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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해방운동을 이끈 양반, 강상호를 기억하며

"사람은 모두 똑같은 사람이다. 백정도 사람이고 양반도 사람이다. 인간은 저울처럼 평등하다." 형평운동은 우리 근대사상 최초의 '인권 운동'으로 평가된다. 즉 인간은 누구나 어떠한 이유로든 차별받지 않을 권리가 있으며 차별이란 자체가 인간성에 반하는 그릇된 행동임을 선언한 운동이었다. 차별을 받는 사람들이 일어서서 싸우는 것도 정의로운 일이었지만 그들의 일원도 아니면서, 전혀 차별과 탄압과는 거리가 먼 처지의 사람으로서 설움받는 이들의 손을 잡고 그들과 어깨를 걸고 앞장까지 서고 그 때문에 받아야 할 불명예와 불이익을 기꺼이 감당하는 행위는 인간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인간성의 고갱이일 것이다. 강상호는 그런 사람이었다.

  • 김형민
  • 입력 2016.04.27 07:31
  • 수정 2017.04.28 14:12

좀 길어도 필독해 주셔으면 좋겠습니다. 1923년 4월 24일 진주에서 형평사가 발족했습니다. 그 주도자로 강상호라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의 이야기입니다. 진주시가 '진주대첩기념광장'을 조성하기 위해 형평운동기념탑을 옮기라고 한다는 소식에 그 분의 이야기를 올려 봅니다. 강상호. 모르시는 분들은 꼭 읽어 주세요. 그리고 진주시에 항의해 주세요.

형평운동기념탑 © 형평운동기념사업회

21세기를 헤아리는 오늘날에조차 '백정'이라는 단어를 누구에게 함부로 썼다가는 무슨 봉면을 당할지 모른다. 그러니 조선 왕조 시대는 말할 것도 없고 그 이후 일제 강점기에조차 백정이란 인도의 불가촉천민에 맞먹는 천인 집단이었다. 백정 남자들은 장가를 들어도 상투를 틀지 못했고 부녀자는 결혼해도 비녀를 꽂지 못했다. 남들이 꺼리는 도축을 직업으로 했기에 경제적으로 성공한 경우도 있었지만 기와집과 비단옷은 금물이었고 서민들에게 관복과 승마가 허락됐던 혼례식날에도 백정 신랑이 말을 타고 가다가는 말에서 끌어내려져 내동댕이쳐지기 십상이었다. 더 안된 것은 양반은 그렇다고 치지만 양반 앞에서 꼼짝도 못하고 설설 기던 농민들도 백정이라면 흰눈부터 떴다. 심지어 기생들까지도 백정을 벌레보듯 했다. 성인이 된 백정도 상민(常民)의 자제들에게 존댓말을 써야 했고 "너도 말을 해봐!" 할 때까지 입을 닫고 기다려야 했다.

박경리의 소설 <토지>에는 '백정각시놀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단오놀이든지, 아무튼 구경꾼 속에서 백정이 딸 하나를 잡아낸 기라요..... 그 이삔 가시나를 엎어뜨리놓고 장정들이 번갈아서 올라타고 이랴! 이놈의 소가 와 안가노! 함시로 엉덩이를 철벅철벅 때리는기라요. 뿐이겄소? 목에다 새끼줄을 걸게 하고 네 발로 기게 하고 구경꾼 앞을 돌아댕기는데 그 애비가 소개기(소고기)를 가져와서 게우 풀리났지마는 좀 안된 생각도 들고.....

즉 백정각시놀이는 백정 집 여자들이 눈에 띄면 그야말로 짐승처럼 장난감처럼 '가지고 노는' 못된 풍습이었다. 이 일을 당한 여자 여럿이 목숨을 끊었다고 할 정도로 야만적인 횡포였다.

