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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사회에서 생존할 수 있을까

이미 가습기 살균제 사용으로 인한 사망자 수는 150명이 넘었다. 그러나 짐작할 수 있듯이, 이것은 공개적으로 드러난 최소한의 숫자일 뿐이다. 1994년부터 판매된 가습기 살균제의 사용자는 80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역학조사로 그 유해성이 밝혀지기 전 '원인 미상 폐질환'이라는 이름으로 사망한 사람들의 수가 얼마였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사망에는 이르지 않았지만 망가진 폐로 인해 아파하고 고생했을 것이다.

  • 김승섭
  • 입력 2016.04.19 08:14
  • 수정 2017.04.20 14:12

해마다 겨울이 되면 대학병원 응급실에는 어떤 약을 써도 듣지 않는 폐질환 환자들이 찾아왔고, 이들 중 몇몇은 머지않아 사망했다. 호흡곤란을 겪는 환자의 상태를 살펴보면 폐 조직이 점차 섬유화되어 굳어가는 간질성 폐질환의 일종이었는데, 그 원인이 명확하지 않았다.

2011년 4월 서울시내 한 대학병원에 같은 증상을 보이는 20~30대 산모 7명이 입원했고, 그중 4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잇따라 영유아들이 비슷한 증상으로 사망하고 나서야 역학조사가 시행되었다. 그해 11월 질병관리본부는 조사 결과 이들을 사망에 이르게 한 원인이 가습기 살균제라고 발표했다.

'가습기 당번'이나 '가습기 메이트'와 같은 이름을 달고 판매되던 제품들은 겨울철에 주로 사용하는 가습기의 청결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살균 99.9%! 안심하고 쓰세요'라고 광고하던 그 살균제가 실은 이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주범이었다.

가습기 살균제가 처음 한국에서 판매된 시기는 1994년이다. 세계 최초로 한국에서 판매된 이 제품에는 살균을 위한 '폴리헥사메틸린 구아니딘'(PHMG) 등의 화학물질이 포함되어 있었다. 외국에서 이 물질들은 세정·살균제 용도로 물건을 씻거나 닦아내는 데 사용되고 있었기에, 호흡기로 흡입했을 때 나타날 수 있는 부작용에 대해서는 당시 알려진 바가 없었다. 더군다나 가습기 살균제는 공산품으로 분류되어 '품질경영 및 공산품 안전관리법'의 적용을 받게 되면서, 그 안전성에 대한 검토는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살균 99.9%! 안심하고 쓰세요'라고 광고하던 그 살균제가 실은 이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주범이었다."

'살균 99.9%' 광고하던 제품이 사람 잡아

2013년 9월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임아무개군이 산소호흡기를 단 채 학교 준비물을 챙기고 있다. 망가진 폐로 인해 아파하고 고생할 날들이 아득하다. 한겨레 김명진 기자

이미 가습기 살균제 사용으로 인한 사망자 수는 150명이 넘었다. 그러나 짐작할 수 있듯이, 이것은 공개적으로 드러난 최소한의 숫자일 뿐이다. 1994년부터 판매된 가습기 살균제의 사용자는 80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역학조사로 그 유해성이 밝혀지기 전 '원인 미상 폐질환'이라는 이름으로 사망한 사람들의 수가 얼마였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사망에는 이르지 않았지만 망가진 폐로 인해 아파하고 고생했을 것이다.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피해 사건들이 조명되면서, 유족들은 이런 위험한 제품을 제조한 회사와 이를 제대로 규제하지 못한 정부기관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연이은 패소였다.

2015년 2월 재판부는 "공산품 안전법에 의하면 그 당시 가습기 살균제 제조업자에게 스스로 안전을 확인해 신고하도록 강제할 근거가 없었고, 그 밖에 살균제의 성분이나 유해성을 확인할 의무나 제도적 수단이 없었다"며 정부기관에 법적 책임이 없다고 선고했다. 기업의 제품은 당시 정부 규정에 따라 제조했으니 법을 어기지 않았으며, 정부는 그 유해성을 확인할 제도를 가지고 있지 못했으니 책임이 없다는 주장이었다.

우리는 시장에서 물건을 구입할 때, 설명서에 나온 대로 제품을 사용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장에 나오기까지 그 제품이 통과해야 하는 규제가 우리를 지켜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건강을 지키고자, 특히 하루 종일 집에 머무는 경우가 흔한 임산부들이 자신과 태아를 위해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했다. 그러나 이들은 그 시스템을 믿고 따랐다는 이유로 사망했다.

그에 대해 정부기관은 당시 규제로는 가습기 살균제의 유해성을 확인할 수 있는 제도가 없었고, 당시 과학기술 수준으로는 가습기 살균제의 결함을 알 수 없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들의 죽음에는 누구도 책임이 없는 것인가?

새로이 개발·사용되는 여러 물질들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이를 규제하기 위해서 또 다른 '충분한 숫자의 피해자'가 나타나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결과를 보여줘야 하는가. "

화학물질 독성, 충분한 정보 없어

매년 수십 종의 새로 개발된 화학물질이 쏟아져나오고, 이를 공장에서 제품 생산에 사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는 그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나 제품을 사용하는 소비자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위험물질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많은 경우 우리는 이러한 화학물질이 어떤 독성을 가지고 있는지 충분히 알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수십 년 전 석면을, 벤젠을, 카드뮴을 위험하다는 생각 없이 사용했다. 이제는 석면이 폐암과 악성 중피종을, 벤젠이 혈액암을, 카드뮴이 이타이이타이병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노동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20세기 초 핵폭탄이 처음 개발되었을 때, 방사선 노출의 위험성을 모르던 상황에서 사막에서 진행되는 핵실험을 멀리서 지켜보는 관광 프로그램이 진행되기도 했으니까.

