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요란하기만 한 잔치

이 영화는 관객의 머릿속에서 거의 천번쯤 재생되었을 웨인 부부의 총격사건 같은 걸 보여주는 데에는 아까운 시간을 펑펑 써대면서 정작 필요한 최소한의 컷을 포함시키는 데에는 별 관심이 없다. 이런 태도는 액션 시퀀스에서까지 이어진다. 시끄럽고 거대한 건 알겠지만 액션의 합이나 구체성이 보이지 않는다. 이렇다면 사운드를 최대로 켜둔 화면조정시간과 다를 게 없다. 잭 스나이더는 이후 공개될 감독판(확장판)을 기대해달라고 주문했다. 그러나 감독이 극장 상영판에서 제대로 된 이야기의 꼴을 제시하지 못하고 "감독판을 기대해달라"고 이야기하는 건 무책임한 일이다.

  • 허지웅
  • 입력 2016.04.10 10:13
  • 수정 2017.04.11 14:12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을 향한 기대는 어떻게 배신당했나

먼저 밝혀두지만, 나는 슈퍼맨이 엄마의 이름을 언급한 순간 배트맨이 주춤하고 결국 싸움을 관둔 것에 대해 별 불만이 없다. 이건 사실 꽤 말이 되는 설정이다. 배트맨이 슈퍼맨을 증오하는 표면상의 이유는 그가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이 아닌데 인간의 일에 끼어들고 신과 같은 권능으로 간단히 해결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신과 같은 권능'은 쉽게 타락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크립토나이트에 노출되어 배트맨 앞에 뒹굴며 최후를 맞이하는 순간 슈퍼맨은 마사를 외친다. 그리고 어디서든 끼어들기 좋아하는 로이스 레인이 뛰어와 그게 클라크의 엄마 이름임을 중언한다. 이때 배트맨은 생각했을 것이다. 아, 너도 사람이구나. 그런 초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엄마를 살리고 싶어서 렉스 루터 같은 놈의 협박에 따라 싸움을 하는, 아, 너는 사람이구나. 즉 배트맨이 슈퍼맨과의 결투를 포기한 건 '우리 둘은 엄마 이름이 같네?' 때문이 아니라 슈퍼맨도 결국은 사람이라는 실감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슈퍼맨을 없애버릴 수 있는 논리적 근거를 잃어버린 것이다. 다만 배트맨이 생각보다 빨리 싸움을 포기해 아쉽기는 했다. 욕을 퍼부으며 싸움을 포기해버리기는 하지만 빠른 결정이었다. 거기 로이스 레인이라는 증인이 없었어도 그랬을까. 이건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배트맨이 슈퍼맨을 증오하는 표면상의 이유는 신과 같은 권능을 경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그런 권능을 질투하기 때문이다. 고담시에서 가장 강하고 위험한 아이콘이 되기 위해 브루스 웨인은 평생을 통틀어 수련했다. 매일 밤 가면을 뒤집어쓰고 악당을 잡고 추적하고 추리했다. 가정을 일구지도 못했고 친구를 만들지도 못했다. 말 그대로 지옥같이 살아왔다. 그렇다고 자기 일을 사랑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사람들은 배트맨을 법 위에 군림하는 자경단이라고 손가락질하고, 배트맨 또한 스스로를 악당과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스스로를 혐오한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나타난 외계인이 반나절 만에 도시 하나를 날려버리는 초월적인 능력으로 외계 악당을 때려잡았다. 그 또한 법 위에 군림하는 게 명확해 보이는데도 자기 혐오에 빠져 있거나 이중 잣대로 괴로워하는 것 같지 않다. 그는 복면을 쓰지도 않는다! 심지어 사람들은 그를 사랑한다! 동상까지 세워줬다! 왜 너는 사실상의 자경단임에도 자경단 취급을 당하지도 않고 사랑까지 받는 거지? 왜 너는 나와 달리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아무것도 희생하지 않는 거지?

