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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풍노도의 대한민국

결국 열쇠는 대통령이 쥐고 있다. 대통령이 국회를 거수기로 여기고, 통제와 지배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여태까지 지겹도록 보아온 여야의 극한 대결 구도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대통령의 뜻을 무조건 받드는 여당과 사사건건 발목을 잡는 야당의 무한 대결 말이다.

  • 배명복
  • 입력 2016.04.13 06:54
  • 수정 2017.04.14 14:12
ⓒ연합뉴스

지중해의 작은 공국(公國) 모나코는 세계에서 가장 늙은 나라다. 중위연령(median age)이 51.1세로 세계에서 가장 높다. 전체 인구를 연령의 크기 순으로 일렬로 세웠을 때 딱 중간에 해당하는 나이가 중위연령이다. 모나코 인구 두 명 중 한 명이 50대 이상이란 뜻이다. 전 세계의 돈 많은 은퇴자들이 서로 정착하겠다고 줄을 서고, 카지노와 관광산업이 주수입원인 모나코와는 상관없는 얘기지만 대부분의 나라에서 높은 중위연령은 심각한 문제다. 사회적 활력과 경제적 역동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중위연령이 낮다고 물론 좋은 것도 아니다. 중위연령이 가장 낮은 나라는 아프리카의 우간다로, 15.5세에 불과하다. 평균수명은 52.2세로 짧은 대신 출산율이 5.9로 매우 높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다. 전쟁과 내전에 시달리는 아프리카와 아시아 저개발국들의 중위연령은 아주 낮은 편이다. 분쟁과 가뭄, 기근과 빈곤으로 꿈과 희망을 잃은 젊은이들이 너도나도 유럽행 엑소더스에 나서면서 생긴 난민 사태의 배경에는 인구사회학적 구조가 자리 잡고 있다. 정치를 통한 사회 변혁에 대한 기대를 접은 청년들이 삶의 터전을 바꾸는 방식으로 새로운 기회를 찾아 나서고 있다.

인구 문제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35세를 이상적인 중위연령으로 보고 있다. 사회적 안정과 경제적 역동성이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최적의 연령이란 것이다. 선진국 대부분의 중위연령이 40~45세인 데 비해 미국의 중위연령은 37.6세로 비교적 낮다. 미국의 미래를 낙관하는 사람들이 제시하는 근거 중 하나다. 금융위기에도 불구하고 미국 경제가 빠르게 활력을 되찾고 있는 배경일 수도 있다.

한국은 세계에서 고령화가 가장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나라다. 1950년 19세에 불과했던 중위연령이 2000년 처음으로 30대에 진입했다. 지난해에는 40.8세까지 높아져 세계에서 41번째로 중위연령이 높은 나라가 됐다. 저출산·고령화 현상의 가속화로 2040년에는 지금의 모나코보다도 높은 52.6세가 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본지(중앙일보) 칼럼니스트로도 활약하고 있는 고려대 허태균(사회심리학) 교수는 지금 한국 사회는 '지랄맞은 사춘기'를 겪고 있다고 진단한다. (『어쩌다 한국인』, 중앙북스) 좋은 유전자와 운 좋은 환경을 만나 쑥쑥 자란 우량아처럼 초단기간에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사회경제적 발전을 이룩했지만 어쩔 수 없는 사춘기를 맞았다는 것이다. 과거에 대한 평가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채워지지 않는 욕구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 차 있으며, 미래에 대한 불안에 짓눌려 있는 한국 사회의 모습은 전형적인 사춘기 청소년의 모습이란 것이다. 중위연령으로 따져 이미 불혹(不惑)의 나이에 접어든 한국 사회가 사춘기를 겪고 있다는 건 아이러니다.

하지만 그는 말썽 없이 사춘기를 지나가는 것이 오히려 발달장애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사춘기를 충분히 경험하지 않은 청소년은 성인이 된 후 정체성 위기를 겪을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그는 인생에서 피울 말썽의 총량은 정해져 있다는 '지랄 총량의 법칙'을 인용해 어차피 피울 말썽이면 청소년 때 피우는 게 낫다고 말한다. 대한민국이 '중2병'을 방불케 하는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겪고 있지만 필수적인 발달 단계로 받아들이고 무사히 넘기면 성숙한 선진 사회로 진입할 수 있다는 뜻이다.

사춘기 청소년에게 부모의 역할이 중요하듯 사춘기를 겪고 있는 나라에 중요한 것은 정치권의 역할이다. 시민들의 불만과 분노에 귀 기울이고, 상처를 보듬어주는 것은 정치권이 담당해야 할 몫이다. 총선에서 선출되는 300명 국회의원의 역할이 중요하고 막중한 이유다. 하지만 선거 과정에서 드러난 온갖 구태를 놓고 보면 벌써 싹수가 노랗다는 푸념이 무성하다.

허 교수는 믿고 맡겨주면 신이 나서 일하는 게 한국인들이라고 말한다. 내가 책임을 지고 주체적으로 일을 하고 있다고 느끼면 신명이 나서 열심히 일하는 게 한국인의 특징이란 것이다. 그렇다면 국회의원 한 명 한 명이 신이 나서 일할 수 있도록 그들을 풀어주면 될 게 아닌가. 결국 열쇠는 대통령이 쥐고 있다. 대통령이 국회를 거수기로 여기고, 통제와 지배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여태까지 지겹도록 보아온 여야의 극한 대결 구도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대통령의 뜻을 무조건 받드는 여당과 사사건건 발목을 잡는 야당의 무한 대결 말이다.

현명한 리더라면 실제로는 부지런하고 유능해도 좀 게으르고 무능한 척할 필요가 있다는 허 교수의 말을 대통령은 새겨들어야 할 것 같다. 그것이 비정상의 정치를 정상화하는 길이고, 대한민국이 무사히 사춘기를 통과하는 방법 아닐까. 이번 총선을 계기로 대통령의 달라진 모습을 보고 싶다.

* 이 글은 중앙일보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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