갑오경장으로 신분제가 철폐되어 백정에 대한 법적인 차별은 공식적으로는 종식됐지만 나랏법이 바뀌었답시고 백정이 큰 갓 쓰고 길을 나서다가는 뉘 집 멍석에 돌돌 말려져 누구 몽둥이에 유명을 달리할지 몰랐다. 심지어 일제가 들어선 뒤에도 그랬다. 법적으로는 평등했지만 호적이라 할 민적(民籍)에는 도한(屠漢), 즉 도살업하는 자라는 뜻의 굵은 글씨가 항상 박혀 있었다. 이러한 백정 차별은 조선 팔도에서 일반적인 현상이었고 심지어 일제 강점기에 들어가서도 백정은 호적에 표시된 천민 취급을 감수해야 했다. 나라가 망하고 세상이 바뀌었지만 백정은 계속 백정이었다. 경상도 진주도 마찬가지였다.

백정이 뭐길래. 소 잡는 것이 그렇게 죄인가. 백정 없이 진주냉면 위 육전은 무엇으로 만들며 진주비빔밥 고명의 하이라이트인 육회는 뭘로 마련한단 말인가."

경상도 진주는 사연이 많은 고장이다. 임진왜란 때 두 번씩이나 혈전이 벌어진 것으로 유명하기도 하며 조선 후기 민란의 시발점이 된 진주민란의 불꽃이 타올랐던 곳이기도 하다. 물산이 풍부하고 교통이 편리하여 낙동강 서쪽을 뜻하는 경상 우도의 거읍이었고 그만큼 뼈대를 자랑하는 양반들도 많고 그만큼 예로부터 지켜 온 전통의 뿌리도 깊은 지역이었다. 이를 달리 말하면 고루하고 완강한 인습(因習)의 위력이 그 어느 곳에 비해서도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백정에 대한 홀대도 그 어디보다도 자심했다.

나라 문이 열린지 수십년, 보수적인 진주에도 서양 선교사들의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생겨났다. 1905년 설립된 진주 교회는 그 시발이었다. 그런데 이 교회를 개척했던 커틀 선교사는 어렵게 어렵게 끌어들인 소중한 신자들이 내세우는 주장에 '대략난감'해지고 말았다. "백정놈들은 싹 내보내소 퍼떡!" 즉 예수는 믿겠는데 백정은 인간이 아니니 함께 죽어도 함께 예배를 볼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조선 사람들의 남녀유별은 익히 알고 있었으나 멀쩡한 사람을 두고 사람이 아니니 한 자리에 있을 수 없다고 우기는 데에는 대책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따로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정리됐는데 1909년 부임한 리알 선교사는 꽤 괄괄하고 원칙적인 기독교인이었다. "이것은 기독교 정신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는 백정들과 일반인(?)들과의 동석 예배를 추진한다.

1909년 5월 둘째 주일, 마침내 15명 백정들이 쭈뼛쭈뼛 예배당으로 들어오자 교회에는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다. 수백명 교인 중 리알 선교사를 따르던 30여 명을 제외학도는 몽땅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린 것이다. "내사 백정하고는 같이 천국 안갈끼라!" 리알 선교사도 보통내기는아니어서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보다 하느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옳지 않느냐?" 하면서 뚝심 있게 버텼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하느님의 뜻은 인간의 억지에 패하는 경우가 많다. 결국 리알 선교사는 49일간의 분쟁 끝에 결국 종전처럼 따로 예배드리는 것에 동의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건들은 진주 지역에 적잖은 파문을 던진다.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 한 형제입니다."를 부르짖는 목사의 설교를 들은 일반인(?)들이고 백정들이고 가슴 속에 의문 한 자락이 피어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백정이 뭐길래. 소 잡는 것이 그렇게 죄인가. 백정 없이 진주냉면 위 육전은 무엇으로 만들며 진주비빔밥 고명의 하이라이트인 육회는 뭘로 마련한단 말인가. 백정들도 자각했고 사람들도 여태까지의 생각을 수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수백년의 세월이 사람들의 몸에 새긴 습관의 벽이란 쉽게 무너지는 것이 아니었다.

