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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와 가짜

영화를 보다보면 과연 '진짜'와 '가짜'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영화의 완성도가 그렇게까지 높다고는 말을 못하겠다. 하지만 섹스신에 이르는 위태로운 계단이라고 해도 스토리와 주제가 완전히 날아가는 건 아니다. 의사 레즈비언 영화라고는 했지만 결말에 도달하면 진짜로 감독과 배우의 관계가 발전하기 때문에 [수상한 언니들]은 엉겁결에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한국 레즈비언 영화'라는 희귀종이 되었다.

  • 듀나
  • 입력 2016.04.08 07:08
  • 수정 2017.04.09 14:12

노진수 감독의 신작 [수상한 언니들]을 보았다. '구경했다'가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이 영화가 속해있는 한국 19금 에로 영화는 내가 거의 건드리지 않는 장르이다. 의무감에 본 몇몇 영화들을 제외한다면 이 장르에 대한 내 지식은 대부분 간접적이다. 이 장르에 속해있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어떤 관객들을 대상으로 삼고 있는지, 그들의 요구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아직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에, 정확한 리뷰가 가능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영화를 본 건 설정 때문이었다. 보도자료를 타고 들어오는 이런 종류의 영화들은 대부분 내용이 미칠 정도로 재미없어 보인다. 형부와 처제가 별장에서 남몰래 불타는 밤을 보내는 건 당사자에겐 아슬아슬하고 재미있는 일이겠지만 관객으로서 나의 호기심을 특별히 자극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수상한 언니들]엔 꽤 재미있는 설정이 있었다. 7년 전에 만든 첫 영화가 망한 뒤로 일감을 얻는 데 애를 먹고 있는 여자감독에게 일본 AV 여자배우를 주연으로 한 에로 영화의 제안이 들어온다. 감독은 대부분 여자들로만 구성된 스태프들을 끌고 일주일 동안 영화를 찍는데, 청일점인 조감독이 여자배우를 꼬셔서 달아나고, 술집 직원을 캐스팅해서 촬영을 계속하려고 하자, 이번엔 여자들하고는 일을 못하겠다며 남자배우가 뛰쳐나간다. 에로 영화판 [아메리카의 밤]인 셈이다.

이런 식의 19금 영화들이 대부분 그렇듯, 영화의 포인트는 섹스와 노출에 맞추어져 있다. 스토리의 의무는 이런 장면들을 될 수 있는 한 많이 넣고 그 사이를 스토리로 채우는 것이다. [수상한 언니들]은 이 스토리에 공을 꽤 들이고 있지만 그래도 우선순위가 바뀌지는 않는다. 분명 감독 자신의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의 이야기는 그렇게 믿기지 않는다. 물론 가장 믿을 수 없는 부분은 감독이 남자배우의 빈 자리를 채운다면서 직접 배우로 나서는 순간이다. 그 믿을 수 없는 순간은 영화의 핵심이기도 하다.

[수상한 언니들]은 의사(擬似) 페미니즘 영화이고 의사 레즈비언 영화이다. 남성중심적인 시스템과 맞서 싸우는 여성 영화인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영화는 충분히 페미니즘에 발을 담그고 있다. 하지만 이 설정이 클라이맥스의 레즈비언 섹스신에 도달하기 위한 서툰 핑계라면 맥이 풀리기 마련이다. 난 이 영화를 찍는 여성 스태프들이 모두 '젊고 예쁜' 여자들이란 것도 신경이 쓰였는데, 이것도 장르의 특성인가? 꽤 길게 나오는 이 섹스신이 영화 촬영 장면이라면 알고 본다고 해도 역시 조금 속은 것 같은 기분이 들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여성의 욕망을 담은, 여자들이 만든 에로 영화'라는 영화의 선언은 처음부터 가짜가 되어 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보다보면 과연 '진짜'와 '가짜'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영화의 완성도가 그렇게까지 높다고는 말을 못하겠다. 하지만 섹스신에 이르는 위태로운 계단이라고 해도 스토리와 주제가 완전히 날아가는 건 아니다. 의사 레즈비언 영화라고는 했지만 결말에 도달하면 진짜로 감독과 배우의 관계가 발전하기 때문에 [수상한 언니들]은 엉겁결에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한국 레즈비언 영화'라는 희귀종이 되었다. 그리고 영화가 이런 주제와 결말을 쉽게 선택할 수 있었던 건 19금 섹스만 제대로 넣는다면 의외로 융통성이 있는 장르의 성격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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