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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의 얼굴 | 서울시향 사태에 대한 소고

이 많은 사람들이 거의 20개월의 긴 시간 동안 경험한 것, 수많은 직원들의 퇴사, 그리고 제가 그 기간 동안 들어왔던 호소, 깊은 한숨, 분노와 보아왔던 눈물들을 조작해낸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엉뚱한 음모론의 대두로 이 사태의 본질은 흐려져 갔고 안타깝게도 정 전 감독과 시향이라는 공공단체가 비난의 대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저는 이 사태가 진행되는 동안 평생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인간의 깊은 밑바닥을 접할 수 있었고 거기에 자리 잡고 있는 비열함, 추악함, 가증스러움에 소스라쳐 놀랐습니다. 또 지성인, 문화인을 자처하는 우리에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배후설, 조종설, 조작설 같은 천박한 차원의 얘기가 어느새 일상용어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자각할 때마다 극도의 수치심을 느꼈습니다.

  • 진은숙
  • 입력 2016.04.07 07:16
  • 수정 2017.04.08 14:12

감히 진실을 얘기한다고 말하는 것이 조심스럽습니다. 진실은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저명한 영화감독 구로사와 아키라는 그의 영화 "라쇼몽"에서 한 남성의 죽음을 세 사람의 등장인물들이 각자의 시각에서 조명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 죽음의 미스터리는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주관적 눈에 의해 세 개의 판이하게 다른 이야기로 전개되는데, 구로사와는 이 영화를 통해 진실을 구현하는 과정이 얼마나 복합적인 것인가 하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세 개의 서로 다른 시각들 안에 공통으로 내재하고 있는 변하지 않는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바로 그 남자주인공의 죽음입니다. 이 사건을 어떤 시각에서 바라본다 해도 그 중심에는 그 남자 주인공의 죽음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것과 마찬가지로 지난 16개월 동안 논란이 되고 있는 서울시향의 내홍도 우리 각자가 자신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시각에서 이 사태를 조명한다 해도 그 중심에는 항상 "직원들의 고통"이 자리 잡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중심에 있지 않은 시각은 거짓입니다.

2013년 2월, 박 전 대표가 취임했을 때 그분에 반대하는 사람은 시향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모든 직원들이 오랫동안 대표이사의 공백 후에 참신한 경영인을 찾아냈다고 생각했고 "너무 힘들지만 신난다"라는 표현을 하며 기대감에 들떠있었습니다.

정명훈 전 감독님도 3월 10일 라디오 프랑스 필과의 베를린 연주 후 호텔 아들론에서 있었던 만찬에서 박 전 대표에게 큰 기대감을 내보이며 이제부터 시향의 입지가 더욱 더 탄탄해질 것 같다며 크게 기뻐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후 한 일간지에 부정적인 기사가 실린 것을 시작으로 속속히 걱정스러운 소식들이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아르스 노바 때문에 제가 서울에 체류한 기간 동안 다수의 직원들이 사무실에서, 또 복도나 엘리베이터에서 저와 마주칠 때마다 박 대표의 업무스타일과 자신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정신적 고통을 지속적으로 호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과 동시에 직원들이 하나둘씩 사표를 내고 시향을 떠나기 시작했고, 그해 8월경 한 직원이 울며 "도저히 못 견디겠다. 사표를 내야겠다"고 하는 것을 조금만 더 참아보자며 만류했지만 이 직원은 1년 후 결국 퇴사를 했습니다.