3.1항쟁의 폭풍이 온 조선을 휩쓸고 간 뒤의 어느 날, 진주 어느 동네에서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 젊은이들 몇이 백정을 끌고 와 개를 잡으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백정은 고개를 저었다. "못잡겠소."

그때껏 백정을 사람 취급하지 않던 혈기방장한 젊은이들은 분기를 참지 못한다. "백정노무 자슥이 사람 말을 뭘로 알고." 그들은 백정에게 사정없는 주먹질과 발길질을 퍼부었다. "어뜨노 인자 개 잡을 거재?" 하지만 백정은 피투성이가 된 얼굴을 좌우로 흔들었다. 몽둥이찜질까지 퍼부어진 끝에 백정은 끝내 목숨을 잃고 말았다.

피가 거꾸로 솟은 백정의 이웃들이 일본 경찰에 달려가 범인을 잡아 처벌할 것을 호소했으나 일본 경찰은 백정들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부락민'이라고 해서 오늘날까지도 차별의 대상이 되는 천민 집단을 보유한 일본 경찰은 백정들의 울부짖음을 외면한다. "백정은 호적이노 없으니 살인이 성립하지 않는다데스. 살인이라면 죽은 사람이 입증돼야 하는데 호적이 없으니 누가 죽었는지도 알 수 없지 않소까."

백정을 죽인 사람 백정들은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다. 이 이상한 사건의 전말을 혀를 차며 지켜 본 사람이 있었다. 강상호라는 사람이었다."

아마 백정들은 피울음을 삼키며 물러갔을 것이다. 백정을 죽인 사람 백정들은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다. 이 이상한 사건의 전말을 혀를 차며 지켜 본 사람이 있었다. 강상호라는 사람이었다. 지역에서 벌어진 3.1항쟁을 주도하다가 체포돼 8개월 동안 투옥되기도 했던 30대 초반의 청년이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네가 백정이니 개를 잡으라는 요구를 끝끝내 거부하다가 매맞아 죽은 백정처럼, 백정들도 깨어나고 있었다. 어떤 백정들은 경제적으로 성공하여 유복하게 살았지만 아이들을 학교에 보낼 수 없었다. 백정의 자식이 내 아이들과 함께 공부한다면 학부형들부터 난리가 나거나 학교에 찾아와 애들 손목 붙들고 귀가해 버렸다. 서울 유학을 보내 봐도 학교에서 쫓겨났다. 한 번은 새 학교가 서는데 노력 봉사를 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아이를 입학시킬 수 있을 줄 알고 등골이 빠지게 일했지만 막상 학교가 완성된 뒤에는 "입학은 안되고 일한 댓가는 돈으로 받아가시오." 하는 모진 뒤통수를 맞아야 했다.

이 사건을 기화로 뜻있는 이들이 손을 잡고 일어선다. 백정 출신의 장지필, 이학찬 등과 더불어 양반 출신의 강상호가 백정 해방 운동을 주창하고 나선 것이다. 1923년 4월 24일 '형평사' (衡平社)의 깃발은 진주 하늘에서 처음으로 휘날리게 된다. "我等의 계급을 타파하고 모욕적 칭호를 폐지하며, 교육을 장려하고, 참다운 인간이 되는 것을 기하는 것"임을 고창하며 형평사는 "전국의 형평 계급아 단결하라"고 부르짖는다. 강상호는 백정 출신이 아니면서도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형평사 운동에 참여하여 초대 사장을 맡는다. 강상호에게 백정 차별은 실로 부당하고 불의하며 한 개인의 악덕이며 조선 전체의 해악이었다.

백정들의 생활을 개선시키지 않고 한 인간으로 사는 것이 위선이며 식민지 상황에서 조선인들끼리 차별하고 탄압하는 것은 결국 일본의 식민통치를 돕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본디 정의감 넘쳤던 강상호였다. 나라가 망하기 이전,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을 달굴 때 나이 스물의 나이로 진주 읍내에서 "담배를 끊고 나라 빚을 갚읍시다." 호소하며 사람들의 호주머니를 비우던 사람이었고 기미년 3.1운동을 주도하다가 1년 6개월 동안 옥살이도 했다. 하지만 그는 도무지 백정 해방 운동에 뛰어들 이유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양반의 신분을 버리고 부잣집 도련님의 광휘도 벗어 던진 채, 인간 이하의 불가촉천민 백정의 동지를 자처하는 힘겨운 삶에 접어들게 됐다.

