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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트맨 탄생기의 진화: part 2 | 비장하고 진지해진 히어로

그를 배트맨의 길로 인도한 박쥐는 이전처럼 그의 집 안으로 날아들기만 했던 것이 아니라, 어린 시절 동굴에서 추락할 때 만났고, 부모님이 죽기 직전 크라임 앨리의 하늘 위를 올려다보았을 때 달빛 아래 날아가는 것이 보였고, 급기야는 배트맨이 되기로 결심하던 순간 브루스의 방 창문을 깨부수며 그에게로 돌진해 들어온다. 『다크 나이트 리턴즈』는 만화라는 시각 미디어가 가진 특징을 최대한 끌어내어 페이지와 패널을 구성하고 그 안에서 시간을 조절하고 충격의 크기를 극대화하면서 브루스 웨인이 받아야 했던 트라우마를 최대치로 끌어내어 전달하는 데 성공한 첫 번째 작품이었다.

  • 이규원
  • 입력 2016.05.02 13:19
  • 수정 2017.05.03 14:12

[배트맨 데이 기념 특별 연재 31] 배트맨 탄생기의 진화: part 2

─ 비장하고 진지해진 히어로

1986년, 『다크 나이트 리턴즈』

1986년 『다크 나이트 리턴즈』는 미국 만화의 역사를 뒤바꾼 걸작으로 통한다. 지난 포스트에서 언급했다시피 배트맨 탄생기는 1980년이 될 때까지 조금씩 살을 붙여 오면서 진화해 왔다. 크라임 앨리의 어두운 골목길 안에서 울린 총성, 브루스 웨인이라는 인간의 인격을 영원히 유년기에 못 박히게 한 범인의 얼굴, 소년을 위로했던 사람, 현장에 나타난 경찰, 살인이 벌어졌던 이유와 배경, 복수를 다짐한 소년을 길러준 인물들, 그를 탐정의 길로 인도한 멘토 등 이야기는 사건의 등장인물과 인과 관계에 세부 사항을 덧붙이며 발전해 갔다. 그런데 『다크 나이트 리턴즈』는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이를 진화시켰다.

노년의 배트맨이 주인공인 『다크 나이트 리턴즈』에서 브루스 웨인이 살아가는 곳은 현실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악몽의 세계다. 그곳에는 브루스가 결코 되고 싶지 않았던 배트맨이라는 다크 히어로가 있고, 그와 끝없는 싸움을 벌이는 사이코 범죄자들이 있다. 이 세계는 부모님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던 어린 브루스가 꿈꾸었을 아름답고 평화로운 동화와는 전혀 다른 세계이자, 도무지 빠져 나갈 길을 알 수 없는 잔혹 동화의 미궁이다. 프랭크 밀러는 마치 루이스 캐롤의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브루스가 이 가혹한 세계로 추락했던 처음 순간을 배트맨 탄생기에 추가하였다. 여섯 살의 브루스는 토끼를 쫓아서 달리다가 깊은 동굴 아래에 추락하고 거기서 가장 무서운 생존자이자 전사인 박쥐를 마주한다.

곧이어 브루스는 영화를 보고 나온 후 부모님과 함께 골목을 걸어가던 때를 떠올린다. 부모앞에서 조로 흉내를 내며 천진난만하게 까불던 소년 앞에 나타난 강도, 커다란 총, 총구에서 뿜어지는 불꽃, 아버지가 쓰러지고 어머니의 진주 목걸이가 터져나가는 장면 장면은 역대 어느 배트맨 만화에서도 볼 수 없던 충격을 독자들에게 선사했다. 프랭크 밀러는 크라임 앨리 사건과 그날을 떠올리는 노년의 배트맨을 교차해 보여 주면서 브루스 웨인의 정신이 입었던 크나큰 상처와 충격을 묘사했다. 심지어 그를 배트맨의 길로 인도한 박쥐는 이전처럼 그의 집 안으로 날아들기만 했던 것이 아니라, 어린 시절 동굴에서 추락할 때 만났고, 부모님이 죽기 직전 크라임 앨리의 하늘 위를 올려다보았을 때 달빛 아래 날아가는 것이 보였고, 급기야는 배트맨이 되기로 결심하던 순간 브루스의 방 창문을 깨부수며 그에게로 돌진해 들어온다. 『다크 나이트 리턴즈』는 만화라는 시각 미디어가 가진 특징을 최대한 끌어내어 페이지와 패널을 구성하고 그 안에서 시간을 조절하고 충격의 크기를 극대화하면서 브루스 웨인이 받아야 했던 트라우마를 최대치로 끌어내어 전달하는 데 성공한 첫 번째 작품이었다.

은퇴한 브루스 웨인 앞에 다시 나타나 그를 인도하는 박쥐. 『다크 나이트 리턴즈』에서.