이런 상황은 2014년이 되면서 더 심화되었는데 언젠가부터는 한 직원이 정신과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는 안타까운 얘기도 들려왔습니다. 이런 사무실 분위기는 저 본인에게도 상당히 걱정스러운 것이었고, 저는 이런 상황에서 비롯되는 정신적 고통과 업무의 차질을 감당해야만 했습니다. 저는 혹시나 직원들 중에 극단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이 나오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하여 수시로 사무실로 전화해 "누구누구 좀 잘 챙겨줘라" 라며 부탁을 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직원들에게 제가 박 대표와 면담해 직원들에 대한 좀 더 인간적인 대우를 부탁할까 제의했지만 그들은 그러면 자신들이 더 힘들어진다며 저를 만류했습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었던 거의 18개월의 기간은 제가 시향과 일해왔던 10년 중 가장 힘든 기간이었었고 이 기간 중 직원들과 같이 느꼈던 고통은 제 인생에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가 되어버렸습니다. 저는 직원들의 호소를 직접적, 간적접으로 들을 때마다 매일 사무실에 출근해 그런 일을 직접 당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헤아리려고 노력했고 그들보다 제가 좀 더 나은 위치에 있다는 사실을 항상 부끄럽게 생각했습니다.

그 동안 언론에 보도되었던 것과는 달리 정 전 감독은 시향에서 가장 오랫동안 박 전 대표를 신임하고 같이 일할 의지가 있었던 분입니다. 자신을 찾아와 고통을 호소하는 직원들에게 한편으로는 조직의 통합을 위해 좀 참고 같이 가자며 설득했고 또 한편으로는 박 대표에게 재임기간 중 여러 번 직원들에게 좀 더 인간적인 대우를 해 줄 것을 부탁했었습니다.

정 전 감독은 2014년 1월 16일 도이치 그라모폰 음반 녹음을 앞두고 있었던 첼리스트 알반 게르하르트와의 리허설에 약 20분 정도 늦게 도착해, 지금 금방 박 대표와 직원들 문제로 면담했는데 서로 언성을 높였다라며 심히 걱정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정 전 감독은 박 전 대표 재임기간 내내 고통을 호소하는 직원들과 박 전 대표 사이에서 상당히 심리적 갈등을 느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대표이사의 퇴출"의 가능성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2014년 5월 9일 베를린 필과의 있었던 연주 후 만찬에서 사무실 상황에 대해 심한 우려를 표명하면서도 박 대표가 임기 끝나면 어디 좋은 자리로 가지 않겠느냐라는 대화를 저와 나눈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2014년 8월 27일 영국 런던 로열 앨버트홀에서 열린 '비비시 프롬스'에서 정명훈 지휘자가 이끄는 서울시향이 공연을 하고 있다. © 서울시향

하지만, 2014년 8월말 런던 프롬스 연주 후에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을 계기로 서울시향의 이미지가 크게 실추되었고, 정 전 감독 본인도 직접 사건을 목도하면서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게 된 듯합니다. 2014년 8월 27일 서울시향은 런던 BBC 프롬스에서 최고의 연주로 찬사를 받았습니다. 6,000명 이상이 꽉 찬 로열 알버트홀에서 관객들은 숨소리조차 내지 않은 채 우리의 음악에 몰두했습니다. 프롬스 역사상 초청 받은 한국 최초의 오케스트라라는 자부심과 함께 우리가 해냈다는 성취감과 기쁨은 모두에게 너무나 큰 선물이었습니다.

공연을 마친 후, 연주자, 직원 및 관계자, 응원단 등 모두가 성공적 공연을 축하하며 저녁 뷔페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박 전 대표가 정 감독과 함께 앉았던 헤드테이블의 자리를 잠시 비운 사이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이 앉아있던 상황을 본인에 대한 의전상의 문제로 판단했고, 이로 인해 잡음이 생겼습니다. 이 일은 삽시간에 런던 음악계에 알려졌고 서울시향의 이미지는 크게 실추되었습니다. 일 때문에 런던을 자주 방문하는 저 역시 얼굴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외국 음악계 종사자들까지 우려의 목소리를 내게 되고, 그 사태가 공연기획팀장의 사퇴로까지 연결되자 정 전 감독은 큰 위기의식을 느꼈고 이제 직원들을 적극적으로 돕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 사태는 호소문을 발표한 직원들과 박 전 대표 사이의 문제입니다. 하지만 호소문 발표 후 안타깝게도 이 문제의 초점은 엉뚱한 곳으로 돌려졌습니다.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권익과 명예를 위해 투쟁할 권리는 직원들에게뿐만 아니라 박 전 대표에게도 똑같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투쟁은 정당한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시향직원들은 상임지휘자 밑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고 그와 아무런 이해관계가 있을 수 없습니다. 지휘자가 이들을 해고할 수도 없고, 그가 사임한다 해서 직장을 잃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그들은 고등교육을 받은 성인들입니다. 자기 의사 결정권이 있는 성인들이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행한 행동을 누군가의 조종에 의해 했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납득할 수 없습니다.