"

강상호의 아버지 강재순은 정3품 통정대부를 지낸 사람으로 천석꾼 부자였고 강상호는 그 장남이었다. 양반 가문에 또르르한 부자, 아무리 일제 강점기라고 해도 한평생 유유자적 여유롭게 보내고도 넉넉하게 남을 사람이었다. 하지만 강상호는 스스로 유복한 삶을 저버렸다. 그의 고향 마을 사람들의 세금까지도 근 10년 동안 대납해 준 것은 그의 하고많은 '저버림' 가운데 하나였다. 이제 그는 양반의 신분을 버리고 부잣집 도련님의 광휘도 벗어 던진 채, 인간 이하의 불가촉천민 백정의 동지를 자처하는 힘겨운 삶에 접어들게 됐다.

백정들의 가장 큰 한 중의 하나는 자식 교육이었다. 자신은 모욕을 견뎌도 자식이 부당한 일을 당하는 것을 보면 온몸의 피가 끓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아빠 나는 왜 학교에 못가요?" 폭폭 한숨을 쉬는 어린 것들을 바라보는 백정들의 한이 여북했을까. 하지만 백정의 자식이 학교에 오기만 하면 다른 아이들이 동맹휴업에 들어가는 판에 백정의 아이들의 취학은 머나먼 소망일 뿐이었다.

강상호는 이 문제를 매우 창조적으로 돌파한다. 어느 날 그는 두 아이의 손을 잡고 학교에 나타난다. 강상호가 데리고 온 아이들은 다름아닌 백정의 아이들이었다. 벌써 그 얼굴들을 알아본 학생들이 술렁이고 백정놈의 자식이 왔다 수군거림이 퍼지는 가운데 난처한 얼굴의 교사들과 강상호가 마주앉았다.

"이 아이들을 입학시켜 주시오."

"허허 이거 잘 아시면서..... 이 아이들은 백정의 아이들 아닙니까. 저희가 받을 수가...."

이때 강상필은 품 안에서 호적 서류를 꺼내 교사들의 코 앞에 들이민다. 백정의 아이 둘은 놀랍게도 강상필의 호적에 올라 있었다. "이 아이들은 내 양자들이오. 내가 백정이 아니라는 건 아실 테고, 뭐 달리 안되는 이유가 있으시오?" 그만 교사들은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아니 저 양반이 도대체 무슨 심사일꼬. 백정도 아닌 양반집 장손이......" 돌아가는 강상호의 뒤에 대고 누군가는 뇌까리기도 했을 것이다.

오래된 편견과 차별의식에 닳고 닳은 사람들 사이에서 정의의 각을 세우는 사람은 주위를 불편하게 하게 마련이다."

오래된 편견과 차별의식에 닳고 닳은 사람들 사이에서 정의의 각을 세우는 사람은 주위를 불편하게 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대개 그 불편은 분노로 변한다. 번듯한 양반 출신이면서도 백정놈들의 단체 형평사 사장으로서 대놓고 백정 편이 된 강상호는 백정이 인간임을 인정할 수 없던 사람들의 눈엣가시가 됐고 손쉬운 표적이 됐다. 백정들의 형평 운동은 각지에서 심한 탄압을 받았다. 일제 관헌보다는 당시 평범한 식민지 조선 농민들이 더 이를 갈았다. "백정놈의 자식들이 어딜 감히!" 사람은 때로 기묘하다. 차별받는 이들이 더 차별하며 당해 본 사람들이 더 지독하다. 그들에게 백정보다 더 미운 사람들은 강상호 등 백정도 아니면서 백정을 편드는 사람들이었다.

