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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통영·거제·울산 조선소를 가다

  • 원성윤
  • 입력 2016.04.25 10:27
  • 수정 2016.04.25 10:34
ⓒ한겨레

“채무자 신아에스비 주식회사-위 채무자는 2015년 11월17일 창원지방법원 제1파산부로부터 파산선고를 받고 본인이 파산관재인으로 선임됐습니다.”

지난 21일 오후 6시께 경남 통영시 도남동 신아에스비(SB) 조선소 출입구에 법원의 공고문이 붙어 있었다. 대형 골리앗 크레인은 멈춰있고, 출입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15만5300㎡ 규모의 작업장에 인적은 없고 ‘카악 카악’ 하는 까마귀 소리만 들려왔다.

신아에스비는 6년여에 걸친 긴 구조조정 끝에 지난해 11월 법원의 파산 선고로 문을 닫았다. 1300여명 노동자는 대부분 사표를 내고 떠났다. 1946년 멸치잡이용 어선을 만드는 회사로 출발한 신아에스비는 2000년대 중·후반 세계 10대 조선소로 커나갔다. 그러나 2008년 세계 금융위기로 신규 수주가 중단되면서 경영위기에 빠졌고, 2010년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에 들어갔지만 정상화에 실패했다. 지난해 4차례에 걸친 매각 시도가 모두 무산되면서 결국 파산 절차를 밟았다.

2013년 삼호조선과 21세기조선에 이어, 신아에스비까지 중소형 조선소 3곳이 잇따라 쓰러지자 주변 상권은 직격탄을 맞았다. 조선소 노동자들이 구내식당처럼 드나들던 공장 바로 앞 돼지국밥집은 문을 닫았다. 근처 횟집 주인은 “하루 종일 앉아 있어 봐야 사람 구경하기 힘들어졌다. 관광객이나 가끔 찾는다”고 말했다. 빈방도 넘쳐나고 있다. 보증금 200만원에 월세 25만원이면 13평짜리 원룸을 구할 수 있지만 좀처럼 찾는 사람이 없다. 부동산 공인중개사무소 관계자는 “빈방이 많아 언제라도 이사올 수 있다”면서도 “인적이 드물어 밤에는 걷지 말고 차를 타라”고 조언했다.

노동자들은 통영을 떠나 대형 조선사들이 있는 거제로, 울산으로 옮겨갔다. 하지만 구조조정의 발톱은 이제 거제를, 울산을 덮칠 준비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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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출 1순위, '물량팀'

조선업 불황은 대형 조선소까지 번진 상태다.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 삼성중공업 등 대형 조선 3사가 지난해 해양플랜트 사업에서 8조5000억원의 적자를 입은데다 ‘수주 절벽’이 들이닥쳤기 때문이다. 현대중공업만 2억달러(3척)를 따냈을 뿐 대우조선해양과 삼성중공업은 올해 들어 단 한 척도 수주하지 못했다. 현재 건조 중인 해양플랜트 인도가 6월부터 시작돼 올해 중에 마무리되면 2만여명이 일자리를 잃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실직은 하청노동자부터 시작될 것이다. 대형 조선 3사에서 근무하는 사내하청노동자는 3월 말 현재 9만5천명가량이다. 원청 생산직 노동자 한 명당 하청노동자 3.5명이 일한다. 특히 최근 몇년 대형 조선사들이 주력한 해양플랜트 사업에서는 생산직 노동자 10명 가운데 9명이 하청노동자다.

하청노동자 가운데서도 특정 프로젝트의 작업을 재하청받아 일하는 계약직 노동자를 ‘물량팀’이라고 부른다. 조선업계에 2만명 안팎이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들은 조선소에서 급한 ‘물량’이 나왔을 때 10~50명씩 팀을 짜서 신속하게 작업을 해서 납품하는 일을 맡는다.

조선경기가 어려워지면서 양대 조선소가 있는 경남 거제시의 조선소 협력업체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거제시 GMP산업 근로자들이 일하고 있다.

원청-하청-재하청으로 이어지는 조선소 작업라인의 끝자리인 물량팀에 노동자들이 들어가는 이유는 임금이 다소 높기 때문이다. 4~5년 경력의 협력사 하청노동자는 시급이 6000~7000원인 데 비해 물량팀 노동자는 시간당 1만원이 넘는다. 지난 20일 거제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 근처에서 만난 물량팀 노동자 김아무개(52)씨는 “호황일 때는 여기저기 옮기면서 일당을 높일 수 있어 좋았다”고 말했다. 이제는 달라졌다. 일감이 끊겨 퇴출 1순위로 꼽힌다.

김씨는 한때 일당 20만원을 받았다. 그러나 이전 속했던 하청업체가 폐업한 뒤 새로 들어간 업체는 일당을 2만원 깎으라고 요구했다. 5월부터는 그마저도 20% 줄이겠다고 통보했다. 그러나 항의하는 사람은 없다. 김씨는 “일감이 없어서 더 이상 옮길 데도 없으니까 다들 입을 꼭 다물고 있다. 괜히 나섰다가 찍히면 나만 손해 아니냐”고 말했다.

김씨는 지난해 대우조선에서 일한 임금을 아직 받지 못했다. 그는 “내가 30년 동안 조선 쪽에서 일했는데, 대형업체에서 하청으로 일하고 임금이 체불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김씨가 소속된 업체가 대우조선해양에서 매달 지급받는 기성금(업무비)이 줄었다며 월급을 차일피일 미루더니 결국 폐업신고를 해버렸다. 업체 폐업으로 정부가 대신 지급하는 체당금이 거제·통영·고성 지역에서만 올해만 1020명, 48억원 수준이다.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501명·28억원)에 비해 2배 가까이 증가한 것이다.