이 많은 사람들이 거의 20개월의 긴 시간 동안 경험한 것, 수많은 직원들의 퇴사, 그리고 제가 그 기간 동안 들어왔던 호소, 깊은 한숨, 분노와 보아왔던 눈물들을 조작해낸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정 전 감독은 오랜 기간 직원들의 호소를 들어왔지만 사무실 상황이 힘들다는 막연한 사실만 알고 있었고 진상을 파악하는 과정에서 그 동안 있었던 모든 일들의 세세한 내용들을 알게 된 후 그 내용에 크게 충격을 받고 공분했습니다. (이 사실은 제가 2014년 9월 24일 저녁 있었던 전화통화에서 확인했습니다.)

하지만, 엉뚱한 음모론의 대두로 이 사태의 본질은 흐려져 갔고 안타깝게도 정 전 감독과 시향이라는 공공단체가 비난의 대상이 되어버렸습니다.

더불어 지난 16개월 동안 정 전 감독과 시향에 대해 너무나 많은 과장되고 왜곡되고 때로는 사실이 아닌 주장들이 반복되었는데, 이 주장들이 공연계의 특수성을 잘 알지 못하는 일반인들에게 던져지면서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켰고 당사자들의 이미지를 크게 실추시켰습니다.

이런 잘못된 주장들은 항상 강한 임펙트를 가진 신조어로 절묘한 타이밍을 가지고, 끊임없는 반복을 통해 대중들에게 던져지며 그들의 뇌리에 각인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직원들에게는 아무런 해명과 변명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고 어떤 말을 한다 해도 아무도 귀를 기울여주지 않았습니다.

언론이라는 것은 공적인 공간입니다. 이 공간을 통해 우리는 사회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를 취득합니다. 물론 이 공적인 공간에 개인적 주장이 발표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행위가 "적당성"을 무시한 채 지나치게 행해지는 것은 이 공간을 공유하는 많은 사람들을 자신의 사적 감정의 인질로 잡는 바람직하지 못한 행위라 생각합니다.

2014년 12월 박현정 당시 서울시향 대표가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한겨레

저는 이 사태가 경찰조사 과정에서 또 한 번 확대되어 상관없는 여러 사람들이 배후 내지는 사주한 사람들로 지목된 것에 대해서도 심히 유감이라 생각합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곤경에 처했을 때 주변 사람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박 전 대표도 나름대로 힘든 시간을 보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분 주변에는 그분의 상황을 자기 일 같이 생각하고 얘기를 들어주고 위로하고 걱정해주는 분들, 또 조언을 해주거나 전문적인 지식으로 도와주거나 여러 가지 일에 손발이 되어준 분들이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은 그분의 권리입니다. 또 박 전 대표가 사적인 공간에서 직원들과 정 전 감독에 대한 분노를 정제되지 않은 언어로 표현했을 수 있다 생각합니다. 이것도 그분이 한 인간으로서 당연히 가질 수 있는 권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직원들에게도 똑같은 권리가 부여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직원들에게도 그들의 고통을 자신의 것같이 느끼며 안타까워하고, 위로하고 걱정해주는 사람들이 당연히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배후자나 선동자, 또는 가담자로 언론에 표현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또 이들도 사적인 공간에서 자신들의 생각과 감정을 여과 없이 표현할 권리도 있습니다. 이것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권리입니다.

