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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비박스'를 집어치워라

아동복지에 대하여 말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아이를 안전하게 유기할 수 있게 보장할 것인가 이야기하는 것이 불편한 이유는 그러한 미봉책이 아동복지를 위한 제도개선을 지연시키거나 가로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선한 의도가 결과적으로 제도적인 악을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베이비박스'는 참 기이한 단어이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존재인 '아기(베이비)'와 사물을 담거나 포장하는 데 사용되는 '박스'가 한 단어로 연결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우리사회에서 '베이비박스'는 아이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미담으로 통용되고 있다. 어쩌다 우리 아이들에게 '베이비박스'가 유일한 생명의 구원줄로 여겨지게 되었을까.

또 영아유기다. 이번엔 베트남 출신 유학생이 지하철역에 아이를 유기했다고 한다. 영아유기 사건이 보도될 때마다 입양특례법이 문제로, 베이비박스가 해결책의 일환으로 제시된다. 입양특례법의 개정으로 입양 허가를 위해서는 법원에 아이의 출생신고서류를 제출하게 되었고, 그 결과 출생사실을 밝히고 싶지 않은 미혼모들이 아동 유기를 선택한다는 논리다. 입양을 포기하는 엄마와 아이들을 위해 베이비박스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 기사도 제목에서부터 "(전략)출생신고가 거북해"라고 해 입양절차 상 출생신고를 전면에 문제 삼고 있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이번 사건의 당사자인 베트남 출신 유학생은 어차피 국내 출생신고와도, 입양제도와도 거리가 먼 '외국인'이다. 외국인 미혼모가 처하는 더욱 열악한 임신과 출산 상황에 대해서는, 사회적 보호가 필요한 이주아동의 인권의 취약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기사는 그저 입양특례법-영아유기-베이비박스라는 폐쇄적인 논리를 맹목적으로 따르고 있다.

입양특례법-영아유기-베이비박스라는 폐쇄적인 논리를 맹목적으로 따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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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는 대구의 한 공중화장실에 갓난아이를 버린 외국인 여성이 경찰에 검거되었다. 지나가던 사람의 신고로 119 구조대에 구조된 아이는 다행히 건강에 이상이 없었다. 동남아 출신의 여성은 여행비자로 입국해서 섬유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소위 말하는 '불법'체류 신세였다. 생계가 막막한 상황에서 출산과 육아에 부담을 느낀 이주여성의 선택은 영아 유기였던 것이다.

영아유기 범죄에서 구조된 아이를 위한 다음 조치는 무엇이어야 할까. 기사에 따르면 아이는 조만간 엄마와 함께 본국으로 추방될 예정이라고 한다. 아이가 '한국인'인 아이였다면 최소한 아동학대 여부를 조사하고, 부모와의 분리 조치를 포함한 아동복지법상 아동보호조치를 검토했을 것이다. 이 사례에서는 아동학대에 대한 심사도, 아동복지법상 개입도 전혀 고려되지 않고 있다. 아이가 '외국인'이기 때문이다.

아동유기가 발생하는 맥락은 같은 한국 국적의 여성들 내에서도, 국적이 다른 경우에는 더욱 중층적, 복합적이다. 따라서 이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 역시 복잡하고 섬세해야한다. '입양특례법-영아유기-베이비박스'라는 단순한 논리 연결이 불편한 이유이다. 만약 이 삼단논법을 따른다면 위에서 언급한 유기되는 이주아동을 위한 해법은 이주아동 전용 '베이비박스'의 설치이다. 그러나 외국인 미혼모에게 입양특례법이 아이를 유기하는 이유로 작동되지 않듯, 베이비박스가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 당장은 외국인인 부모가 생계가 막연해 아이를 돌볼 수 없는 상황에 처해있다면 잠시 고아원과 같은 아동복지시설에 아이를 맡길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외국인인 아동이 아동학대의 피해자로 의심된다면, 조사하고 구조하여 아이를 돌볼 수 있어야 한다.

아동복지에 대하여 말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아이를 안전하게 유기할 수 있게 보장할 것인가 이야기하는 것이 불편한 이유는 그러한 미봉책이 아동복지를 위한 제도개선을 지연시키거나 가로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아동복지법상 아동보호조치의 대상에 '외국인' 아동들도 포괄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아동복지에 대하여 말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아이를 안전하게 유기할 수 있게 보장할 것인가 이야기하는 것이 불편한 이유는 그러한 미봉책이 아동복지를 위한 제도개선을 지연시키거나 가로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선한 의도가 결과적으로 제도적인 악을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베이비박스'는 참 기이한 단어이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존재인 '아기(베이비)'와 사물을 담거나 포장하는 데 사용되는 '박스'가 한 단어로 연결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우리사회에서 '베이비박스'는 아이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미담으로 통용되고 있다. 어쩌다 우리 아이들에게 '베이비박스'가 유일한 생명의 구원줄로 여겨지게 되었을까.

미혼모이거나 결혼할 수 없는 관계에서 출산하였다거나 출산한 자녀를 양육할 만한 경제적 여건이 되지 않는 등 피치 못하게 아이를 양육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여성들은 보호되어야 한다. 어떠한 이유로건 이 땅에 태어난 아이의 생명은 보호되어야 하고, 아이는 원가정에서, 그 사회에서 건강하게 성장하고 발달할 권리를 갖는다.

베이비박스는 집어치우고, 제발 미혼모와 아동의 인권을 위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지원 방안에 대해 이야기하자. 멀리 갈 필요도 없다. 우리는 우리가 낸 세금으로 미혼모가 직접 아이를 양육할 수 있도록 현실적인 수준으로 지원을 하는 것에 대해 지지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일말이라도 부정적인 의견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내 안에 있는 미혼모에 대한 사회적 차별의 실체이다. 미혼모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미혼모를 영아유기라는 수렁으로 내몰고 있는 이상 우리는 모두 공범자의 혐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 안의 차별을 회피한 채 애꿎은 입양특례법을 탓하지 말자.

글_소라미 변호사

* 이 글은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블로그와 머니투데이에도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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