를 전제한 대출 방식이 중앙은행의 원칙에 부합한다고도 강조했다.

그동안 구조조정에서 적극적 역할을 하겠다고 원론적 입장에서 한 발짝 나아가 구체적인 메시지를 던졌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 총재는 출자 방식을 배제하지 않고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고 설명했지만, 정부와 시각차를 나타낸 것이어서 양측의 협의 과정에서 갈등이 재연될 소지가 있다.

◇ 이주열 "중앙은행 손실 최소화…미 연준도 원칙 따랐다"

이 총재는 간담회에서 산업은행, 수출입은행 등 국책은행에 대한 한은의 출자는 가급적 피해야 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드러냈다.

대출 등의 다른 구조조정 지원 방식보다 지원한 돈을 회수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또 이 총재는 한국은행법상 확실한 담보가 있을 때 발권력을 동원할 수 있고 한은이 정부가 보증한 채권만 매입할 수 있는 것도 손실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원칙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통화정책을 결정하는 한은 금융통화위원들이 손실을 볼 권한까지 가진 것은 아니라는 말도 했다.

이 총재의 이런 언급은 발권력을 특정 기업 등에 남용하면 특혜 시비가 불거질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이 총재는 미국의 사례를 거론하며 출자 방식에 경계감을 드러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금융시스템 안정을 위해 AIG, 제너럴모터스(GM) 등의 기업에 유동성을 지원했지만, 손실을 최소화하려고 출자가 아니라 대출 방식으로 이뤄졌다는 것이다.

이 총재는 "만약 연준이 기업 지원으로 큰 손실을 봤다면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외국 사례를 언급한 것은 선진국의 중앙은행과 달리 한은이 경제 상황 대응에 소극적이라는 비판을 반박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ADB연차 총회 참석차 독일 프랑크푸르트를 방문 중인 유일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오른쪽)과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3일(현지시간)기념촬영을 하는 모습. ⓒ연합뉴스

이 총재는 발권력 동원에는 국민적 공감대가 필요하다는 한은의 기존 입장도 고수했다.

이 총재는 유일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국책은행 자본확충에서 국회와 소통하고 국민적 공감대를 획득하겠다는 발언이 적절하다고 수차례 언급했다.

유 부총리는 지난 2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연 기자간담회에서 한은이 구조조정 지원의 전제로 '국민적 공감대'를 강조한 데 대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했다가 논란이 일자 이틀 뒤 한은에 보조를 맞추는 태도로 선회했다.

한은이 손실을 보면서까지 국책은행에 출자하려면 적어도 국민이 공감하는 분위기가 마련돼야 한다는 게 이 총재의 주장이다.

이 총재는 2009년 한은이 지원한 자본확충펀드가 중앙은행의 원칙에 더 부합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시중은행에 채권을 담보로 대출하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담보가 없는 출자와 다르다.

이 총재는 "어느 나라를 봐도 구조조정은 정부의 주된 역할"이라며 정부와 한은의 역할에도 선을 그었다.

한은 발권력에 지나치게 의존하려는 주장을 간접적으로 꼬집은 것으로 읽힌다.

특히 이 총재는 미국 사례를 소개했다.

1951년 미국 재무부와 연준의 합의에는 연준이 신용위험 부담과 특정 부문에 대한 자금 지원을 피해야 한다는 점이 명시됐고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에도 재무부와 연준에는 이런 원칙이 재확인됐다고 설명했다.

◇ 한은-정부 인식차 드러나…이주열 "논란 확대는 원하지 않아"

한은의 수장인 이 총재가 한층 분명한 입장을 밝히면서 향후 구조조정의 추진에 어떤 영향을 줄지 관심이 쏠린다.

지난 2일 이 총재가 구조조정에서 한은의 적극적 역할을 강조하면서 누그러진 한은과 정부의 갈등 국면이 재점화될 소지가 있는 것이다.

이 총재는 구조조정을 둘러싼 논란이 확대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며 한은이 박근혜 대통령이 강조한 '한국형 양적 완화'에 반기를 들었다는 일부 보도에 당황했다고 털어놨다.

그러면서 양적 완화라는 표현보다 '국책은행 자본확충'이 더 적합한 용어라는 의견도 내놨다.

또 그는 "모든 논의는 협의체에서 이뤄져야 한다"며 지난 4일 가동한 관계기관 협의체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 총재는 이런 의견을 아세안(ASEAN)+3(한중일) 재무장관·중앙은행총재회의에서 유 부총리에게 전달했다고 밝혔다.

이 총재는 정부와 대립하는 모양새를 부담스러워하지만, 정부와 구조조정에 대한 인식은 분명히 거리가 있어 보인다.

정부와 청와대는 그동안 한은의 국책은행 출자가 필요하면 관련법 개정도 추진하겠다고 밝혀왔다.

금융위는 산업은행이 발행하는 조건부 자본증권(코코본드)을 한은이 매입하는 방식까지 제기했다.

구조조정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관계기관 협의체는 첫 회의에서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을 포괄적으로 검토한다는 큰 원칙에는 뜻을 모았다.

그러나 앞으로 정부와 한은의 구체적인 역할을 놓고 적지 않은 이견이 표출될 수 있다.

이 총재의 설명대로라면 한은의 국책은행 출자뿐 아니라 코코본드 매입도 쉽지 않아 보인다.

더구나 한은과 정부가 유일호 부총리까지 언급한 '국민적 공감대'까지 확보하려면 야당 설득이라는 험난한 길을 걸어야 할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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