이런 사적인 대화나 문자가 당사자들의 사회적 위치나 서로의 상관관계 그리고 개인적 성향이 고려되지 않은 상태에서 해석될 때 그것은 왜곡됩니다. 이것은 차치하더라도 단순히 그것이 사적인 공간을 떠나 공적인 영역에 던져진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왜곡될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오케스트라나 행정을 담당하는 사람과 음악을 담당하는 사람 사이에 의견차이나 알력이 있을 수 있습니다. 행정감독과 음악감독이 너무 마음이 잘 맞으면 그 오케스트라는 망합니다.

정 전 감독은 평생 외국의 많은 오케스트라와 일해왔기 때문에 그에게 행정감독과의 의견 차이는 너무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로 박 전 대표를 퇴출시키려 했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가질 수 없습니다.

한 오케스트라의 행정감독은 아주 어려운 임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경제적 효율과 예술적 이상 사이에서 최상의 밸런스를 만들어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딜 가나 완벽한 단체는 없습니다. 그리고 어느 단체든지 수장이 바뀌면 새로 온 사람에게는 항상 개선해야 될 점이 눈에 보이는 법입니다.

박 전 대표가 언론을 통해 했던 시향이라는 조직에 대한 평가는 심히 주관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문제가 실제로 있다 치더라도 그런 것을 개선하라고 자신을 그 자리에 임명했다는 것, 곧 그 일이 자신의 임무였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한 조직의 수장은 밑에 있는 직원들을 고도의 전문성을 가지고 이끌고 그 조직의 문제점이나 직원들의 실수를 내부적으로 비판하고 시정하되 대외적으로는 모든 것을 자신이 책임져야 하고, 그 조직의 이미지를 보호해야 합니다.

언젠가 한 신문에서 박 전 대표의 주장이 극히 선동적으로 "내가 낸 세금이 이렇게 낭비되는 걸 보고 놀랐다" 라고 보도된 걸 본 적이 있습니다. 이런 주장은 많은 수의 납세자들에게 강한 호소력을 가지고 서울시향에 대한 반감을 자극하기 충분합니다.

세금은 시향을 비판하는 분들만 내는 것이 아닙니다. 직원들도, 정 전 감독도, 저도 또 서울시향을 옹호하는 분들도 내고 있습니다. 만일 시향을 비판하는 분들이 내는 세금이 그대로 시향에 투입되어 낭비된다고 설정한다면, 저희들이 내는 세금도 그렇게 되어 대표이사의 급여에 사용된다는 설정도 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우리가 내는 귀중한 세금으로 급여를 받는 대표이사가 위에 언급된 조직의 수장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할 것을 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정명훈 서울시향 예술감독이 2015년 12월 30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서울시향 송년음악회에서 서울시향 감독으로서 마지막 지휘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이 사태의 본질은 호소문을 발표한 직원들과 박 전 대표 사이의 인권문제입니다.

그 동안 거론되었던 "행정적 의혹"이라는 것도 철저하게 분리되어야 합니다. 이 사태가 발생한 초반 여러 가지 행정적 이슈에 대해 충분한 해명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고 그 외의 사안에 대해서도 충분한 반박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 대단히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런 행정상의 불분명한 점들을 책임을 맡은 사람들이 서로 대화를 통해 차분하게 합리적으로 풀어가는 것이 진정으로 불가능했는지, 그리고 이 사태가 우리 사회의 소중한 문화자산인 시향의 10년간의 성과가 무참히 폄하되고 또 상임지휘자가 퇴출되는 결과를 불러올 정도로 확대되는 것이 불가피했는지 스스로에게 질문해봅니다.

시향은 재단법인이 된 후 지난 10년간 한국을 대표하는 오케스트라로 놀라운 성장을 했고 국내뿐 아니라 국제적 무대에서 한국 음악계의 대변인 역할을 해왔습니다. 하지만 이 사태로 인해 시향과 정 전 감독이 10년간 쌓아온 눈부신 성과는 여지없이 폄하되었고 국제음악계에서 한국의 이미지 또한 크게 손상되었습니다.