결정적으로 배트맨과 슈퍼맨의 첫 만남을 떠올려보자. 배트맨은 그날 밤 슈퍼맨에게 "형이 오늘 기분이 좋아서 봐준다, 영광으로 알아라" 식의 선언을 듣는다. 또한 '법 위에 군림하는 자경단'이라는 이유로 슈퍼맨이 자신을 악당으로 생각한다는 걸 깨닫는다. 아 그러니까 너는 외계에서 온 타자인 동시에 객관적인 주체이니까 사람들 일에 마음대로 끼어들어도 되고 한낱 인간에 불과한 나는 안 된다? 도대체 무슨 수로 뒤틀리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배트맨이 슈퍼맨을 질투하고 싫어하지 않는다면 그건 정말 이상한 일일 거다.

말이 길어졌지만 이 영화의 패착은 배트맨과 슈퍼맨의 대결이 엄마 이름으로 끝나버렸기 때문이 아니다.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은 감독이 관객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어야겠다는 명확한 비전을 가지고 만든 '의도의 산물'이기보다, 일단 찍어놓고 허락된 상영시간 안에 최대한 말이 되게 열심히 끼워맞춘 결과물에 가까워 보인다.

시작부터 그렇다. 로이스 레인을 구하기 위해 슈퍼맨이 아프리카에서 벌인 일은 이 영화의 가장 큰 사건 가운데 하나다. 이것 때문에 슈퍼맨은 청문회에 서기에 이른다. 그런데 스크린 밖의 누구도 대체 아프리카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애초 보여주질 않았으니 당연한 노릇이다. 렉스 루터가 '하늘에서 그분이 온다'며 마지막에 지껄이는 독백은 다크사이드의 존재를 지각했다는 사실 위에 기반한다. 그런데 다크사이드의 심복 스테판울프가 등장하는 장면은 '삭제 신'이라는 제목으로 나중에야 인터넷에 공개되었다.

배트맨이 원더우먼과 대화하며 저스티스 리그를 결성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치는 건 꿈에서 다크사이드에게 세뇌된 슈퍼맨과 플래시의 경고를 봤기 때문이다. 이 꿈과 배트맨의 행동이 관객의 머릿속에서 직관적으로 연결되려면 배트맨이 그걸 단지 꿈이 아닌 실체를 가진 경고로 받아들일 이유가 추가되었어야 한다. 그러나 영화에선 CCTV에 목격된 플래시의 모습을 잠깐 보여주는 걸로 끝이다.

이 영화는 관객의 머릿속에서 거의 천번쯤 재생되었을 웨인 부부의 총격사건 같은 걸 보여주는 데에는 아까운 시간을 펑펑 써대면서 정작 필요한 최소한의 컷을 포함시키는 데에는 별 관심이 없다. 이런 태도는 액션 시퀀스에서까지 이어진다. 시끄럽고 거대한 건 알겠지만 액션의 합이나 구체성이 보이지 않는다. 이렇다면 사운드를 최대로 켜둔 화면조정시간과 다를 게 없다. 잭 스나이더는 이후 공개될 감독판(확장판)을 기대해달라고 주문했다. 그러나 감독이 극장 상영판에서 제대로 된 이야기의 꼴을 제시하지 못하고 "감독판을 기대해달라"고 이야기하는 건 무책임한 일이다. <왓치맨>의 감독판이 훌륭했다는 점을 감안해도 마찬가지다. 감독이 이런 변명을 반복적으로 습관화하는 건 직무유기에 가깝다.

좋은 것도 있다. 나는 프랭크 밀러 버전에 가장 근접한 이번 배트맨이 영화화된 모든 배트맨 가운데 가장 마음에 든다. 떡밥도 많다. 플래시가 보여준 배트맨의 꿈속에서 다크사이드에 세뇌된 슈퍼맨이나 땅 위에 새겨진 다크사이드의 표식, 로빈이 조커에게 죽은 것인가 아니면 자신을 지켜주지 못한 배트맨에게 배신감을 느낀 로빈이 조커가 된 것인가(코믹스에서 2대 로빈인 제이슨 토드는 조커에게 죽었다. 그러나 영화에서 잠시 노출되는 로빈의 코스튬을 보면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조커와 같은 위치에 상처가 있는 걸 확인할 수 있다), 풀어나갈 단서들이 많다. 이런 것들을 찾아내고 상상하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그러나 온몸을 던져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는 영화에게 배신당하는 경험은 한번으로 족하다.

* 이 글은 씨네21에 게재된 글입니다.

저작권자 © 허프포스트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관 검색어 클릭하면 연관된 모든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배트맨 대 슈퍼맨 #영화 #문화 #허지웅 #잭 스나이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