우리가 석면과 방사선 노출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병들고 죽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새로이 개발·사용되는 여러 물질들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이를 규제하기 위해서 또 다른 '충분한 숫자의 피해자'가 나타나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결과를 보여줘야 하는가. 가습기 살균제 사건처럼 충분한 사람이 죽게 될 때까지 그 위험을 용인하고 지낼 것인가. 과학기술의 진보에 따라 삶이 급변하는 오늘날, 우리는 과거와 동일한 패러다임으로 안전하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미국 매사추세츠주립대학 데이비드 크리벨(David Kriebel) 교수는 2009년 <충분한 증거란 무엇인가: 원인-결과에 대한 논의>라는 제목의 논문을 출판했다. 이 논문에서 크리벨 교수는 '건강을 다루는 분야에서 규제를 위한 충분한 증거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고고학에서는 단 한 개의 사례 보고만으로도 상대적으로 충분한 근거가 된다. 얼마 전 한국인이 참여한 한 연구팀에서 수컷 육식공룡이 짝짓기를 위해 구애하던 흔적을 담은 화석을 세계 최초로 발견했을 때, 그 사례가 하나라는 이유로 신빙성이 의심받지는 않았다. 그러나 고고학과 달리, 분자생물학에서는 엄격하게 통제된 환경에서 실험을 통해 밝히지 않으면 그 결과는 신뢰받지 못한다.

사전 예방 원칙은 필수적 선택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이 제조회사와 정부기관을 상대로 소송을 냈지만 돌아온 것은 연이은 패소였다. 2015년 2월 법원의 패소 판결 직후 피해자와 가족들이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한겨레 김태형 기자

다시 가습기 살균제 사례를 생각해보자. 한 명의 피해자로 살균제가 문제였다고 주장하는 것은 비합리적이고, 위험성이 있을 수 있는 살균제를 통제된 환경에서 인간에게 투여하는 것은 비윤리적이다. 그렇다고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충분한 숫자의 피해자가 나와 규제를 위한 신뢰할 수 있는 근거가 만들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은 더 이상 대안이 될 수 없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것은 21세기 이 사회가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지에 대한 생존의 문제다. 크리벨 교수는 위험을 바라보는 사회의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며 '사전주의 원칙'(Precautionary Principle)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언제 올지 모르는 '충분한 근거'를 기다리는 대신, 이제 불확실성 속에서 행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핵심 원칙 중 하나는 새로운 물질을 사용하고자 할 때 그것을 사용하려는 기업과 사람들이 그 유해성에 대한 데이터를 제시하고 사회를 설득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로 인해 직접적으로 영향받는 대중이 관련된 의사결정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패러다임의 변화는 불가능한 목표나 이상이 아니라 많은 국가에서 실제로 집행되고 있다. 유럽연합은 2007년 6월1일부로 화학물질에 대한 새로운 규제인 '리치'(REACH·Registration, Evaluation, Authorization and Restriction of Chemicals)를 실시했다. 이 규제의 핵심은 독성 정보가 없는 화학물질은 사용 및 판매를 금지하고, 그 독성을 확인하기 위한 비용을 국민 세금이 아닌 화학물질 사용으로 이득을 보는 기업이 지불하도록 하는 것이다. 유럽연합이 이토록 강력한 규제를 실시한 이유는 이것이 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안전하게 살기 위한 필수적 선택이기 때문일 것이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 이후 한국에서도 비슷한 고민이 진행되어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이 2013년 5월22일 제정되었고, 2015년 1월1일부터 시행되었다. 이 법은 화학물질 자료를 정리하고 기록하도록 하며, 아직 위험이 파악되지 않은 물질의 사용을 차단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연합의 '리치'와 비교했을 때 이 법이 과연 한국 사회 구성원들의 안전을 얼마만큼 보장할 수 있을지는 확신하기 어렵다. 세계적으로 생식독성 물질이나 발암물질로 알려진 화학물질 등이 1차 등록 대상에서 빠져 있으며, 어린이 장난감이나 문구류 관련 제품은 정보 제공에서 제외되는 등 규제 대상 제품 목록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국민 안전 위한 '최소한의 규제' 중요

얼마 전 이 규제조차 느슨하게 만들기 위해 정부가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신문기사를 접했다. 시행된 지 1년이 채 되지 않은 그 법의 시행규칙은 지난해 10월 이미 한 차례 수정되었다. 신고 절차를 축소하고, 영업기밀 유출 가능성을 이유로 화학물질을 '제품명'으로 신고할 수 있게 한 것이다. 현장의 상황을 반영하지 못한 법이 적절히 수정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규제 완화가 곧 경제 활성화라는 절박한 심정으로 불합리한 규제를 걷어내겠다"는 황교안 국무총리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우려가 앞선다. 한국 사회에서 만병통치약처럼 통용되는 '경제 활성화'를 이유로 국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규제를 포기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 이 글은 <한겨레21>에 2016년 1월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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