오케스트라의 반전에도 중력의 법칙이 적용됩니다. 올라가는 것은 어렵지만 밑으로 떨어지는 것은 순식간입니다. 서울시향의 업무는 좋은 공연을 서울시민들에게 선사해 이 사회의 문화적 가치를 창출해 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난 몇 년간 끊임없이 지속되어 왔던 외부의 공격에 대한 소모전으로 인해 이런 저희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는 것이 너무나 어려웠습니다. 시민의 소중한 세금으로 운영되는 서울시향의 본 업무에 충실하지 못하게 되는 것도 세금의 낭비라 생각됩니다.

누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든가 국제대회에서 큰 상을 받으면 모든 국민이 그들이 국위를 선양했다는 환호하고 뿌듯해 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우리 과학자 중에 노벨상 수상자가 배출되어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의 위상이 올라가는 날이 올까 고대하고 있습니다.

정명훈 지휘자는 국제사회에서 수십년간 대한민국 음악계의 대변자 역할을 해왔고, 그 역할은 돈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그가 고국에서 이런 부당한 대접을 받는 것을 직접 목격하는 것은 저에게 너무나 큰 충격이었습니다.

한국 사람으로 외국에서 오래 활동을 하다 보면 모국의 문화적 수준이 자신의 예술가로서의 입지와 직접적 연관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외국에서 아무리 화려한 커리어를 쌓는다 해도 결국 모국의 사회에 기여하는 것이 더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 동기로 정 전 감독은 한국에 돌아와 서울시향과 10년간 일하며 이 오케스트라를 발전시키겠다는 청중들과의 약속을 지켰습니다.

저도 제가 수십 년간 국제무대에서 활동하며 한국사람으로서 느꼈던 서러움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여기에 돌아와 일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난 10년 동안 서울시향은 많은 성과를 올렸지만 너무나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끊임없는 소모전을 해야만 했습니다. 10년 전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 제가 가지고 있었던 열정과 희망도 수많은 어려움을 겪으며 회한, 슬픔 그리고 분노로 변해왔습니다.

어떤 분들은 서울시향의 활동이 "별것 아니다"라고 얘기합니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면 그 "별것 아닌 것"을 그냥 조용히 하게 내버려 두면 안 되는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정명훈 서울시향 예술감독이 2015년 12월 30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서울시향 송년음악회에서 서울시향 감독으로서 마지막 지휘를 마친 후 관객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 연합뉴스

지난 수년간 있었던 서울시향과 정 전 감독에 대한 부당한 공격은 지난 16개월 동안 더욱 급격히 심화되었고, 한쪽의 주장에만 힘을 실어주는 편파적인 보도는 아직도 진행 중입니다.

심리전과 세뇌의 차원을 넘어 거의 최면술의 경지에까지 승화되어 국민을 선동했던 1930년 독일 언론의 예를 굳이 들지 않는다 해도 우리는 공정하지 못하고 편파적인 언론에 병들어가는 나라들의 예를 지금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 사태가 진행되는 기간 동안 접했던 일부 매체들의 보도들은 사태의 실체를 파헤치려 한다기보다 어떤 목표를 정해 놓고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 질주하는 경마와 같았습니다.

그런 매체들은 이 사태에 너무나 많은 피해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딱 한 사람만이 피해를 본 것같이 보도하며 한 개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은 인권유린이며 범죄라는 엄중한 경고까지 잊지 않았습니다.

명예훼손에 따른 인권유린을 막아야 한다는 말은 원칙적으로 옳은 말입니다. 하지만, 이런 원칙이 한 사회에서 그저 선택적으로만 적용될 때 우리는 그 원칙의 석연치 않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중국에서 "누가 부정부패로 사형당했다"라는 뉴스를 들을 때 어느 누구도 그것을 통해 그 사회가 깨끗해졌다고 믿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불공정하고 편파적인 보도는 사람들에게 사물을 바라보는 객관적인 시각을 앗아가고 그 대신 그들에게 자신들의 분노를 쏟아 부을 대상을 제공합니다. 저는 정 전 감독을 향한 대중들의 분노의 도를 넘어선 "증오"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전적으로 그들의 증오의 원인이 "지휘자 정명훈"인가 질문해봅니다.

