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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핑턴포스트 인터뷰] 은평갑 박주민 후보: 세월호를 전면에 걸고 선거에서 이길 수 있을까?

  • 김병철
  • 입력 2016.04.07 10:00
  • 수정 2016.04.12 06:59

그의 오래된 별칭은 '거리의 변호사'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사무차장으로 밀양 송전탑, 제주 강정마을 등 갈등의 현장을 지켰다. 변호사 자격증을 지닌 시민단체 활동가 같았다.

그다음엔 '세월호 변호사'로 불렸다. 지난 2년 동안 그는 세월호 참사 4‧16가족협의회의 법률대리인으로 살았다. 서울 서초의 법무법인 사무실 대신 경기 안산 정부합동분향소로 출근했다. 2014년 10월 여야가 세월호 특별법에 합의했을 때 더불어민주당(당시 새정치민주연합)을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20대 총선을 앞두고 갑자기 더불어민주당(더민주)에 입당했다. 시민사회계는 물론 그를 영입하려던 진보정당에게도 의외의 사건이었다. 많은 이들은 그가 왜 정치에 뛰어들었는지, 하필이면 그것도 기성정당에 합류했는지 궁금해했다.

박주민은 국회에서 한 명이라도 세월호 문제를 전면에 걸어야 하지 않겠냐고 말한다. 하지만 상황은 녹록지 않다. 20대 국회에서 그는 세월호 가족을 대변할 할 수 있을까.

대담 = 김병철 뉴스 에디터

사진, 영상 = 이윤섭 비디오 에디터

- "911 테러에서 조지 부시 대통령은 조사를 받았다. 박근혜 대통령도 조사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 참사 당시부터 지금까지 청와대는 법적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고 하고 있죠. 하지만 공개된 자료를 보면 청와대와 국가안보실이 콘트롤타워인건 맞아요.

법적으로도 책임을 져야 하고, 실제로도 많은 지시를 내렸어요. 지시가 적절했느냐? 그렇지 않아요. 구조를 해야 하는데 영상을 보내라고 했어요. 전 그게 구조에 영향을 미쳤다고 봐요.

메르스 사태나, DMZ 목함지뢰를 보면 청와대가 제대로 작동을 안해요. 유승민 전 원내대표도 북한에 평화 메시지를 보낸 건 정신 나간 일이라고 했잖아요.

세월호도 그렇고 그 이후에도 난맥을 보이니까 점검을 해야 한다는 거예요. 특조위 안에 이 사회 전반적인 재해, 재난을 담당하는 안전소위원회가 있어요. 최종적인 콘트롤타워니깐, 그렇지 않으면 우리나라 안전을 어떻게 담보합니까?

- 인양이 시작될 예정이고, 총선 3일 후가 세월호 2주년이에요. 총선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하시나요?

= 영향을 미쳤으면 좋겠어요. 지금 정치권에서 세월호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얘기하는 사람이 없어요. 이대로 가면 별 영향이 없을 거예요.

- 지금 국면에서 국민들이 세월호에 대해 알아야 할 건 어떤 게 있을까요?

= 정부는 6월이면 특조위가 마감한다고 공공연하게 말하고 있어요. 인양은 7월이에요. 그러면 특조위는 배를 못 보고 끝나게 됩니다. 조사를 못 해요.

국민들은 세월호가 올라오면 천안함처럼 전시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정부는 한마디도 하고 있지 않아요. 약속을 안 하는 거예요. 그러면 한 달 정도 조사하고 배를 분해해서 팔아버리거나 용광로에 넣어도 어쩔 수 없겠죠.

천안함

- 만약 이번 총선에서 국회의원이 되신다면 이런 것들을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 영향을 미칠 수 있고, 제 노력에 따라 실현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전에는 시민들이 주장하고 정치권은 잘 화답 안 했는데, 한 놈이라도 미친 척하고 화답하면 좀 다르지 않을까요.

