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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실험 | 교복을 입고 콘돔을 사러갔다

일반적인 인식을 고려하면 청소년과 콘돔은 여전히 멀기만 하다. 아직도 콘돔이 성인용품이라는 인식이 만연하고, 인터넷에서는 일반 콘돔과 성인용 콘돔의 구분 없이 콘돔을 사기 위해서는 무조건 성인 인증을 해야 한다. 피임이 필요한 청소년들은 어디서 콘돔을 구할 수 있을까? 청소년임을 가장 가시적으로 드러내주는 것은 역시 교복이다. 그래서 교복을 입고 콘돔을 사보았다.

  • 박진아
  • 입력 2016.05.04 14:31
  • 수정 2017.05.05 14:12
ⓒ연제이민

글 | 박진아 (대한민국 성문화 개선 소셜 벤처 (주)인스팅터스 공동대표)

영상 | 연제이민 (Youtuber 혹은 절제된 관종)

업무와 관련해 모니터링을 하다보면 '요즘은 성교육이 많이 변했다' '나는 중고등학교 때 콘돔 착용법 배웠다'하는 반응이 심심찮게 보인다. 성폭력 방지에 대한 교육부의 지침 따위의 자료를 보면 이 나라의 성문화가 통탄스럽긴 하지만, 곳곳에 있는 현명한 보건교사들의 적극적인 성교육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진행되고 있는 모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인 인식을 고려하면 청소년과 콘돔은 여전히 멀기만 하다. 아직도 콘돔이 성인용품이라는 인식이 만연하고, 인터넷에서는 일반 콘돔과 성인용 콘돔의 구분 없이 콘돔을 사기 위해서는 무조건 성인 인증을 해야 한다. 피임이 필요한 청소년들은 어디서 콘돔을 구할 수 있을까?

교복 입고 콘돔 사기

청소년임을 가장 가시적으로 드러내주는 것은 역시 교복이다. 그래서 교복을 입고 콘돔을 사보았다. 다행히도 편의점, 약국 등에서 당당하게 콘돔을 찾는 교복 입은 여성과 남성에게 판매 거부를 시전하는 사람은 없었다. 가고 난 뒤에 "아까 그 학생 때문에 깜짝 놀랐어요. 남 부끄러워서 말할 수가 없어요."라거나 "쟤네들이 뭘 하려고..." 등의 우려 섞인 말은 했지만, 적어도 콘돔구매에 연령제한은 없다는 사실 만큼은 다들 알고 있었다. "저렇게 고등학생이 콘돔 사도 돼요?"라는 물음에 의심의 여지 없이 계산원은 "그런 거(콘돔)는 제재하는 것은 없어요. 담배를 제재하지."라고 대답했다. 영상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판매원은 기성세대의 여성이었으나, 교복을 입고 콘돔을 사는 것에 대해 예상 외로 중립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이 사회실험은 우려하는 바와 다르게 우리 사회에서 청소년의 성적 권리가 어느 정도는 인정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어딜 학생이..."하며 훈계하려 들지 않고 피임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성인이든 비성인이든 콘돔을 팔고 있었다. 온라인으로는 대형 포털들의 성인키워드 지정으로 콘돔 구매 자체가 불가능한 청소년들이기에 오프라인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사실은 더욱 더 중요하다.

100%는 아니다

그러나 만약 저 상황에서 교복을 입고 콘돔을 사러 온 사람이 본인이 아는 집 아이, 또는 본인의 자식이었다면 어땠을까? 일전에 우리 회사가 진행하고 있는 FRENCH LETTER PROJECT를 통해 콘돔을 받아간 청소년이 부모님으로부터 모질게 맞았던 사건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다. 어쩌면 영상 속의 사람들은 해당 청소년이 자신과 관련이 없는 사람이기에 더 쉽게 객관적으로 대처했던 것일 수도 있다. 청소년이든 성인이든 나와 무관한 사람의 성생활은 어찌되었든 불가침의 영역이기에 내버려두지만, 내 새끼라면 경우가 달라질 확률이 높다.

남의 자식이라도 콘돔 사러온 학생에게 신분증을 요구하는 일이 없는 일도 아니다. 청소년과 콘돔을 도무지 연결할 수 없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고 그래서 아직도 콘돔 구매에 어려움을 겪는 청소년들이 많다. 다만 이 사회 실험의 의의는 그렇게 판매를 거부하는 행위가 잘못되었음을 청소년 본인들은 물론 기성세대까지도 인식하는 계기로 작용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이것 봐, 교복을 입고서도 필요하면 살 수 있는 것이 콘돔이야"라고 먼저 나서서 보여주는 데에 있다.

청소년, 그리고 콘돔

"청소년도 건강하고 안전한 성관계를 위해서 콘돔을 구매할 수 있어요"라고 가르치는 학교가 국내에 있을까 싶다. 콘돔을 숨기면 섹스를 안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생각해보면 그렇다. 피임 교육 한번 제대로 해주지 않는 학교 성교육만 받은 청소년들이 알아서 콘돔의 중요성을 알고 피임을 하려 하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고 고마운 일이다. 그런 청소년들이 용기 내어 콘돔을 살 때, 기성세대는 차갑고 아니꼬운 시선으로 내치곤 한다. 불필요한 감정적 소모와 정신적 압박감을 덜어주지 못해 미안할 따름이다.

성인들에게 콘돔은 '반드시 써야'하는 물건이지만, 청소년들에게는 콘돔이 아직도 '쓸 수 없는' 물건인 듯하다. 적어도 '청소년들도 콘돔을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 만큼은 청소년이든 성인이든 누구든지 간에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오랜만에 교복을 꺼내 입고 콘돔 사러 나가보고 싶은 생각이 문득 든다.

* 이 글은 비건 콘돔 브랜드 'EVE condoms' 블로그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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