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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설탕과의 전쟁' 시작부터 후퇴한 이유

ⓒJohanna Parkin

지난 7일 오전 11시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정부의 ‘설탕과의 전쟁’ 기자브리핑 직전, 식품의약품안전처(식약처) 직원들은 부랴부랴 보도자료 수정본을 만들어 돌리느라 분주했다. 오전 9시 기자들에게 미리 배포한 ‘제1차(2016~2020년) 당류저감 종합계획’ 보도자료 내용을 급하게 바꾸느라 벌어진 일이었다. 두 시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식약처는 이날 9시30분부터 황교안 국무총리 주재로 열린 제81회 국가정책조정회의에 ‘당류저감 종합계획’을 제출했다. 비만과 고혈압의 주된 원인이 되는 당류 섭취가 해마다 늘고 있어 국민들이 ‘덜 달게’ 먹도록 유도하는 종합대책을 마련하겠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식약처의 애초 방안은 국가정책조정회의를 거치면서 대폭 후퇴했고, 결국 식약처는 보도자료 수정본을 돌려야 했다.

12일 <한겨레>가 식약처가 처음 배포한 자료와 국가정책조정회의를 거쳐 확정된 수정본 자료를 비교해봤더니, 설탕 소비를 줄이기 위해 기업을 규제하는 항목들 중 상당수가 규제 강도를 완화하는 쪽으로 내용이 바뀌어 있었다.

우선 식약처가 제출한 원안에는 시리얼이나 편의점에서 파는 즉석식품 등에 대한 영양표시를 2017년 7월부터 ‘의무화’하도록 나와 있지만, 수정본에선 영양표시 ‘확대를 추진’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의무화’에서 ‘확대 추진’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영양표시 의무화를 위해 올해 6월 식품위생법 시행규칙 개정 관련 입법예고를 하겠다는 내용도 사라졌다.

당류 함량이 높고 영양은 낮은 식품에 일종의 ‘빨간딱지’를 붙이겠다는 규제 방침도 애초보다 무뎌졌다. 원안에선 2018년 탄산음료를 시작으로 2019년 캔디·혼합음료, 2020년 과자·빵 등에 ‘고열량·저영양 식품’이라는 표시를 하는 것을 의무화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수정본에선 ‘의무화’라는 표현이 사라지고 ‘표시방안 추진 검토’로 완화됐다. 이를 추진하기 위한 관련법(어린이식생활안전관리특별법) 개정에 대한 입법예고 시기도 2017년 5월로 명시됐다가 빠졌다.

어린이·청소년의 당 섭취를 줄이기 위한 방안 중 하나였던 ‘학교 내 커피 자판기 설치 제한’도 ‘학교 내 자판기를 통한 커피 판매 제한’으로 바뀌었다. 자판기 설치를 아예 못하게 하는 대신 일단 자판기에서 커피만 팔지 못하게 하겠다는 것이다.

이날 국가정책조정회의에서는 산업통상자원부 등 경제부처 장관들의 반발로 갑론을박이 벌어졌던 것으로 전해졌다. 회의에 참석했던 한 관료는 “경제부처 쪽에서 ‘가공식품에 너무 과도하게 표시 규제를 강화하면 기업에 부담이 될 수 있다’ ‘과도한 규제로 인해 외국과의 통상마찰이 생길 수 있다’ 등의 우려를 쏟아냈다”고 전했다. 실제 가공식품 업계에서도 불만을 쏟아내고 있다. 익명을 요청한 식품기업의 한 간부는 “과잉섭취가 문제인데, 설탕 자체가 만병의 근원이라는 식으로 몰아가는 것 같아서 우려스럽다. 우리나라의 설탕 소비량은 유럽에 견줘 현저히 낮은데 선진국이 한다고 무조건 따라해선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손문기 식약처장은 이날 기자브리핑에서 “국가정책조정회의에서 판단을 해서 (기업) 제재 형식의 방안은 최소화시켰다”고 밝혔다. 식약처 한 간부는 자료 수정에 대해 “기업들이 영양표시 등 규제에 대한 부담을 크게 느끼는 것 같다. 이를 반영해 의무화라는 표현을 좀 완화시키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가장 강력한 규제방안인 설탕세는 아예 첫 자료부터 포함시키지 않았다.

‘설탕과의 전쟁’을 우리보다 앞서 벌인 다른 나라에서도 소비 위축을 꺼리는 가공식품 업계와의 마찰로 홍역을 치른 바 있다. 2014년부터 설탕세 부과를 본격 시행한 멕시코에선 원래 탄산음료에 10%의 세금을 물리려고 했으나 경제계 반발로 리터당 1페소로 축소해서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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