막스 베버가 미국의 정당제를 분석하면서 '정당은 머신'이라고 했어요. 전국적으로 동일한 의견을 전파하기도 하고 수렴하기도 하는 하나의 장치다. 이렇게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하지만, 너무 강력해서 사람이 이 시스템에 종속되기도 한다.

그런데 시민의 지지를 받는 데마고그(Demagogue), 나쁜 말로 선동가가 나타나면 정당도 고개를 숙인다는 거예요. 표를 받아야 하니까. 만약 제가 들어가고, 많든 적든 시민의 지지를 받으면 한 명이라도 제 눈치를 보겠죠. 그런 식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하죠.

미국 민주당의 대선 후보인 버니스 샌더스(왼쪽)와 힐러리 클린턴

- 버니 샌더스처럼요?

샌더스 후보 주변에 사람이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지만, 대중적 지지를 받으니까 정당이 막 움직이잖아요. 가능하다는 거죠. 불가능한 것은 아니에요.

- 그런데 왜 진보정당이 아니라 더민주를 선택하신 건가요?

= 더민주의 변호 가능성을 봤어요. 그리고 당장 뭔가 현실적으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당장 들어가야 하는 선택성을 보면 정의당보다는 더민주가 더 낫다는 판단을 한 거죠.

- 국회의원이 되면 가장 만들고 싶은 법은 뭔가요?

= 가장 급한 건 세월호 특별법 개정이에요. 특조위 기간 연장, 권한 보충.

그리고 지속적으로 하고 싶은 게 있어요. 대규모 국책사업을 할 때 해당 지역에 충분히 설명하고, 충분한 의견을 수렴하는 절차를 만드는 것.

노무현 대통령 때 법안까지 만들었는데 입법이 안 됐어요. 그 법이 있었다면 강정마을, 밀양 송전탑에서 주민들이 그렇게 할 필요가 없죠. 법이 만든 절차 속에서 충분히 하시면 되죠.

그리고 독일식으로 선거제도개혁. 그건 몇 년 걸리겠지만 해보고 싶어요.

2014년 12월 밀양 115번 송전탑에서 농성하는 주민들

- 5, 10년 후 어떤 미래를 그리고 계신가요?

= 뭔가 조금이라도 사회에 도움이 되려는 일을 하고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박주민의 도전은 쉽지 않다. 문재인 전 대표의 영입인사지만, 김종인 대표 체제에서 공천 발표 막바지에 겨우 서울 은평갑의 공천을 받았다. 5선 현역인 이미경 의원이 컷오프된 자리다.

은평갑은 야당 우세 지역이다. MBC에 따르면 1988년 이후 7차례 총선에서 보수정당이 승리한 건 단 두 번이다. 하지만 은평에서 박주민은 지역 기반이 없는 생소한 인물이다.

반면 새누리당 최홍재 후보는 이 지역에 22년 거주했고, 일대일 구도였던 지난 총선에서 이미경 후보에게 6천 6백여 표 차이(8%포인트)로 패했다. 일여다야(一與多野) 구도에선 당연히 유리하다. MBC는 박근혜 정부 청와대 행정관을 지낸 최 후보와 박 후보를 '뉴라이트 대 세월호 변호사' 구도라고 보도했다.

당내에선 세월호를 전면에 내세우는 것에 대한 우려도 있다. '세월호 변호사'라는 타이틀이 어떤 유권자들에겐 오히려 역효과를 줄 수 있다는 의견이다. 조선일보에 따르면 은평갑에서 내리 5번 당선된 이미경 의원은 박주민 지지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박 후보를 선거를 한 달도 남겨두지 않은 채 지역구에 내려보낸 것은 대단히 잘못됐다"

"지역구에서 '세월호를 내걸지 말아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다"

"박 후보를 계속해서 주목해주시고 당선될 수 있도록 힘을 모아 달라"

기호 1번 최홍재(새누리당)

기호 2번 박주민(더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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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은평주민 박주민 on Saturday, April 2, 2016

기호 5번 최승현(노동당)

허핑턴포스트코리아는 지난 2월 광화문 세월호 농성장에서 그를 만났다. 인터뷰이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공간이었고, 그가 편안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곳이었다.

