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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살리에리 갈등에 여자가 낀다면

'해어화'의 갈등구조와 교훈은 지나치게 익숙하다. 여자들의 우정은 믿을 수가 없고, 남자들은 모든 여자들의 긍정적인 관계를 질투와 증오로 바꾸어놓는다. 여기엔 다른 예술가의 재능을 질투하는 예술가에 대한 '아마데우스'식 주제도 있지만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의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매개체로 여자를 넣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여자 예술가들이 주인공이라면 이건 고려할 필요도 없이 당연한 무언가가 된다.

  • 듀나
  • 입력 2016.04.06 12:34
  • 수정 2017.04.07 14:12

한동안 사람들이 <해어화>에 대해 엉뚱한 기대를 품었던 때가 있었다. 지금도 <해어화>로 검색해보면 '한효주 x 천우희' 같은 게시물들이 걸려나온다. 이 두 사람이 이전 작품인 <뷰티 인사이드>에서 커플로 나왔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조금 기다려보면 <해어화> 클립과 <뷰티 인사이드> 클립을 짜깁기한 윤회설 조작 영상물도 유튜브에 뜰 거다.

이들이 정말로 <해어화>가 동성애 영화라고 기대했던 건 아니다. 일단 옆에 유연석이 딱 버티고 있었으니까. 이 배우의 캐릭터는 척 봐도 이 두 여자들 사이에 껴서 익숙한 삼각관계를 만들 게 뻔했다. 그래도 기대를 품을 수는 있었다. 남자가 사이에 껴도 두 사람의 관계가 보다 재미있고 복잡한 무언가일 가능성에 대한 기대. 내가 기대했던 건 40년대 할리우드 여성영화(Women's film) 가까운 무엇이었던 것 같다.

기대가 아주 틀리지는 않았다. <해어화>는 익숙한 멜로드라마였고 여성 캐릭터의 비중이 아주 컸다. 유연석의 캐릭터 비중은 베티 데이비스 영화에 단골 상대역으로 출였했던 조지 브렌트 정도. 영화 무게 대부분은 두 여자배우인 한효주와 천우희의 어깨 위에 걸쳐져 있다. 남자배우들로 도배가 된 요새 한국 영화계의 비정상적인 풍경을 고려해보면 <해어화>는 분명 반가운 영화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갑갑해 미치겠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원래 멜로드라마의 갈등구조란 익숙한 법이다. 하지만 <해어화>의 갈등구조와 교훈은 지나치게 익숙하다. 여자들의 우정은 믿을 수가 없고, 남자들은 모든 여자들의 긍정적인 관계를 질투와 증오로 바꾸어놓는다. 여기엔 다른 예술가의 재능을 질투하는 예술가에 대한 <아마데우스>식 주제도 있지만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의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매개체로 여자를 넣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여자 예술가들이 주인공이라면 이건 고려할 필요도 없이 당연한 무언가가 된다. 이 '고려할 필요도 없는 당연한 설정' 때문에 종종 캐릭터는 섬세한 심리묘사가 따라야 할 장면에서도 무조건 정해진 이야기에 끌려다닌다. 좋은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들이 안쓰러워지는 순간이다.

앞에서 40년대 여성영화에 대해 이야기했다. 당시에도 부정적인 여성들의 관계를 그린 영화들은 많았다. 헤이즈 윤리 규약 때문에 보폭도 넓지 않았다. 하지만 그 장르 영화 속에서 여자들이 맺었던 관계는 우리가 <해어화>에서 본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이내믹했다. 아무리 제한된 조건이라고 해도 두 여성이 쌓아올릴 수 있는 관계의 총합은 예상외로 많다. 지금 우린 당시 할리우드 사람들보다 훨씬 자유로운 환경에서 작업을 하고 있다. <해어화>처럼 결말이 정해진 드라마라고 해도 관계의 가능한 스펙트럼을 탐구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한국 여성들의 관계를 보다 입체적이고 재미있게 다룬' 가상의 영화에 대한 심각한 갈증을 겪었다. 그리고 여기에 너무나도 당연하게 '가상의'란 말을 덧붙인 기계적인 습관에 오싹해졌다. 이런 영화에 대한 기대가 지금의 한국에선 그렇게 무리한 꿈인 걸까.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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