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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라는 보물 창고

"언젠가 어린아이였고 아가씨였고 아줌마였던 할머니들은 수많은 세월을 건너오며 변화를 몸으로 겪어 왔죠. 굵직굵직한 생의 마디를 건너뛰며 숱한 기억과 감정 속에서 사셨어요.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분도 있고, 노름하는 남편 때문에 온갖 고생을 한 분도 있고. 제가 상상조차 못할 고초도 겪었고요. 아픔을 묻고 꿋꿋하게 살아오셨어요. 생명 가진 존재의 강인함과 존엄함. 할머니 한 분 한 분이 개성 넘치는 삶으로 가르침을 주셔요."

전남 화순 골짜기에서 할머니들과 살아가는 이야기 《할머니 탐구생활》 쓴 정청라 씨

'운이 좋다면 나도 할머니가 되어 있을 것이다.' 정청라 씨는 '운이 좋다면'이라고 말했다. 별일 없다면 늙어서 할머니가 되겠지만 그걸 축복으로 여긴 적이 없기에 나는 깜짝 놀랐다. 이제 고작 마흔을 몇 해 앞두고 있으면서 어디에서 저런 통찰력을 얻었을까? 동년배라서 호기심이 더 일었다. 《할머니 탐구생활》에 담긴 이웃 할머니들과 정 씨 가족이 복닥복닥 살고 있는 전남 화순군 어시랑마을로 찾아갔다.

글 김세진(살림이야기 편집부) | 사진 샨티출판사

지키는 사람 하나 없는 기차역에서 내려 차로 다시 20여 분을 더 들어가야 어시랑마을에 다다른다. 택시를 타려니 기사가 차를 세워 두곤 양봉하느라 한창이었다. 기다리면서 목이 말라 간판을 보고 슈퍼 앞에 다다르니 문이 닫혀 있었다. 도로 택시 대기실로 돌아가 찬장을 열어 스스로 차를 끓여 마셨다. 채비를 마친 기사에게 마을 이름을 말하니 대번 '다울이집에 가는구려' 하고 안다. 내 나이 대를 보고 추측한 것이다. 시골 중 시골이다. 서로 속속들이 알고, 뭐든 천천히 움직이는 곳.

다울, 다랑이 아빠 박상아 씨는 땔감으로 쓰려고 톱으로 나무를 자르고 있었다. 나를 내려 주던 기사는 전기톱으로 자르라고 잔소리다. 박 씨는 그저 웃어 보인다. 말들을 간섭으로 여기지 않고 그저 들어 넘길 줄 모른다면 살기 힘들 것이다. 정청라 씨 가족이 5년 전 이곳으로 들어와 살기 시작할 때부터 이웃 할머니들은 틈틈이 와서 "호박 다 엥겼어?", "싸게싸게 깨 숭구지 뭐해? 때 놓치면 우쩌려고?" 하고 잔소리를 한다. 정 씨는 때로 "제발 저희를 가만히 좀 내버려 두세요" 하고 소리치고 싶다고 했다.

간섭을 애정으로 받아들이기까지

서울에서 나고 자라 이제 귀농 10년차인 도시내기 정청라 씨에게 힘든 일이 또 있었다. 출판사에서 어린이책을 만들다가 대안학교 선생을 거쳐 귀농하면서 그는 말하던 대로 '자연에서 자연의 하나로 자급자족하며' 살고 싶었다. 농약과 비료를 치지 않으며 먹을 만큼만 농사하는 삶을 택했다. 그런데 농약을 치는 이웃 할머니 때문에 밭이 영향 받을까 염려도 되고 모질게 대하는 할머니 때문에 처음엔 속도 상했다.

하지만 '농약이 나쁘고 관행농이 땅을 망치는 게 사실이지만 그런 방식으로라도 땅을 지키고 있는 분이 있기에 우리가 살아간다. 그 공로와 노고를 무시할 수 없다. 그걸 욕심으로만 바라볼 수는 없다. 어쩌면 할머니는 주어진 조건에서 그저 부지런히 살아오신 것뿐인지도 모른다. 다른 데 눈 돌릴 틈 없이 일만 하다 보면 누구나 마음의 여유를 잃을 수 있다'고 생각을 바꿨다. 또 '다르다는 이유로 멀리할 게 아니라 자꾸 마주쳐서 서로를 다른 눈으로 바라볼 때, 새로운 세상을 만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고 나니 할머니들을 더 알아가고 싶어졌다. 마치 할머니들을 짝사랑하는 것도 같다.

특히 성격이 소극적인 할머니들에겐 더 다가서지 못해 안달이다. '어색하지 않게 함께 재미나게 시간을 보낼 방법이 없을까?' 고민한다. 옛날이야기나 노래를 해 달라고 조르기도 하지만 할머니들은 배시시 웃을 뿐이다. 그럴 땐 '도무지 건널 수 없는 강' 이쪽저쪽에서 마주보고만 있는 느낌이다. 할머니의 정신이 더 아득해지기 전에 깊게 만나고 싶어 조급하다. 할머니를 '보물 창고'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지닌 생명력과 삶의 지혜가 바로 보물이다.