박주민 변호사가 서울 광화문 세월호 농성장을 바라보고 있다.

1. 거울도 보지 않은 자학적 공부벌레

그의 표현을 빌리면 박주민은 대원외고 시절 '자학적 공부벌레'였다.

"'여학생을 쳐다보면 공부를 못한다'는 말에 3년 내내 땅만 쳐다보고 다녔어요."

"'외모에 신경 쓰면 공부 못한다'고 해서 화장실 드나들 때 거울 안 보려고 일부러 고개를 숙이고 다녔어요."

공부 외에는 일체의 것을 하지 않았다. 아침자습부터 저녁자습 마칠 때까지 화장실 한 번 외에는 자리를 뜨지 않았다. 수학여행을 갈 때도 영어단어장을 가지고 갔다.

그렇게 서울대 법대에 진학한 박주민은 다른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다. 공부 때문에 건강을 상당히 해쳤고, 머리에 쌓은 지식은 많았지만 내면은 아직도 청소년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미팅도 했죠. 몇 번 나가보고 좌절했어요. 자학적, 폐쇄적으로만 사람들을 대하다 보니 연애같은 내밀한 관계를 만드는 데 서툰 걸 알게 됐죠. 마치 정글북에 나오는 소년처럼요. 사람들과 지내면서 나를 좀 더 회복시켜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고등학교 시절을 극복하고 어릴 때의 발랄한 사람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어요. 그래서 남들이 꺼리고 안 하는 걸 찾아서 뭐든지 했어요. 선배들이 집회, 철거촌, 농활 가자고 하면 '저 한 번 가보겠습니다'고 했지요."

2. 수업 대신 집회만 갔던 운동권

사회성을 회복하기 위해 시작한 다양한 활동은 그를 학생운동으로 이끌었다. 모든 일에는 계기가 있기 마련이다. 박주민에게 그 시작은 한 권의 책이었다. 1994년 대학 입학을 앞둔 상태에서 그는 광화문의 한 대형서점을 찾았다.

"대학 들어가기 전에 법서를 한 권 읽어보려고 했어요. 당시 저는 롯데리아 가서 밥 먹는 법도 몰랐어요. 공부만 했으니까. 두리번두리번 하다가 법이라고 써있는 책 하나를 사서 빨리 나갔죠."

그 책의 이름은 '유물론적 변증법'이다. 기자가 '장난 아니냐'고 물었으나 그는 진지했다. 진짜 법서인 줄 알고 산 거다.

"철학책이라는 걸 처음 본거죠. 역사 그리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이렇게 볼 수 있구나. 변증법이라는 사고방법이 굉장히 과학적으로 다가왔어요. 정(正)과 반(反)과 합(合)이 있고 모든 사물은 변화한다."

"답답한 제 상태(정)에 노력하는 '반'이 되면, 뭔가 나은 내(합)가 될 수 있겠구나. 대학 가서 반을 하자. 새로운 경험을 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정-반-합이 될 거야. 가만히 있으면 계속 정-정-정이잖아요. 그래서 대학 가서 '저요 저요 저요'하고 안 해봤던 거, 마음 속으로 기피했던 걸 했던 거죠."

박주민 변호사가 2009년 야간집회금지조항 헌법불합치 결정에 대해 입장을 밝히고 있다.

3. 크리스마스 이브의 다짐

1996년 겨울, 서울대가 있는 신도림동의 철거촌 주민들이 법대 학생회를 찾아왔다. 철거되면 거리에 내앉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당시 3학년이었던 박 변호사 등은 이들을 돕기로 했다. 가장 좋은 해결방법은 공공임대주택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당시 구청장은 입주자격을 부여할 수 있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였어요. 구청장이 한 번 오라고 해서 초등학생 꼬마까지 같이 갔어요. 눈이 엄청 왔는데 머리에 이만큼 쌓일 때까지 몇시간 동안 주차장에서 기다렸죠. 하루가 다 지나갔지만 결국 못 만났어요."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박주민은 처음으로 사법고시를 진지하게 생각했다.

