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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파우저 전 서울대 교수가 지적하는 '한국의 현재'

서울대 국어교육과에서 6년 동안 한국어 교수법을 가르치다 2014년 한국을 떠났던 로버트 파우저(55)가 책 두 권을 들고 돌아왔다. <미래시민의 조건>(세종서적), <서촌홀릭>(살림, 4월15일 출간 예정). 파우저는 1986~93년에도 한국에 머물며 고려대 영어교육과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95년부터는 일본 교토대, 가고시마대에서 10여년 동안 영어와 한국어를 가르쳤다. 이런 체험은 그가 노태우,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 걸친 한국 사회의 변화상과 이를 일본 사회와 비교해볼 수 있는 안목을 갖추게 했다. 책에선 젊은 시절, 한국과 일본에서의 경험을 찬찬히 돌아보는 행간에 이방인(?)의 눈으로 본 미국의 변화까지 읽을 수 있다. 고향인 미국 앤아버에 머물면서 집필했다는 파우저를 지난 1일 서울 인사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2015년 <워싱턴 포스트> 기사가 기억나요. 미국내 사회적 차별 현상을 조사해 이를 인종차별에 견줘 등급을 매긴 건데요. 제가 한국에서 겪은 일들을 질문지에 적어보니 ‘흑인 여성’에 해당하더군요.” 도대체 한국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서울대에서 저를 전임교수로 불러줘 감사했어요. 그건 인정합니다. 딱 거기까지였어요.” 뒤통수 치는 인물로 비칠까 봐선지 그는 말을 아꼈다.

“일정 기간 근무하면 학과장을 할 수가 있어요. 순번이 됐는데, 저를 건너뛰어 다음 순번 교수로 넘어가더군요. 제가 외국인이라 부적절한 건지, 힘들어서 보호하려던 건지 아무런 얘기가 없었어요. 감투 욕심이 아니에요. 그렇다고 못할 것도 아니죠. 이런저런 이유가 없지 않았을 테죠. 그렇다면 설득 절차가 있어야죠. 오스트레일리아 대학의 한국어학과 참관 프로그램 때도 그래요. 학생을 인솔해 수업을 참관하고 양국 학생들의 교류를 지도하는 거였는데, 본래 저 혼자 가기로 했던 거였어요. 갑자기 한국인 교수가 함께 가는 걸로 바뀌었어요. 제가 학과를 대표할 수 없다는 거죠. 3년 머문 일본 가고시마대와 대비됐어요. 거기선 한국어 교양과정을 혼자 만들어 운영했죠. 강사를 채용하고 자료를 구입해 도서관도 만들었죠. 보람있고 귀중한 경험이었어요. 서울대에서는 그 경력을 인정하지 않더군요. 6년 동안 상처를 많이 받았죠.”

경복궁 서쪽 동네인 서촌에 살던 이야기로 넘어가며 가라앉았던 표정이 살아났다. 2009년부터 ‘서촌문화연구회’ 회장을 맡아 난개발로 사라질 위기에 놓인 한옥 보존을 위한 활동을 했다. 한때 체부동의 낡은 한옥을 고쳐 ‘어락당’(語樂堂)이라 이름짓고 살기도 했다.

“당시 재개발 논쟁에서 찬성쪽 사람들은 시끄러운데, 반대쪽은 목소리가 없었어요. 주민들과 얘기해보니 반대 의견이 많더군요. 동네를 아끼는 분들과 모임을 꾸렸죠. 공부하고 답사하며 정보를 공유하자는 데서 출발했어요. 부수고 새로 지으려던 ‘이상의 집’을 보존하고 수성동 계곡을 친환경적으로 복원하는 데 일조를 했어요. 옥인동 재개발 문제도 공론화해서 일단 부수는 일을 중단시키는 성과를 냈죠. 모임이 깨지고 젠트리피케이션 문제까지 확장하지 못해 무척 아쉽긴 하지만….”

그는 서촌 이웃들에게서 주인의식과 참여정신에 바탕한 자발성을 볼 수 있어 보람을 느꼈다고 했다. 서울대 교수 사회에선 그 대학 출신이 아닌 외국인이라 배제되기도 했지만, 서촌에서는 서울대 교수라는 신분이 메리트로 작용했다. “서울대 교수인 저는 서촌에서 자연스럽게 ‘우리’에 포함됐죠. 50대 이웃 아저씨로 대해 줬어요.” 그는 일본 체류 때의 경험을 떠올렸다. “교토에 살 때 같은 골목에 공산당원이 살았어요. 사람들은 그런가 보다 하면서 인사를 하는 등 거리감 없이 지내더군요. 저도 그랬어요. 하지만 한국에서는 사상이나 고향이 같은 사람들끼리 어울리고 동성애자 등 이질적인 사람을 밀쳐냅니다. 아예 자기들과 비슷한 사람으로 만들려고도 하지요.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 생활에 개입해 행동을 규제하려 합니다. 노태우 정부 때는 과소비를 억제한다면서 술집 영업을 자정 이전으로 제한했죠.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만….”

그의 눈에 한국은 패전 이전 일본과 흡사하다. 일본은 미군이 진주하면서 재벌이 해체되고 권력이 분산됐는데 한국은 그런 과정이 없었다는 거다. 근대화 이후에도 국가와 개인의 관계가 본질적으로 큰 변화가 없다는 게 그의 시각이다.

그는 2015년 퍼지기 시작한 ‘헬조선’이란 말뜻을 단박에 알았다고 했다. 그가 지금 사는 땅에서도 ‘헬미국’ 분위기를 느꼈기 때문이다. 임산부가 출산 일주일 뒤 직장에 복귀해야 한다든가, 의료보험 혜택이 자기 돈 6000달러를 사용한 뒤에 적용되는 현실이 납득되지 않았다. 그가 해외 생활을 시작한 29년 전엔 생각도 못했던 일이다. 앤아버에서 민주당의 버니 샌더스 진영에 자원봉사로 참여하고, 적지만 정치자금을 낸 것도 그런 까닭이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뭔가 변해야 한다는 생각이 저변에서 일어나고 있어요. 문제는 참여의식입니다. 현실을 바꾸려면 광화문 집회에 나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투표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는 앞으로 오하이오주립대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틈틈이 대한제국과 해방공간의 외국어 교육사를 정리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아끼는 사람들 사이에 그는 ‘파 전 교수’, 줄여서 ‘파전’ 교수라 불린다. 한국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인정받기 때문이다. 그런 탓일까. 그의 얘기는 애정만큼이나 따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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