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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욱씨남정기' 옥다정은 정의롭기 때문에 욱하는 것이 아니다

  • 박수진
  • 입력 2016.04.23 10:44
  • 수정 2016.04.23 10:53

중소 화장품회사 러블리즈에 사내 성추행 사건이 발생한다. 사건의 가해자는 사장의 처남이자 회사의 ‘실세’로 불리는 신상우 총무팀장, 피해자는 비정규직인 장미리 사원이다. 총무팀장이 정규직 전환을 빌미로 사원을 불러내 성추행한 것이 사건의 전말이다. 사건은 예측 가능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총무팀장은 무슨 일이 있었냐며 뻔뻔하게 나오고, 같은 팀의 박현우 대리는 성추행 현장을 목격했지만 총무팀장의 협박으로 입을 다문다. 장미리 사원은 고민하다가 마케팅본부 옥다정 본부장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는다. 옥다정 본부장은 증인도, 증거도 없다는 얘기를 듣고 이렇게 말한다. “그렇다면 미리씨가 하는 말을 믿지 않을 겁니다. 그쪽에서는 미리씨를 거짓말쟁이로 만들고 문란한 여자로 만들고 구경꾼들은 미리씨를 범죄의 피해자가 아니라 야설의 주인공으로 바라볼 거예요. 싸울 준비 됐습니까?”

장미리 사원과 옥다정 본부장은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한다. 총무팀장은 1단계 “내가 언제 그랬어?”, 2단계 “내가 이래서 여자들이랑 직장생활을 못 해요. 지가 불리하다 싶으면 꼭 이런 식으로 사람 걸고넘어져요”, 3단계 “여자애가 들이대는데 난들 어쩝니까? 젊은 애가 몸을 날리는데 남자가 동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를 시전한다. 회사 차원에서 진상조사를 하지 않으면 경찰에 고발하겠다는 옥다정 본부장의 말에 사장은 “담당 부서장이 왜 일을 키우려고 하느냐? 회사 이미지는 어떻게 하느냐?”며 발끈하고, 옥다정 본부장은 이렇게 대답한다. “담당 부서장이 부하 직원 편을 드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회사 이미지가 걱정된다면 고발당할 일을 만들지 말았어야죠.” 옥다정 본부장은 발로 뛰며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고 사실관계를 앞세워 총무팀장의 무릎을 꿇게 한다. 장미리씨에 대한 사과와 총무팀장의 직위 해제 3개월, 감봉 6개월도 받아낸다. 지난 9일(토) 방영된 JTBC 드라마 <욱씨남정기> 8회의 줄거리다.

<욱씨남정기>는 ‘꼴갑(甲) 저격 사이다 드라마’라는 수식어답게 대기업과 하청업체의 갑을관계부터 조직 내의 갑을관계까지 다양한 갑과 을의 이야기를 다룬다. 드라마의 주인공은 ‘욱’하는 성격 때문에 ‘욱씨’라고 불리는 옥다정(이요원) 본부장과 소심한 성격의 남정기(윤상현) 과장이다. 이 드라마는 1회 1.1%의 시청률로 시작해 8회에 2.4%를 기록했다. 지난 1년 동안 제이티비시 금토드라마의 시청률 중 최고치다. 이제 절반을 지난 <욱씨남정기>는, 적어도 지금까지는 <미생><직장의 신><송곳> 등 직장을 배경으로 한 좋은 드라마와 어깨를 나란히 할 법하다. 특히 여자 주인공인 옥다정 캐릭터만큼은 그 어떤 직장드라마 속 여성 캐릭터보다, 아니 남녀 통틀어 독보적이다.

옥다정 캐릭터는 직장드라마계의 슈퍼히어로나 다름없다. 옳지 않은 계약 조항이 가득 쓰여 있는 계약서는 상무 앞에서 갈가리 찢고, 이에 분노한 상무가 자신을 향해 과일을 던지려고 하자 맥주병을 집어든다. 이유 없이 제품을 반품 처리한 상무를 찾아 호텔 남성 사우나에 쳐들어가기도 한다. 옥다정의 ‘욱’은 상대를 가리지 않는다. 갑이든 을이든 병이든 상관없이 할 말은 다 한다. 부당한 계약을 거부하지 못하는 하청업체에는 “협상할 생각도 못 하고 호구 노릇 계속 해주니까 매번 당한다는 생각은 못 합니까?”라며 일갈하고, 접대에 대한 헛된 기대를 갖고 있는 남정기에게는 “억울하고 부당한 대접 참아줄수록 더 많은 걸 요구하는 게 저놈들이라고. 그 힘에 매달리는 남정기, 당신 같은 사람이 세상을 그렇게 만드는 거라고”라며 소리친다. 모두를 향한 옥다정의 ‘욱’은 거칠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불필요한 사회의 권력으로부터 그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매우 중요한 무기다. ‘욱’함으로써 갑을관계에 따른 사회적 프로토콜에 혼란을 일으켜 갑과 을 모두 자신의 위치를 헷갈리게 하고, 그 혼란을 틈타 자신의 생각을 정확히 전달한다.

