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스무번째 총선 직전에 읽는 첫 총선 이야기

1948년 5.10 총선 때 남한 유권자들의 절대 다수는 문맹이었고-_-; 그래서 작대기 표시 개수로 후보자를 고를 수 있게 후보자의 '기호'라는 것이 처음 도입되었다. 하지만,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이 첫 유권자들의 투표율은 90%가 넘었다. 68년 전 우리의 할아버지 세대들이 처해 있던 조건들보다 정말 훠어어어얼씬 더 좋은 조건에서 내일 투표하게 되는 우리들은 그렇다면 우리 조부모 세대들보다는 좀 더 나은 모습을 보여 드려야 하지 않을까? 하다 못해 투표율에서라도 말이다.

  • 바베르크
  • 입력 2016.04.12 07:35
  • 수정 2017.04.13 14:12

이제 내일이면 20대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거가 실시된다. 여당의 공천 파동과 야당의 분당 속에 정책선거는 실종되어 역대 최악이라는 19대 국회보다 더 나쁜 국회가 될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 속에 치러지는 선거다. 청년 실업률은 치솟고 있고, 불황의 터널에서 언제 빠져 나올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북한의 핵 위협은 계속 되지만, 정부와 여당은 물론이고, 야당들에서조차 미래를 향한 뚜렷한 비전은(지극히 편파적인^^ 필자의 의견으로는 안철수 대표의 국민의당을 제외하고는) 찾기 어렵다. 그렇다면 유권자들이라도 정신을 차리면 좋겠지만 이번 총선의 투표율은 높아야 50% 대 후반이라고 하니 국민 열 명 중 네 명은 이미 이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를 포기한 것인가 싶어 섬뜩한 생각마저 든다.

암울한 심정 속에 투표장으로 향하기 전에 문득 68년 전, 이 땅에서 최초로 치러졌던 국회의원 선거를 치르기 위해 집을 나섰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어떤 생각이셨을까 하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오늘은 지금으로부터 약 68년 전인, 1948년 5월 10일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치러진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국회의원 선거 이야기를 한 번 끄적거려 볼까 한다.

1948년 제헌 국회 총선 투표 광경

5.10 총선 때 남한 유권자들의 절대 다수는 문맹이었고-_-; 그래서 작대기 표시 개수로 후보자를 고를 수 있게 후보자의 '기호'라는 것이 처음 도입되었다. (그러니 이제 문맹자들도 거의 사라진, 말석이나마 OECD를 더럽히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아직도 기호 1번이니 2번이니 하면서, 국회의원 선거에 당명과 후보자명 외에 기호를-예전처럼 문맹자들을 위한 작대기 긋기도 아니면서- 계속 쓰고 있는 것은 타파해야 할 관행이 아닐지?)

하지만,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이 첫 유권자들의 투표율은 90%가 넘었다. 5. 10 총선거는 남조선로동당의 조직적이고 폭력적인 선거 방해 그리고 범좌파 세력 및 안재홍 선생님 같은 중간파,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 부주석 김규식 선생님 같은 민족진영의 남북협상파가 대거 불참한 가운데 이루어져 분단을 촉진했다며; 흔히들 그 중요성이 폄하된다.

그러나, 북한이 멀게 잡으면 1945년 10월 10일에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을 설치한 때로부터, 가깝게 잡더라도 최소한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만들어서 사실상 단독정부를 세운 상황에서 남북분단책임을 사실상의 북한정권 수립 후 2년이 훨씬 넘은 다음에 치러진, 남한의 5.10총선에 돌리는 건 온당치 않다.

또한, 5.10 총선으로 들어서게 된 대한민국 정부를, 미군정의 연장선상에서 만들어진 꼭두각시 정부로 보거나, 이 땅에서의 첫 국회의원 선거를, 이승만과 친일지주세력 한국민주당이 농단한 쇼로 보는 관점도 온당치 않다. 5.10 총선을 남로당의 4.3 폭동 때문에 치르지 못한, 제주도에서 이 폭동을 진압하기 위한 국가폭력은 잘못되었고, 매서운 비판을 받아 마땅하지만, 제주도를 제외한 나머지 전국 각지에서의 선거는, 유엔도 인정했듯이 공정하고 자유로웠다.

실제로 구성된 제헌의회도 독립좌파와 진보 성향의 의원들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었고, 친일 지주들 중심의 한국민주당(지금의 더불어민주당까지 이어진 야당의 한뿌리이다)은 선거에서 참패했다(당대에 쓰여진 채만식의 소설 '도야지' 참조).

소설가 이병주선생님께서 개탄하셨듯이 좌파와 남북협상파의 5.10 총선 보이코트는 그들에게는 큰 패착이었다. 5.10 총선으로 구성된 제헌의회에서는, 출마도 안 한 김구선생님께서 독재자 이승만이 민 이시영선생님과 부통령직을 놓고 2차 투표까지 가 겨룰 정도였고, 제헌의회 의원들은 여타 사회경제정책에서도 진보성을 보여주었기에 이승만은 위기를 느껴 국회프락치사건을 프레임업하여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던 소장파 국회의원들을 찍어내기까지 하였다(이 국회 프락치 사건은 북조선로동당 공작원들의 소행이라는 설도 있다).

5.10 총선은 아울러 국민을 우습게 안 정치인들은 망한다;;는, 그 후 남한 정치사에서 반복된 양상(2.12 총선에 불참한 동교동계 일부, 최근의 국개론(응?)까지)을 처음으로 보여준 선거였고, 5.10 총선 불참 후에, 당시에도 이를 무겁게 여긴 독립투사 안재홍, 조소앙 선생님 등은 다음 2대 총선에 출마하셔서 당선 되셨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은 이렇게 조금씩 단단해져 가고 있었다. 이런 중간파 인사분들께서 대부분 2년 후에 열린 2대 총선(5.30 총선)이 있은 지 한 달도 안 되어 북한 김씨왕조를 창건한 독재자 김일성이 일으킨 6.25 남침 전쟁으로 납북되어 사라지셨다는 것은 진정 조국의 통일과 민주화를 위해서는 크나큰 손실이었다.

어쨌거나 한국인이 5.10 총선서 처음 행사한 투표권은 그 이후 선거들이나 요즘 신생 민주국가에서 실시되는 선거와 비교해 보아도 아주 잘 행사되었다고 할 수 있을 듯 싶다. 68년 전 우리의 할아버지 세대들이 처해 있던 조건들보다 정말 훠어어어얼씬 더 좋은 조건에서 내일 투표하게 되는 우리들은 그렇다면 우리 조부모 세대들보다는 좀 더 나은 모습을 보여 드려야 하지 않을까? 하다 못해 투표율에서라도 말이다.

저작권자 © 허프포스트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관 검색어 클릭하면 연관된 모든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바베르크 #20대 총선 #5.10 총선 #채만식 #도야지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