(이미지 제공: 세미콜론)

1987년, 『배트맨: 이어 원』

『이어 원』은 12년의 해외 체류를 끝내고 고담에 돌아온 25살의 브루스 웨인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나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 재력과 기술은 있지만 방법은 없다. 무언가가 빠져 있다. 기다려야만 한다.' 라던 웨인은 부패한 고담에서 서투른 첫 싸움을 벌이다가 경찰이 쏜 총에 맞고 쓰러진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탈출해 집으로 돌아온 브루스. 부모가 강도의 손에 죽임을 당하고 인생의 모든 감각이 사라졌던 그날로부터 18년을 기다린 브루스는 아버지의 서재에서 아버지의 흉상을 보고 있고, 아버지의 것이었던 박쥐를 자신의 것으로 맞아들인다. "저는 박쥐가 될 겁니다." 긴긴 수련을 끝내고 고담으로 돌아온 브루스 웨인은 프랭크 밀러의 세련된 탄생기 속에서 더욱 비장하고 진지한 히어로로 거듭난다.

아울러 이 새로운 탄생기에는 어둠 속에서 고담을 쥐락펴락하는 암흑가 보스 돈 팔코네와 그의 패밀리, 범죄조직에 맞서기는커녕 그들과 결탁하여 사리사욕을 취하는 데만 눈이 먼 부패 경찰인 길리언 경찰국장과 플라스 형사 등이 처음으로 등장했고, 배트맨의 오랜 친구이자 조력자로서 활동했던 제임스 고든이 부패한 경찰 내부에서 고독한 정의의 싸움을 시작한 이야기를 그림으로써 배트맨의 '이어 원'인 동시에 제임스 고든의 '이어 원'으로 탄생기를 발전시켰다.

"저는 박쥐가 될 겁니다.(I shall become a bat.)" 《디텍티브 코믹스》에서 시작되어 『제로 이어』로까지 이어진 전설의 대사. 『배트맨: 이어 원』에서.

(이미지 제공: 세미콜론)

1989년, 『레전드 오브 다크 나이트』

『이어 원』이 다크 나이트의 과거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자 DC는 급기야 1989년 《레전드 오브 다크 나이트》라는 새로운 배트맨 만화 시리즈를 런칭하기에 이른다. 이 시리즈의 첫 다섯 이슈는 브루스 웨인이 고담으로 돌아오기 직전 세계를 주유하던 시절을 다루었다. 여기서 브루스가 박쥐를 숭배하는 부족을 만나 도움을 받았던 일이 추가가 된다. 그리고 『이어 원』의 탄생기 후반부에 박쥐가 창문을 깨부수고 뛰어드는 장면에서 브루스는 원주민 부족과 함께 있으면서 보았던 박쥐 가면을 떠올리며 박쥐가 되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이 시리즈의 커버는 이런 줄거리에 맞춰서 1호에서는 주술사의 박쥐 가면을, 2호에서는 주술사의 박쥐 가면이 깨어지면서 그 아래에서 드러나는 배트맨의 가면을, 3호에서는 배트맨의 가면이 깨어지면서 드러나는 어린 브루스 웨인의 얼굴을, 4호에서는 브루스의 얼굴이 깨어지면서 나오는 해골, 그리고 5호에서는 그 해골이 깨어지면서 다시 드러나는 배트맨의 모습으로 커버 이미지를 이어 나가고 있다.

마치 마트료시카(러시아 인형)처럼, 샤먼의 가면에서 배트맨으로 이어지는 《레전드 오브 다크 나이트》1~5호 표지.

(각 권 이미지 출처: http://dc.wikia.com/wiki/Batman:_Legends_of_the_Dark_Knight_Vol_1_1?file=Batman_Legends_of_the_Dark_Knight_Vol_1_1_Newstand.jpg,

http://dc.wikia.com/wiki/Batman:_Legends_of_the_Dark_Knight_Vol_1_2?file=LODK_2.jpg,

http://dc.wikia.com/wiki/Batman:_Legends_of_the_Dark_Knight_Vol_1_3?file=LODK_3.jpg,

http://dc.wikia.com/wiki/Batman:_Legends_of_the_Dark_Knight_Vol_1_4?file=LODK_4.jpg,

http://dc.wikia.com/wiki/Batman:_Legends_of_the_Dark_Knight_Vol_1_5?file=LODK_5.jpg / TM & Copyright © DC Comics, Inc. ALL RIGHTS RESERVED.)

《레전드 오브 다크 나이트》 6~10호의 '고딕' 스토리 아크에서는 브루스 웨인이 부모를 잃기 전 사립 기숙학교에 다녔던 이야기가 언급된다. 엄격하고 체벌이 심한 학교였고, 교장도 아주 무서운 곳이었다. 브루스는 어느 날 교장에게 호된 체벌을 당하고, 실종된 절친 로버트를 살해한 인물이 교장일 수 있다는 증거를 목격하게 된다. "이 학교는 지옥이야." 브루스는 공포에 떨며 몰래 학교를 빠져나가 아버지에게 전화를 했고, 아버지는 당장에 달려와 교장과 대판 언쟁을 벌이고는 브루스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것을 축하하기 위해 그 첫날 밤 식구들이 함께 극장에 영화를 보러 갔다는 것이다.