옥다정의 ‘욱’이 흥미로운 것은 그것이 정의를 앞세우거나 괜한 오지랖으로 누군가를 위한다는 대의가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한 선택이라는 점이다. 옥다정의 말과 행동의 중심에는 일에 대한 자부심과 자기 자신에 대한 존중이 있다. 부당한 계약서를 찢는 것도, 대기업에서 나와 중소기업으로 들어가는 것도, 그곳에서 최선을 다해 일하는 것도 자부심을 갖고 일하고 싶어서다. 앞서 설명한 성추행 사건 에피소드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성추행 현장을 목격한 박현우(권현상) 대리는 입을 다물고 있으면 성과급을 챙겨주겠다는 총무팀장의 제안을 받고 사건에 대해 증언을 해달라는 장미리(황보라) 사원의 요청을 거절한다. 박 대리는 괴로움을 남정기에게 토로하고, 옥다정은 그런 박 대리의 상황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증언을) 강요하지 마세요. 그 자리에 있었다면 박 대리도 피해자입니다. 감당하기 힘들 거예요.” 이 대사는 성추행 사건이 원치 않게 그 사건을 목격한 박 대리를 포함해 이로 인해 직간접적으로 굴욕감을 느낀 직원들 모두의 문제라고 말한다. 성추행 사건을 정확하게 해결해야 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로 장미리 사원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자부심과 자존심을 위해서다. 각자 자기 자신을 존중하고 지키기 위해 선택하고 때로는 ‘욱’하는 것이 공존을 위한 최선의 방법일지 모른다고 이 드라마는 말한다.

‘일 잘하는 여자=독한 여자, 센 여자’라는 직장생활의 공식에 따라 옥다정은 온갖 소문을 달고 다닌다. 주변에서는 동료들보다 승진이 빠르다는 이유로 ‘소파 승진’이라고 뒤에서 손가락질하고, 이혼 경력을 언급하면서 ‘얼마나 성격이 지랄 맞으면’이라고 혀를 찬다. 그러나 옥다정은 이런 뒷얘기에 신경 쓰지 않는다. 자신의 이혼 경력을 두 번이라고 얘기하는 사람에게는 두 번이 아니라 세 번이라고 정정해주고 “남들이 뭐라 그럴까봐 무서워서 내 할 바 못 하고 사는 거 안 하고 산다”고 단언한다. 일터에서 동등한 위치의 동료가 아닌 성적 대상으로 바라보고, 사생활과 직장생활을 구분하지 못하고 추측만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사람들에게 옥다정은 코웃음을 친다. 옥다정은 자신을 믿지 못하고 직장 내 인간관계를 의심해서 이혼한 첫 번째 전남편인 지윤호에게 이렇게 말한다. “여전히 남자 여자 관계를 ‘썸씽 스페셜’로만 보고 있잖아. 근데 세상엔 말이야, 남자 여자도 있고 상사 부하도 있고 동료도 있고 친구도 있어.”

남정기 캐릭터도 흥미롭다. 소심한 성격의 남정기는 ‘지는 게 이기는 거’라고 믿으며 손해를 보더라도 참고 또 참는 ‘그릇이 작은’ 남자다. 자신을 의지하는 가족과 회사 동료들까지 수많은 사람에게 치이면서도 싫은 소리 한 번 하지 않는다. 그랬던 남정기가 옥다정을 만나며 남이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기 시작한다. 남자 주인공이지만 그는 완성형이 아닌 성장형 캐릭터다. 이른바 ‘스펙’은 별 볼 일 없어도 그가 성장할 수 있는 이유는 문제를 해결할 때마다 새로 알게 된 것, 깨친 것을 바로 흡수하는 열린 성격 때문이다. 반면 옥다정의 전남편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멋져 보이지만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하지 않는다.

이 드라마의 단점은 사사건건 옥다정을 걸고넘어지는 대기업 황금화학의 김환규(손종학) 상무 캐릭터다. 드라마 <미생>에서 인턴 안영이(강소라)를 괴롭혔던 ‘개저씨’ 마부장의 업그레이드 버전인 김환규는 옥다정이 여자라는 이유로 온갖 비하와 차별의 말을 퍼붓고 욕설도 서슴지 않지만 그 능력만큼은 인정한다. 김환규는 옥다정이 회사를 옮기자 그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로 옥다정이 추진하는 일마다 방해공작에 나선다. 김환규의 캐릭터는 옥다정의 ‘욱’을 보여주기에 가장 적당한 상대다. 그러나 이 캐릭터는 ‘악역을 위한 악역’이다. 드라마 자체가 판타지에 가깝다고 해도 이렇게 제멋대로 회사 일을 결정하고 사원도 아닌 팀장에게 이 정도로 비상식적인 폭언을 퍼붓는 캐릭터를 가져다놓은 것은 “마음껏 미워하라”고 지시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쉽게 미워할 수 있는 납작한 악역의 존재는 극의 긴장감을 떨어뜨린다.

<욱씨남정기>는 직장드라마에 있어, 또 남성과 여성의 캐릭터에 있어 흥미로운 텍스트를 제공한다. 직장드라마지만 공동체가 아닌 개인에 주목하고, 남성 주인공과 여성 주인공에게 기대되는 역할을 뒤바꿔 성별 이슈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이렇게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드라마를 보는 것, 꽤 즐거운 일이다.

안인용 TV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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