인간은 원론적으로 양과 늑대의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양이 되느냐 늑대가 되느냐는 스스로 어떤 동물에게 먹이를 주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저는 이 사태가 진행되는 동안 너무나 많은 기회에 평생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인간의 깊은 밑바닥을 접할 수 있었고 거기에 자리 잡고 있는 비열함, 추악함, 가증스러움에 소스라쳐 놀랐습니다. 또 지성인, 문화인을 자처하는 우리에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배후설, 조종설, 조작설 같은 천박한 차원의 얘기가 어느새 일상용어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자각할 때마다 극도의 수치심을 느꼈습니다.

참으로 이 사태는 모든 사람들 안에 숨어있던 늑대를 깨워 먹이를 던져줘 그것을 살찌게 한 병적인 현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태를 통해 보아온 우리 사회의 단상은 심히, 암울한 메시지를 저에게 던져주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이런 암울한 단상의 원인 제공자보다는 그것을 용인하는 사회에 대한 분노가 깊어졌습니다.

정명훈 서울시향 예술감독이 2015년 12월 30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서울시향 송년음악회에서 서울시향 감독으로서 마지막 지휘를 마친 후 차량에 탑승하며 인사하고 있다. © 연합뉴스

제가 이 글을 쓰는 것은 누구를 옹호하기 위해, 또 지탄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아닌 것을 아니라 하기 위해 쓰는 것입니다.

이 사태는 우리나라 문화계의 큰 흑역사로 남을 것이고 역사는 언젠가 우리에게 책임을 물을 것입니다. 그 책임 앞에서 무엇인가 했다라는 떳떳함을 갖고자 이 글을 쓰는 것입니다.

또 누구나 제 말에 공감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도 제 말을 들어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여태껏 쌓여온 모든 것은 정리하고 해명하고 이해시키는 과정은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한, 그리고 고독하고 외로운 투쟁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외로운 투쟁을 해야만 합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많은 것이 파괴된 이 사태에서 우리가 배우는 것이 없다면 그 희생은 무모한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또, 앞으로 50년 후, 100년 후 우리 모두가 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도 서울시향은 존재해야 하고, 그때의 서울시향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느냐는 "지금" "우리가" 책임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언론인 여러분들께 부탁드립니다. 이 사태는 현재 진행 중입니다. 반전이 된 것도 결론이 난 것도 아닙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대중들에게 재밋거리를 던져주는 것이 언론의 역할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쓸 얘기를 만들어 던져드리지 않겠습니다. 여러분의 판단력을 믿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께 제 편이 되어 달라 호소하지도 않겠습니다. 여러분들은 객관성을 지킬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어린아이같이 나만의 고통을 알아달라 떼를 쓰지도 않겠습니다. 여러분들을 저의 감정의 인질로 잡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저 여러분들께서 앞으로의 진행상황에 대해 비판적 거리와 냉철한 시각으로 차분하고 객관적인,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을 하게 하는 기사를 써주시기 바랍니다.

몇 년 전 서울시향이 외부의 공격을 당할 때 제가 긴 글을 써서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3-4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 글에 담긴 저의 생각에는 한 치의 변화도 없습니다.

지난 몇 년간의 시간은 저 자신에게 너무나 처절한 시간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제가 느꼈던 분노와 추악함에 대한 참을 수 없었던 정신적 구토증은 오히려 저에게 소소한 일상의 소중함과 아름다운 것에 대한 갈망을 가르쳐줬습니다.

또 진실은 저절로 밝혀지지 않고 그것을 밝히려 노력하는 자에게만 그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을 깨닫는 기쁨을 선사했습니다.

2016년 4월 7일

진 은 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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