일감이 줄어들면서 원청업체가 하청노동자를 선별해 고용승계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침묵은 더욱 깊어졌다. 하청노동자들끼리 “너희 회사는 월급 잘 나오냐”고 안부 인사 묻는 게 고작이다.

물량팀은 하청업체와 프로젝트 계약을 맺었기 때문에 일이 끝나면 다른 조선소로 자연스레 옮긴다. 물량팀 스스로도 ‘해고’라는 인식이 없는 편이다. 그러나 불황이 닥친 이제는 법적 보호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사업자등록조차 하지 않은 물량팀장이 많아 임금체불이나 산업재해가 발생해도 법률상 사용자 책임을 묻기 어렵다. 고용보험에도 가입돼 있지 않아 실업급여도 받기 힘들다.

■ 임금 못 받는 하청노동자

하청노동자 정아무개(38)씨는 지난 2년간 대우조선해양에서 같은 일을 하고 있지만 소속 업체는 3차례나 바뀌었다. 그의 작업복 이름표에는 여전히 옛 업체명이 적혀 있었다. 그는 “또 업체가 문 닫고 옮겨야 할 텐데 싶어서 그냥 놔뒀다. 다들 그렇게 한다”고 말했다. 임금은 오히려 줄어들고 있다. 정씨의 월급은 200만원을 겨우 넘지만 일은 더 힘들어졌다.

현대중공업 하청업체들도 잇따라 임금 삭감을 예고했다. “임금 10%, 수당 30%를 깎으면서 남을 것인지, 아니면 다른 조선소로 옮길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임금을 삭감했는데 6월 이후에 해고되면 퇴직금까지 반토막난다. 지금 사표를 내고 퇴직금이라도 제대로 챙기는 게 낫다. 그러나 조선업이 불황이라 다른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으니 결단을 내리기가 어렵다.” 지난 22일 울산 전하동 현대중공업 조선소 앞에서 만난 정아무개(49)씨의 말이다. 올해 들어 3월까지 현대중공업 사내하청노동자 2600여명이 이미 회사를 떠났다. 8년간 현대중공업의 하청노동자로 일해온 정씨는 “이제 내 차례가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월급 300만원으로 중학교 3학년, 초등학교 6학년 두 아들을 키우려면 항상 빠듯하다. 업체는 최근 “한 달에 일주일씩 무급휴직을 해야 한다”고 통보했다. 근로기준법은 사용자의 귀책사유로 휴업을 하면 사용자는 휴업기간 중 근로자에게 평균임금의 70% 이상을 수당으로 지급하도록 정하고 있지만, 현실에선 지켜지지 않는다.

경남 통영시 중소 조선사들이 위치했던 동네엔 불황의 그림자가 이미 짙게 드리웠다. 폐업 공고가 붙어 있는 조선업체 ‘신아에스비’ 인근 도남동 상가에 지난 22일 오후 국밥집을 제외한 모든 가게가 문을 닫은 모습이다. 통영/김성광 기자

문제는 앞으로다. 거제시 장평동 삼성중공업 앞에서 술집을 하는 김아무개(43)씨는 “지금은 잔업과 특근이 3분의 1로 줄어든 상태지만 올 연말에는 도크(배를 만드는 작업장)가 빌 것이라고들 한다”고 말했다. 김씨는 10년간 삼성중공업 하청노동자로 일하다가 3년 전 술집을 차렸다. 김씨는 “10년 동안 이런 불황은 처음이다. 더 불안한 건 최악의 상황이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 떨고 있는 원청 정규직

고용불안은 하청노동자를 넘어 원청 정규직 노동자에게로 향하고 있다. 지난 20일 현대중공업 노동조합 누리집 게시판에는 ‘비상경영체제 선포’라는 글이 떴다. 최대 3000명의 직영 노동자(정규직)를 구조조정하고, 업무를 통폐합해 100개 이상의 부서를 없애기로 했다는 내용이었다. 현대중공업 홍보팀 관계자는 “아직 확정된 구조조정 방안은 없다”고 밝혔지만 구조조정 계획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았다. 현대중공업은 이르면 오는 27일께 구체적인 내용을 담은 담화문을 발표할 계획이다.

거제시 삼성중공업 전경.

3000명은 3월 말 현재 전체 직영 직원(2만4895)의 10%가 넘는 규모다. 감원 대상은 사무직 과장급 이상, 생산직 기감급(사무직 차장급에 해당), 계약직·파견직 등 비노조원이 될 것이라고 현대중공업 노조 쪽은 전망했다. 현대중공업은 지난해 초에도 사무직원을 중심으로 1300여명을 감원한 바 있다. 대우조선해양은 2019년까지 직원을 지금보다 3000명 적은 1만명 수준으로 줄이기로 했고 삼성중공업 역시 상시 희망퇴직제를 운영하고 있다. 현대중공업의 한 사무직 직원은 “가족들은 서울에 있고 몇년째 울산에서 홀아비 생활을 했는데, 아들이 대학 갈 때까지 회사가 살아남을지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은 또 해양플랜트 설계 인력이 있던 서울 사무소를 접고 해당 인력을 울산 본사로 이동시킬 방침이다. 이동 대상이 된 대우조선해양 직원은 “인력 구조조정을 한다는데 아이들을 다 데리고 내려가야 할지, 아니면 이제라도 다른 회사를 알아봐야 할지 고민스럽다”고 말했다.

현대중공업에서는 올해 들어 4개월 동안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가 5건이나 발생했다. 하창민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지회장은 “구조조정 바람이 휘몰아치면서 직영, 하청 할 것 없이 노동 의욕을 상실하고 있다. 여기에 물량 감소로 업체 간 경쟁이 심해져서 산업재해가 잇따르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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