1989년, 《배트맨》 430호

1989년의 《배트맨》 430호에서는 극장에 간 사연을 조금 다르게 소개한다. 여기에서 그려진 토머스 웨인은 배트맨 『제로 이어』의 느긋하고 편안한 아버지와는 달리 늘 사업 문제로 고민하며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였다. 브루스는 아버지가 자기와 놀면서 기분전환을 좀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그 당시에 토머스 웨인은 워낙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은 상태라서 자꾸 같이 놀자는 아들에게 그만 손찌검을 하고 만다. 브루스는 아버지에게 뺨을 맞은 그날에 철없이 "아빠가 싫어요, 차라리 죽으면 좋겠어요."라는 소리를 했고, 토머스는 아들에게 용서를 구하면서 온 가족이 영화를 보러 가기로 한다. 그리고 사건이 일어난다. 이 이슈에서는 브루스의 어깨를 짚고 있던 아버지의 손, 브루스의 앞을 막고 있던 아버지의 손바닥, 총을 맞고 브루스의 가슴에서 떨어져나가는 아버지의 손 등 『다크 나이트 리턴즈』에서 그려졌던 장면을 그대로 반복하면서도, 아버지의 손찌검과 브루스의 저주라는 요소를 더해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 주었다.

『다크 나이트 리턴즈』의 장면을 '아버지의 손'에 초점을 맞추어 구성한 《배트맨》 430호의 총격 신.

(이미지 출처: http://bullyscomics.blogspot.kr/)

1989년, 블라인드 저스티스

1989년 《디텍티브 코믹스》 598~600호 세 개의 이슈에 걸친 '블라인드 저스티스' 스토리 아크에서는 브루스 웨인의 옛 스승이 소개된다. 한 명은 극동 지방에서 만난 스승인 추친리고 또 한 명은 헨리 듀카드다. 듀카드와 추친리의 이야기에 관해서는 앞서 "배트맨의 스승들" 연재글에서 정리한 바 있다.

1989년, 추락하는 사나이

'추락하는 사나이'는 1989년에 출판된 《시크릿 오리진 오브 월드 그레이티스트 슈퍼 히어로》에 수록된 여러 슈퍼 히어로 탄생기 중의 첫 이야기다. 『다크 나이트 리턴즈』에 그려졌던 대로 부모와 함께 산책을 나왔다가 혼자서 토끼를 쫓아 뛰던 브루스 웨인은 박쥐굴에 추락하고,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른다. 그 순간 아버지가 나타나서 아들을 끌어안으며 박쥐떼를 내쫓는다. 밝은 곳으로 나온 후 아버지는 조심성 없이 행동하다간 죽을 수도 있다며 나무라지만, 어머니는 아들을 꼭 끌어안으며 안심시켜 준다. "엄마 내가 지옥에 떨어졌던 건가요?" "아니야 아가야. 거긴 그냥 오래된 동굴이야. 이젠 안전해." 다시 시간을 건너뛰어서 부모님이 크라임 앨리에서 범죄자의 총에 살해당하던 『다크 나이트 리턴즈』와 『이어 원』의 장면이 이어지고, 그 이후 브루스의 삶이 추가된다. 브루스는 14살 때 고담 시를 떠나서 전 세계를 여행하기 시작했고, 전 세계의 대학을 돌아다니며 공부했다. 또래들이 친구를 사귀고 연애할 시기에도 부모의 복수와 고담에 정의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목표가 우선이었기에 브루스는 늘 고독했다. 그러면서 '블라인드 저스티스'에서 소개되었던 동서양의 스승들을 만났고, 《레전드 오브 다크 나이트》 시리즈의 박쥐 부족을 만난 끝에 고담으로 돌아와 『이어 원』의 사건을 겪은 것으로 차례로 정리되면서 지난주 마지막에 언급된 『언톨드 레전드 오브 배트맨』처럼 탄생기를 다시 정리한다. 이렇게 1980년대 배트맨은 브루스 웨인의 트라우마와 배트맨이 되기까지의 여정에 초점을 맞추며 이야기를 발전시킴으로써 현대의 독자가 배트맨에게 요구하는 깊이를 부여했다. 1980년대 이후 지금까지 더 세련되고 멋지게 그려낸 다른 탄생기가 많이 있음에도 『다크 나이트 리턴즈』와 『이어원』을 최고의 걸작으로 꼽는 데는 이런 배경도 있다.

배트맨 탄생기의 재집성. 《시크릿 오리진 오브 월드 그레이티스트 슈퍼 히어로》 1호 표지.

(이미지 출처: http://dc.wikia.com/wiki/Secret_Origins_of_the_World's_Greatest_Super-Heroes?file=Secret_Origins_of_the_World%27s_Greatest_Super-Heroes.jpg / TM & Copyright © DC Comics, Inc. ALL RIGHTS RESERVED.)

*이 연재는 세미콜론과 공동으로 기획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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