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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비율 6905%' 낳은 대통령의 시간

207쪽 분량의 감사보고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자원외교'라는 신기루를 향해 100m 달리기를 하는 민낯들이 보인다. 공기업들의 도덕적 해이 뒤에는 관료들의 영혼 없는 목표 관리가, '임기 중 한 건 해야 한다'는 대통령·측근들의 과욕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 결과 1376명 일자리가 날아가고 수조원의 국민 세금이 들어가게 생겼는데도 책임지는 자는 보이지 않는다.

  • 권석천
  • 입력 2016.03.30 07:43
  • 수정 2017.03.31 14:12
ⓒ연합뉴스

한국석유공사 4조5003억원, 한국광물자원공사 2조636억원.

지난 4일 두 공기업이 2015년 결산 결과 사상 최대의 적자를 기록했다. 부채비율은 석유공사 453%, 광물공사는 6905%(!)로 치솟았다. 당장 한파가 몰아치고 있다. 인력을 각각 30%(1258명), 20%(118명)씩 줄이고 임금도 최대 30%까지 삭감한다고 한다.

직접적인 원인은 석유·구리·니켈 가격 급락이다. 그러나 그 뿌리엔 이명박(MB) 정부의 '자원외교'가 있다. 당시 사들인 해외 자회사들의 부실이 반영되기 시작한 것이다. 광물공사의 손실 대부분은 멕시코 볼레오 구리광산 등 주요 광구의 평가액 급락에서 비롯됐다. 어떻게 이 지경까지 온 것일까.

감사원 감사결과보고서(2015년 11월)를 찾아봤다. '해외자원개발 사업'의 성과는 참담했다. 석유 부문에 지난 13년간 20조8000억원을 투자했으나 비상시 도입 가능한 석유 물량은 해당국 반출 규제 등으로 전체 지분의 24%에 그치고 있다. 국내 일일소비량으로 따지면 2.2%(6만 배럴/일). 비상 상황에 대비해 해외자원을 확보한다는 취지는 사라지고, 탐사·개발보다 기존 해외 업체 지분 사들이기에 눈이 벌겠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리스크(risk·위험) 관리도 겉돌았다. 국제입찰에 참여하면서 외부 전문기관의 경제성 자문을 하지 않는가 하면(129쪽), 영어영문학을 전공한 직원이 별도 교육을 받지 않은 채 기술 평가를 한 사례(130쪽)도 있었다. 이사회 의결 없이 사업비를 3080억원(석유공사), 422억원(가스공사)씩 추가 집행했다(143, 144쪽). 그 과정에 브레이크를 건 사람은 없었다. 자원업계 관계자의 설명이다.

"2008년 MB가 취임하면서 '에너지·자원 자주개발률' 높이기가 지상 과제로 떨어졌어요. 20%다, 25%다 말이 많았죠. 공기업 대형화 방침에 이어 2009년 자주개발률을 경영평가 지표에 포함시키자 공기업들이 앞다퉈 해외 투자로 몸집 불리기에 나선 겁니다."

답답한 건 앞으로 얼마가 더 들어갈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자전거가 멈추면 쓰러지는 법. 지금까지 석유·광물·가스공사 169개 사업에 35조원 넘게 투자됐는데 이 중 48개 사업에 46조원이 추가 투자될 예정이다(39쪽). 추가 투자비 중 3분의 2를 기존 사업 수익으로 조달한다고 하지만 과연 가능한 일일까. 지난 7년간 당초 계획보다 9조7000억원이 더 지출됐다 .

207쪽 분량의 감사보고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자원외교'라는 신기루를 향해 100m 달리기를 하는 민낯들이 보인다. 공기업들의 도덕적 해이 뒤에는 관료들의 영혼 없는 목표 관리가, '임기 중 한 건 해야 한다'는 대통령·측근들의 과욕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 결과 1376명 일자리가 날아가고 수조원의 국민 세금이 들어가게 생겼는데도 책임지는 자는 보이지 않는다.

"자원외교는 그 성과가 10년에서 30년에 걸쳐 나타나는 장기적인 사업이다. 퇴임한 지 2년도 안 된 상황에서 자원외교를 평가하고 문제를 제기하려는 것은 '우물가에서 숭늉을 찾는 격'이라 생각한다." MB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은 항변한다. 그렇게 긴 안목으로 추진돼야 할 해외 자원개발을 왜 5년 임기 내 사업으로 진행한 것인가. 우물가에서 숭늉을 찾은 사람은 MB 자신이었다.

국제 원자재 가격이 급등하던 당시보다 하락하는 지금이 자원개발의 타이밍일 수 있다. 다만 투자의 건전성과 투명성이 필수다. 이탈리아 자원 기업 Eni는 모든 사업의 경제성을 3개월마다 비교·평가하면서 과다 지분과 노후 자산을 매각한다. 감사원 보고서가 제시한 대로 철저한 구조조정과 함께 사업성 평가→투자 심의→외부 타당성 조사→사후 관리의 투자 프로세스가 빈틈없이 작동해야 한다.

버려야 할 건 자원개발이 아니다. 대통령의 시간표다. 자원외교의 교훈은 박근혜 대통령에게도 유효하다. 대통령이 스스로의 목표에 중독됐음을 깨닫지 못하는 한 5년 단위의 '국정 중독'은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 이 글은 중앙일보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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