"혹시 내가 변호사였다면 적어도 구청장이 만나주지는 않았을까?"

그 전까지는 "운동하는 사람으로서 사법고시는 배신"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바로 사시를 보는 건 말이 안 되니까, 5학년까지는 운동을 하고 군대 다녀온 후에는 한 거죠."

다시 고등학생 시절과 같이 공부했다. 서울대 도서관에 가장 먼저 도착해 가장 늦게 떠났고, 공부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1년 4~5개월 만에 사법고시 1, 2차에 합격했다.

박주민 변호사는 물대포 직사는 기본권 침해라는 판결을 끌어냈다.

3. 변호사 자격증이 있는 활동가

"왜 검사, 판사는 아니었어요?"라는 질문에 박주민은 이렇게 말했다.

"변호사는 사람들 곁에 있을 수 있잖아요."

변호사 자격증은 꽤 많은 면에서 도움이 됐다.

"일단은 변호사니까 제 말을 들어주기는 하죠. 최근에도 구청을 방문할 일이 있었어요. 공무원들도 선뜻 만나주더라고요. 변호사가 되면 약간은 그 문턱을 쉽게 넘을 수 있고, 넘을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어요."

박주민은 변호사라는 직업을 가장 잘 활용하는 활동가였다. 기자회견, 서명운동에 그치는 게 아니라 법의 영역에서 더 수월하게 변화를 이끄는 게 가능해졌다.

"사회에서 보면 법이 문제 해결의 수단이 되기도 하고 최종적인 결과물이 되기도 해요. 문제 해결하면 법문화해서 종결짓잖아요. 운동할 때 폭이 좀 더 넓죠. 주장만 하는 게 아니라. 헌법 소원도 활용할 수 있고요. 그런 게 굉장히 좋죠."

4. 세월호 변호사 2년

2014년 세월호 참사 2주 후부터 박주민은 아예 안산으로 출근했다. 처음엔 가족회의에 의자, 음료수 놓기, 배달 온 짜장면 받기부터 했다. 당시엔 가족 외에는 아무도 회의에 들어갈 수도 없는 분위기였다.

그러다가 회의록도 작성하고, 회의 안건을 정리하는 일을 도왔다. 공무원들이 찾아오면 가족들이 확인할 부분을 조언했다. 생계는 법무법인 이공의 동료 변호사들이 도와줬다. 그가 맡고 있던 사건을 분담했고, 조금씩 모아서 생활비를 보태줬다.

'4‧16가족 협의회의 법률대리인'이 된 건 7월 국회 농성 때다. 새누리당, 새정치민주연합(현 더불어민주당)과 협상에서 가족들은 그를 데려갔고, 법률대리인으로 소개했다.

네 개의 위헌 판결

시민사회계에서 박주민은 활동뿐만 아니라 뛰어난 실력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는 지금까지 헌법재판소에서 네개의 위헌을 이끌어냈다.

1. 영화 제한상영가 등급제: 헌법불합치(2008년)

영화 천국의 전쟁 포스터

2. 야간 옥외집회 금지: 헌법불합치(2009년)

2008년 광우병 쇠고기 촛불집회

3. 전면차단 차벽: 위헌(2011년)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직후인 2009년 5월31일 경찰이 서울광장을 전경버스로 에워싸 시민 통행을 막은 것은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나왔다

4. 야간 시위 금지: 위헌(2014년)

경찰의 2차 민중총궐기(2015년) 불허는 부당하다는 법원의 결정, 그리고 물대포 직사는 기본권 침해라는 판결을 받아낸 것도 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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