"언젠가 어린아이였고 아가씨였고 아줌마였던 할머니들은 수많은 세월을 건너오며 변화를 몸으로 겪어 왔죠. 굵직굵직한 생의 마디를 건너뛰며 숱한 기억과 감정 속에서 사셨어요.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분도 있고, 노름하는 남편 때문에 온갖 고생을 한 분도 있고. 제가 상상조차 못할 고초도 겪었고요. 아픔을 묻고 꿋꿋하게 살아오셨어요. 생명 가진 존재의 강인함과 존엄함. 할머니 한 분 한 분이 개성 넘치는 삶으로 가르침을 주셔요."

할머니들은 나의 미래

귀농 첫해 정청라 씨 꿈에 어느 할머니가 나왔다. 귀농학교를 다니던 중에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병으로 돌아가셨고 그걸 계기로 친구 한 명과 함께 덜컥 경남 합천으로 막 귀농한 때다.

"꿈에서 방문이 벌컥 열리며 마귀할멈처럼 생긴 할머니가 뛰어 들어왔어요. 소름이 오싹 끼치게 무서웠지만 어쩐지 그러고 싶은 생각이 들어 할머니를 꽉 끌어안았더니 갑자기 온몸이 따듯해지고 눈물이 펑펑 쏟아지는 거예요. 얼마나 울었는지 깼을 때 눈물 자국이 남아 있었어요. 그 뒤 할머니들의 참견과 간섭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어요. '할머니들은 타자가 아니다. 나의 미래다. 함께 살며 뭐든 배우자.' 그러자 보물 창고의 문이 열리듯 스르르 관계가 열렸고, 보물 같은 가르침을 얻을 수 있었어요."

같이 살던 친구가 다시 서울로 돌아간 뒤에도 정청라 씨는 할머니 덕에 시골에 정을 붙였다. 스물아홉에 처음 밟아본 경상도 땅에서 사투리와 시골 환경이 낯설어 마치 외국인이 된 것 같고, 정붙이며 살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하던 때에 설매실 할머니가 나타나 수호천사처럼 일거수일투족을 함께하며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그곳에서 정청라 씨는 변산공동체 출신으로 같은 마을에서 살던 남편 박상아 씨를 만났고 두 사람은 지속적으로 자급자족이 가능한 환경을 찾다가 이곳 어시랑마을까지 흘러들었다.

《할머니 탐구생활》에서 이웃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풀어낸 정청라 씨는 합천에서 쓴 《청라 이모의 오순도순 벼농사 이야기》에서도 이웃의 이야기를 글로 남겼다. 차로 한 시간 거리인 장흥에 살며 종종 오가며 글쓰기 모임을 함께하는 김유리 씨는 정청라 씨에게 "삶을 글로 풀어내는 힘이 있다"고 했다. 특히 "귀농을 꿈으로만 여기는 사람들이 청라 씨의 글을 보면 좋겠다"고.

조건 없이 흐르는 사랑

"지금껏 아무 조건 없이 넘치는 사랑과 관심을 받으며 살았어요. 셋째는 임신해서 입덧하느라 밥을 못 먹으니 수봉 할머니가 새콤달콤한 도라지 무침을 해다 주시고, 한평 할머니는 막 담근 열무김치를 주셨어요."

얼마 전 돌아가신 소리실 할머니도 잊을 수 없다. 눈이 안 보이는 소리실 할머니는 딸이 휴가 때 가지고 온 포도 한 송이를 정 씨 가족에게 주려고 비오는 날 우산도 안 쓰고 헤매다 넘어졌다고 했다. 미끄러져서 포도가 떨어졌는데 만져 보니 괜찮은 것 같다며 건네주시는 포도를 받으며 코가 찡했다. 우산을 받쳐 집까지 모셔다드리고 돌아오는 길에 할머니가 미쳐 다 줍지 못해 흩어져 있는 포도알을 보았다. 너무도 귀한 포도이기에 빗속에서 바닥에 뒹굴고 있는 포도알을 아이와 함께 주웠다.

"포도를 먹으며 첫째 다울이가 '엄마, 이거 약 친 포도야?'라고 묻기에 이렇게 말해 주었어요. '이 포도는 약을 치고 안 치고를 떠나서 아주 귀한 포도야. 할머니가 주신 선물이잖아. 이건 그냥 포도가 아니라 할머니 마음이고 사랑이야."

정청라 씨는 '나도 할머니들처럼 아낌없이 조건 없이 누군가를 사랑하기'로 마음먹는다고 했다. 기차를 다섯 시간 타고 돌아가는 내게 그가 건넨 주머니엔 도토리묵을 넣은 채소김밥 두 줄과 사과 두 알, 이웃에게 선물 받은 알배추와 미나리, 그리고 화덕에서 볶은 콩을 담은 예쁜 유리병이 들어 있었다. 할머니에게 시작되어 흘러들어온 사랑을 그렇게 나도 먹었다. 아낌없이, 조건 없이 누군가를 사랑해야 하는 멋진 과제는 이제 내 몫이 되었다.

'숲속 놀이터'라 부르는 정청라 씨의 집은 서울에서 오가는 데 열 시간이 넘게 걸렸다. 하루에 한 대 다니는 기차시간에 맞추느라 오후 늦게 도착했다가 다음날 아침에 나오는데 아이들이 자꾸만 "더 있다" 가라고 했다. 내가 차타고 급하게 가버린 뒤에 아이들이 울먹했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먹먹했다. '다 우리'라는 뜻의 다울, '다 너랑나랑'인 '다랑'이는 참으로 사랑스러웠다. 엄마 뱃속에서 곧 나올 때를 기다리는 '다 나이고 다 너'라는 뜻의 '다나'도 분명 그럴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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