1923년 5월 25일, 그러니까 형평사가 설립된 지 한 달 정도 지나고, 백정들의 움직임에 진주 사람들이 불편한 낯빛을 감추지 못하던 즈음 한 사건이 일어났다. 탁윤환이라는 자가 형평사 근처의 술집에 가서 술을 달라 했는데 술이 떨어졌다고 하자 내리 호통을 친 것이다. "백정놈들에겐 밥을 팔더니 나한테는 술이 우째 없다 하노!" 욕설이 날아갔다. 그런데 이 소리에 근처에 있던 형평사 사람들의 눈이 뒤집히고 말았다. 그들은 일제히 탁윤환에게 달려왔다.

"니는 뭐하던 놈이고. 일본놈 종노릇하던 놈 아이가. 내 니같은 더러븐 놈 때려죽이고 나도 죽을란다." 이런 말을 한 걸 보면 아마도 탁윤환이란 자는 일본인들을 도와 조선인들한테 위세를 부리던 사람 같다. 실컷 두들겨 맞은 탁윤환은 분을 참을 길이 없었던지 패거리를 몰고 형평사로 몰려왔다. 그때 강상호는 또 한 번 곤욕을 치르게 된다. "형평사에 찾아와 그 사장되는 강상호씨를 불러내어 두 뺨을 무수히 난타하였으며 의복을 찢는 등 봉욕을 주어 이 급보를 들은 진주경찰서에서 10여인의 경관이 달려가 겨우 진압하였더라." (동아일보 1923년 5월 30일자)

이런 사건이 빈발하면서 사람들은 흥분했다. 그들은 형평사에 동조하는 사람들도 백정으로 치부하겠노라 선언하고 형평사 소속 백정들에게는 고기를 사지 않기로 맹세했다. 그들은 '신백정'(新白丁) 즉 원래 백정이 아니었으나 백정이 된 자로는 강상호를 위시하여 신현수, 천석구 등 백정에 동조한 이들의 이름이 적힌 깃발을 휘두르며 시위를 벌였고 강상호나 다른 인사들의 집이나 가게에 찾아가 행패 부리기를 일삼아 했다.

사람은 모두 똑같은 사람이다. 백정도 사람이고 양반도 사람이다. 인간은 저울처럼 평등하다."

강상호의 부인이 나타나면 "신백정여편네!"라고 악을 썼고 강상호에게는 "신백정노무자슥!" 욕설이 빠지지 않았다. 일본 경찰 또한 형평사의 적이었다. 진주경찰서장은 "일본에도 이런 천민집단이 존재하며 평민 대접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들 중에 성공한 자도 없다. 그러니 농청 (형평사에 반대하는 농민 조직)이 간섭하지 않고 형평사가 잘못을 저지른다면 내가 형평사를 해산하겠다."고 기염을 토할 정도였다. 보통 사람들의 비난과 반발, 양반 일문의 외면과 따돌림, 일제 관헌의 방관과 경멸, 그 모든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강상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사람은 모두 똑같은 사람이다. 백정도 사람이고 양반도 사람이다. 인간은 저울처럼 평등하다. (여기서 형평-衡平-이라는 이름이 나왔다)"

형평운동은 우리 근대사상 최초의 '인권 운동'으로 평가된다. 즉 인간은 누구나 어떠한 이유로든 차별받지 않을 권리가 있으며 차별이란 자체가 인간성에 반하는 그릇된 행동임을 선언한 운동이었다. 차별을 받는 사람들이 일어서서 싸우는 것도 정의로운 일이었지만 그들의 일원도 아니면서, 전혀 차별과 탄압과는 거리가 먼 처지의 사람으로서 설움받는 이들의 손을 잡고 그들과 어깨를 걸고 앞장까지 서고 그 때문에 받아야 할 불명예와 불이익을 기꺼이 감당하는 행위는 인간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인간성의 고갱이일 것이다. 강상호는 그런 사람이었다.

형평사 제6회 정기전국대회 포스터 © 진주시청

이후 형평사는 분열과 화해를 거듭하며 수그러들었지만 한 번 고개를 쳐든 사람들은 세상을 새롭게 보는 법이고, 자유의 산소를 호흡한 사람들은 혼탁한 공기를 견디지 못한다. 조선 팔도에서 백정들의 세상은 그 이전과 달랐고 달라지고 있었고 달라질 수 밖에 없었다. 1930년대 초반 조선 총독부는 백정들의 호적에 기입했던 '도한'(屠漢) 글자를 빼기로 결정했고 붉은 점 등을 찍어 백정이라는 표식을 남기는 제도도 없앴다. 최소한 법적이나 행정적으로 백정에 대한 차별은 사라져 갔다.

해방 이후까지도 그 잔재는 남아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한반도 전체를 뒤죽박죽으로 만들었던 전쟁의 폭풍 속에서 백정 차별의 모질고도 고된 역사는 종지부를 찍었다. 강상호는 그 모든 것의 물꼬를 튼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백정해방운동을 통치에 방해되는 불온한 사회운동으로 바라보았던 일제는 강상호 등 형평회 주요 인사들을 집요하게 따라 붙었다. 강상호의 아들에 따르면 일제 시대 내내 강상호는 편하게 앉아서 밥 한 번 먹을 수 있는 일이 드물었다고 한다.

그 와중에 한때 한 마을의 세금을 대신 내 줄 정도로 넉넉했던 천석꾼 재산은 밑 빠진 독으로 고스란히 빠져들었다. 해방 이후 그는 자식들 교육을 못 시킬 정도의 빈곤에 허덕이고 있었다. 해방 뒤 인민위원장 (다른 직책이라는 설도 있다) 같은 좌익 쪽 감투를 섰던 관계로 남아 있던 재산까지 반공 세력에게 몽땅 뜯겼다고 한다. 그러나 강상호의 외침을 마음에 담았던 사람들은 그가 고통 속에 1957년 쓸쓸히 세상을 떠났을 때 다시금 그가 이 세상에 와 살다 간 이유와 가치를 증명하게 된다.

그의 장례는 전국에서 모여든 백정 출신들이 9일장으로 치렀다. 끝없는 만장의 행진으로 이어졌고 진주 시내에서 장지까지는 사람들의 홍수로 넘쳐났다. "

그의 장례는 전국에서 모여든 백정 출신들이 9일장으로 치렀다. 형평장 (전국축산기업조합장)으로 치러진 장례는 끝없는 만장의 행진으로 이어졌고 진주 시내에서 장지까지는 사람들의 홍수로 넘쳐났다. 그때 옛 형평사원에 의해 읽혀진 조사를 인용해 본다. 백 마디 말보다 강상호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오직 선생님만은 그 시대의 속칭 양반계급임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신분의 명예를 포기하고 전 재산을 희사해 가면서 우리들의 고독한 사회적 지위의 인권 해방 계급 타파를 위하여 선봉에 나서서 오직 자유 인권 평등을 부르짖으십며 우리들의 치학의 개방을 부르짖으시며 우리만이 당해 오던 50만의 동포를 위해 주야고심 투쟁하지 않으셨습니까. 위대하십니다. 장하십니다.

아마 그 장대한 장례 행렬을 굽어보며 강상호는 그래도 자신의 삶이 값진 것이었음을 재삼 깨닫고 편히 눈을 감았을 것이다. 아니 그 값을 따질 인격이 아니었으매, 그 일로 편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오히려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어엿한 한 나라의 국민으로 살고 있고 자신을 기억한다는 것에 기뻐하며 웃었을 것이다, 천석꾼 재산을 스스로 바치고 빨갱이로 몰려 남은 재산도 강탈당했다는 비운의 인물 강상호는 그래도 1923년 4월 24일 형평사를 생각하며 웃었을 것이다.

* 이 글은 필자의 저서 <양심을 지킨 사람들>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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